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머니 사정따라 선호 노래 달라…K-팝 한류 90년대 고성장 영향
자유경제원은 12일 자유경제원 회의실에서 경제진화연구회와 공동주최로 '청년 자유주의' 토론회를 개최했다. 토론회의 주제는 '청년, 자유주의를 말하다'로 1.법 언론 역사 2.정치 안보 통일 3.경제 등 세션 별로 이루어졌다. 발제자, 토론자들이 각기 분야별로 생각하는 자유주의에 대한 논의와 제언이 이어졌다. 아래 글은 ‘법 언론 역사’ 세션에서 발표한 조성일 경제진화연구회 청년운영위원의 발제문 전문이다.

 

   
▲ 조성일 경제진화연구회 청년운영위원

오래된 곡이 최신곡 보다 인기있었던 1980년대

1981년 흥미로운 기사가 실렸다. MBC가 창사 20주년을 기념사업중 하나로 실시한 한국가요전국대조사사업에서 나온 결과다. 1만1365명을 대상으로 한국사람이 가장 좋아하는 가요 100선을 꼽았는데 제작연대에서 가장 가까운 70년대 곡은 12곡에 불과한 반면 60년대 27곡, 50년대 23곡 40년대 15곡 30년대 13곡으로 반세기가 지난 곡이 현시대의 곡보다 애창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 1981년 한국사람이 가장 좋아하는 가요 100선 

요즘으로 치자면 1950년대의 곡이 2000년대 곡보다 더 인기있는 상황이다. 연령별 선호곡 역시 고개를 갸웃거리게 한다.

   
▲ 1981년 연령별 선호곡 조사 결과 

30대가 60대 이상의 노년층과 같은 노래를 즐겨 부르고 있다. 5곡 모두 20년대 30년대에 걸처 발표된 곡이다. 60대 이상이야 당연하도 30대가 이런 노래를 애창한다는 점, 10대 20대가 선별한 노래는 모두 80년대 곡이었다는 점을 볼 때 70년대가 한국가요의 공백기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졌는지는 가요사를 보면 알 수 있다.

음반시장은 1910년대 처음으로 형성되었다. 처음에는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한 외국곡, 찬송가 등이 팔리다가 민요, 유행가 등으로 시장이 확대된다. 본격적으로 한국의 유행가가 발표된 것은 1925년에 발표된 ‘리풍진 세월-박채선, 이류색’을 기점으로 본다. 찬송가 ‘우리가 집으로 돌아올 때’를 개사하여 발표했는데 단조로운 음, 전통적인 잡가민요 형태의 발성으로 지금 들어보면 가요의 수준에 이르지 못한다.

1920년대 기생 및 명창들을 중심으로 많은 민요음반이 발표된다. 이는 근대화가 시대정신이었고 서구문물에 대한 로망이 있던 민중에게 파고들기에는 많이 부족했다. 홍난파는 조선의 음악을 가리켜 “한국전통음악은 화성이 없어서 미개한 음악” 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현대가요가 등장하는데는 길지 않았다. 한일합방 이후 일본식 음악 교육 즉 서양식 음악교육을 받은 세대들이 시장에 쏟아지면서 ‘사의 찬미’라는 걸작이 발표된다. 극작가 김우진이 작사하고 성악가였던 윤심덕이 발표한 이 노래는 굉장한 센세이션을 일으킨다. 민요창법에서 벗어난 벨칸토 창법부터 파격적인 의상과 자유연애 그야말로 당대 대세였던 신여성의 모습이었다.

   
▲ 김우진 극작가가 작사하고 윤심덕 성악가가 발표한 노래, ‘사의 찬미’. 당시의 소개 기사와 영화를 소개한 방송의 모습이다. /사진=방송캡처 

윤심덕 이후 채규엽, 안기영 등 가요의 모습을 갖춘 음반들이 속속 발표되면서 유행가의 르네상스 시대가 열리게 된다. 하지만 민요가락에 익숙한 조선인들에게 유행가가 정착되기에는 걸림돌이 많았다. 민중 대부분의 삶이 그런 것들을 학습하고 받아들일 만한 여유가 없었다. 유성기는 서민이 구입하기에는 너무 비쌌고, 그나마 있는 시장도 임방울과 같은 명창들의 민요가 건재했다.

그래서 유행가는 일본으로부터 체계적으로 음악교육을 받을 수 있는 계층, 인텔리계층의 자녀들, 깨어있는 사람들의 문화가 된다. 당시 음악교육을 받는 다는 것 자체가 엘리트 계층이었고 이들은 소수지만 구매력은 뛰어났다.

트로트의 시작, 역사

이들은 자신들이 배운 음악을 이용해 대중가요 시장을 열게 된다. 이때 나온 음악이 트로트다. 민요역시 화성을 추가한 신민요로 발전한다. 전통민요의 피치, 요성, 관습적 이디엄 등이 약화되고 5음음계의 평균율화된 음정 구조만 담지한다. 트로트 역시 민요에 익숙한 기존 세대들의 거부감을 줄이기 위해 민요와 유사한 3박자 리듬을 차용한다.

신민요와 트로트의 각축전은 30년대 초반까지 지속된다. 음악교육이 확대되고 시장에서는 더 세련되고 선진화된 트로트를 팔게 된다. 이 시기부터 트로트도 민요풍의 3박자리듬을 본격적인 2/4박자의 곡들을 쏟아낸다. 바야흐로 50년간 지속될 트로트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이 시기에 트로트의 주축은 1910년~1920년대 출생이다.

여기서 확인하고 넘어가자. 시장은 트로트로 판도가 넘어갔지만 밑바닥 정서는 여전히 민요가 강했던 것 같다. 1935년 월간지 삼천리가 실시한 인기가수 투표에서 남자가수가 1위 채규엽, 2위 김용환, 3위 고복수, 4위 강홍식, 5위 최남용 등의 순서였고, 여자가수는 1위 왕수복, 2위 선우일선, 3위 이난영, 4위 전옥