폐쇄적 공동체 의식 철옹성…반시장주의적 입법 양산 격차만 키워

1. 무소불위의 입법권력

   
▲ 김인영 한림대학교 정치행정학부 교수
20세기를 ‘행정(行政)의 시대’라고 했다. 국가권력을 행정부가 가졌던 시대였다. 하지만 1987년 이후 대한민국의 권력은 행정부에서 입법부로 옮아갔다. 입법권력 내지는 ‘국회권력 시대의 도래’라고 하겠다.

그렇게 된 원인의 첫 번째는 국회의원들이 국민으로부터 선거를 통하여 권력을 직접 위임 받았다고 생각하는데서 기인한다. 그래서 국회의원은 개개인이 국민의 대표기관이라고 하고 그에 해당하는 권한을 부여한다. 거기에 헌법에 보장된 입법권과 예산 결정권이 추가되고, 국회에서의 발언에 대한 면책특권이 더해졌다. 때문에 우리는 국회의원직을 ‘책임은 없고 권한만 있는 자리’라고 부르고 있다.

김현의원의 막말, “너 내가 누군지 알아?”가 나온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국회의원의 무소불위 권력의 핵심은 행정부의 많은 정책결정과 그에 따른 집행이 입법에 의하여 예산이 확보되고 정당성을 부여받는다는 데 있다. 권력이 행정에서 국회로 옮아 갈 수밖에 없는 구조인 것이다.

두 번째는 국회가 조폭집단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폐쇄 소집단 공동체 의식을 가졌다는데 있다. 본인들의 어떠한 실수와 행동에 대하여도 소속 정당(政黨)의 보호와 동료의원의 명시적·암묵적 비호를 든든한 배경으로 가지고 있기 때문에 두려울 것이 없다. 삼권분립의 원칙에 따라 행정부와 사법부, 그리고 시민 등 외부세력의 견제가 작동하지 않는 구조가 철옹성처럼 작동하기 때문이다.

   
▲ 자유경제원에서 개최한 제10차 정치실패 토론회 '무소불위의 국회권력, 왜 그럴까?' 토론회에서 발언하고 있는 김인영 한림대학교 정치행정학부 교수.
새누리당 이정현의원은 2014년 10월 31일 대정부 질문에서 스스로 국회의원이 가진 특권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우리 사회에서 무노동 무임금이 적용되지 않는 유일한 집단, 주요 20개국(G20) 중 법을 만드는 사람들이 법을 안 지키는 유일한 나라, 선거제도가 정착된 나라 중 단식투쟁을 하는 국회의원이 있는 유일한 나라, 만일 국회와 국회의원이 국정감사, 국정조사, 청문회를 받게 되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고, 인사청문회 자료처럼 국회의원의 의정활동 관련 자료들이 공개되면 국민 여론의 뭇매를 맞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절대 스스로 반성하지 않고 이만큼의 자기비판도 희귀한 집단이 국회권력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오스트리아식 이원집정제 권력구조로의 개헌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 권력구조의 한 형태로서의 이원집정제(semi-presidential government)는 정치적 임무를 수행하는 선출직 대통령과 의회에 책임지는 내각을 이끄는 총리를 결합한 제도이다.

총리가 일상적인 국내 문제를 책임지고, 대통령은 이에 대한 감시, 대외 문제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된다. 하지만 실제 운용에 있어서 의회 선거 결과에 따라 대통령이 소속된 정당이 승리하면 수상 지명을 포함하여 내각까지 책임을 지게 되어 대통령제의 형태를 띠게 되고, 선거 결과 대통령과 수상이 소속된 정당이 다르게 된 경우 내치는 수상 중심으로 운용되어 대통령은 형식화 되고 내각제적 형태를 띠게 된다. 프랑스 정치가 대표적인 예다.

문제는 이원집정제가 프랑스를 제외하고 국제적으로 어려움에 직면한 유럽 국가들에서 특별한 매력을 가져다주었지만 제대로 성공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핀란드는 러시아라는 강대국을 골치 아픈 이웃으로 가지고 있어서 이러한 민감한 관계를 관리하는 데 이원집정제의 대통령이 외교에 집중하게 되었던 적이 있다.

그리고 공산주의 붕괴 직후 동유럽 국가들에서도 이러한 이중적 행정부 구조는 매력적으로 비쳤다. 그러나 국제적 압력이 감소하면서 대통령의 위상 또한 감소하게 되었고, 2000년에 핀란드는 헌법 개정을 통하여 의원내각제적 요소를 강화하였다. 그리고 헝가리와 같은 과거 공산주의 국가들도 이원집정제를 벗어나 의원내각제로 갔다.


우리의 경우 이원집정제 권력구조를 가지게 되면 통일과 외교를 대통령이 맡고 내각을 총리가 맡게 하겠다는 의도인데 21세기 세계화 시대에 내치와 외치를 구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1차원적인 단세포적인 사고이다. 아울러 통일은 국내 정치·경제·행정과 뗄 수 없이 밀접한 관계를 가진 사안인데 이를 구분해서 집행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개헌을 주장하는 정치인들의 사고는 허망하기까지 하다.

사실 최근 불거진 개헌론의 핵심은 국회의원들 특히 중진 여야의원들이 국회 권력을 넘어 행정부 장관으로 행정부 권력을 행사해보고 싶다는 의도의 표현이라는데 있다. 이렇게 무소불위의 국회의원들이 내각까지 장악하여 장관이 되어 행정을 맡게 되는 경우 대한민국의 장래는 그리스와 같은 포퓰리즘의 극치, 정치에 의한 행정의 장악으로 ‘되는 것도 안 되는 것도 없이 흘려보낸 잃어버린 20년’으로 치달아 쇠락한 일본처럼 암울하기 그지없다.

2. 민주주의의 타락은 고대에서부터 있었다

우리가 절대선으로 여기며 칭송해 마지않는 민주주의는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이미 타락을 경험하고 있었다. 플라톤은 󰡔국가(The Republic)󰡕 제8권에서 통치 형태(constitution)를 명예 지배정(Timarchy), 과두정(Oligarchy), 민주정(Democracy), 참주정(Tyranny)으로 나누었다.

그러면서 플라톤은 아테네 민주 정치가 보여준 부자와 빈자의 정치적 갈등과 당파 싸움 그리고 그러한 갈등을 해결할 수 없는 내재적 한계를 개탄했다. 그러한 정치적 갈등의 극복을 위해서는 모든 갈등의 원인과 해결책을 알고 공동체를 위해 올바른 결정을 내려줄 철인통치자(Philosopher King)가 필요했던 것이다. 물론 철인통치의 대척점에는 민주정이 위치해 있다.

현대 정치사상가들에 의해 가장 이상적인 모델로 꼽히는 아테네 직접민주주의는 말기에 이르러 격렬한 당파 싸움과 사회 계급간의 갈등 및 공동체에 만연한 불신과 적개심에 기반한 정치적 불안정에 시달렸으며, 결국 공동체에의 헌신과 정치적 절제라는 민주시민의 덕성이 사라져 버리고, 결국 로마의 정복과 함께 기원전 322년에 역사에서 사라져 버리게 되었다.

우리의 민주주의에서 국회권력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경제적 자유를 제한하는 입법에 전력을 투구하는 현실에서 대한민국의 미래는 암울하다. 이명박대통령의 7% 경제성장 목표가 3% 성장에 그치고, 박근혜대통령이 아무리 열심히 창조경제를 외치고, 경제혁신 3개년 계획을 발표하고, 규제개혁 끝장 토론을 하고, 내년에 20조의 추가적인 예산을 투입해도 3% 성장률 달성도 힘들게 된 이유는 1987년 민주화 이후 정치적 자유는 확대되었지만 경제적 자유는 도리어 제약을 받게 되어 경제성장의 모멘텀이 끊겼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치적 평등의식과 함께 경제적 평등의식도 확장되었기 때문이다. 정치적 참여의 확대와 경제적 평등의 확대가 동시에 진행되고, 대기업에 대한 규제가 일상화되었고, 복지 요구는 봇물을 이루었다. 모두 1987년 민주화로 만들어진 평등민주주의, 포퓰리즘 민주주의 때문이다.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민주주의는 정치적 자유와 경제적 자유를 보장하는 ‘자유’민주주의였음을 깨닫게 된다.

지금 대한민국 국회를 중심으로 포퓰리즘 민주주의 정치는 경제적 격차의 완화를 표면에 내세우며 부자와 빈자의 대결로 몰고 가고 있다. 특히 대기업-중소기업 동반성장, 경제민주화, 소득 불평등 해소, 지방을 살리기 위한 수도권 집중 완화 등 셀 수 없는 평등화 정책들이 경제적 자유를 옥죄는 법들로 대량으로 만들어지고 있다.

   
▲ 자유경제원에서 개최한 제10차 정치실패 토론회 '무소불위의 국회권력, 왜 그럴까?' 토론회 모습.
▲ 자유경제원에서 개최한 제10차 정치실패 토론회 '무소불위의 국회권력, 왜 그럴까?' 토론회 모습.
그리고 경제적 자유를 제한하는 상황은 갈수록 심해지고 있는 현실이다, 정치적 자유만 있고 경제적 자유가 없으니 당연히 경제는 곤두박질이고, 정치는 책임 공방, (입법) 교착, 그리고 주도권 대결로 지새우고 있다. 공동체에의 헌신과 정치적 절제가 사라진 멸망 직전의 그리스 민주주의의 내부 분열과 적개심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그리스의 복지 포퓰리즘이든, 미국의 오바마 캐어든, 한국의 보편적 복지의 시행이든 결국 문제는 경제적 지속 가능성이다. 경제적으로 지속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은 다수에 근거한 복지 포퓰리즘은 그 목적인 ‘복지국가’가 사상누각(砂上樓閣)임을 알려주게 될 것이다. 복지의 기반인 ‘성장이 없는 복지’(welfare without growth)는 빈곤의 나눔이자 궁극적으로는 ‘빈곤으로의 길’이 될 뿐이다.

이러한 약탈적 성격의 민주주의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 즉 아리스토텔레스가 고민했던 폭도들의 통치로서의 민주주의, 즉 ‘폭도정치’(mob rule)가 될 것이다. 즉, 국가적 과제에 대한 해결책을 찾지 못한다면 그 ‘출구 없음’(No Exit)이 민주주의의 작동 방식을 격한 빈자와 부자의 집단 간 대결로 이끌 것이다.

결론적으로 민주주의에서 참여의 증가가 현대 대의민주주의 정치의 모든 병폐를 해결해주는 만병통치약으로 생각하는 참여민주주의자, 민주주의를 시장 경제에 도입하여 경쟁을 죽이고 평등을 달성하려는 경제민주화주의자, 경제적 기반은 무시하고 복지의 확대만을 주장하는 복지주의자(사회민주주의)들은 보비오(Norberto Bobbio)가 언급하는 ‘상상 속의 민주주의(imaginary democracy)’를 말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3. 무소불위 국회권력에 대한 해답은 무엇인가?

여러 차례 정치 개혁안으로 나온 것으로 국회의원의 정원을 줄이는 것이 첫째이다. 그 숫자는 민간위원으로 구성된 위원회에서 국민의 광범위한 여론 조사와 해외 사례 조사를 통하여 결정해야 할 것이다. 학자마다 의견이 다르겠지만 200인을 넘지 않고 비례대표로 100명을 배정하면 지역이기주의와 포퓰리즘에 근거한 국회입법은 상당히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

둘째는 지역구 국회의원을 줄여 지역구 이익에 포획되거나 포퓰리즘적 사고를 국회에서 걷어내는 일이다. 즉, 국회의원의 무소불위의 권력 행사를 막기 위하여 그리고 정치실패와 정부실패를 막기 위해서는 자유 시장의 의미를 아는 이들과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정치권에 들어가고 정치인으로 성공할 수 있도록 제도적 장치를 바꾸어야 한다.

그렇다면 지난 10월 30일 헌법재판소가 국회의원 선거구 간 인구 차를 최대 3배까지 허용하는 현행 공직선거법 조항에 대하여 헌법 불합치 판결을 내렸고 정치권이 선거구제 개편을 할 것이고 정치권이 지각변동을 맞을 것인데 이것이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제까지는 선거구획정위원회의 방안에 대해 국회가 비례대표 국회의원의 수를 줄이고 지역구 국회의원의 수를 늘리는 왜곡을 가하여 299명, 그리고 300명까지 늘렸다. 하지만 이번에 언론과 지식인들의 압력으로 지역구 국회의원의 수를 줄이고 비례대표를 늘리되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진출할 수 있는 방향으로의 정치개혁을 이끌어내야 한다.

그 동안 비례대표가 시민단체 운동가들의 정치권 진출의 교두보로 사용되어 왔고 지금도 사용되고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경제전문가 등 전문인들의 국회 입성의 길로도 이용되고 있으므로 시장경제 전문인들, 자유주의 운동가들이 정치에 진출할 수 있는 기회로 사용될 수 있도록 제도를 만들어 가야할 것이다. 적어도 지역구 포퓰리즘적 이익에 매몰되지 않은 정치인들의 숫자를 늘리는 개혁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셋째는 독립된 민간위원회에서 국회의원의 특권에 대하여 전반적으로 검토하고 합당하지 않은 수많은 특권들을 폐지하도록 하는 것이다. 나아가 언론, 시민, 민간기구, 시민단체 등 외부에서 국회의원을 감시하도록 제도화 하는 것이다. 깨어 있는 시민이라야 바른 정치, 바른 정치인을 만들 수 있음은 불변의 진리이다.

(이 글은 자유경제원에서 개최한 제10차 정치실패 토론회 '무소불위의 국회권력, 왜 그럴까?'에서 김인영 한림대학교 정치행정학부 교수가 발표한 토론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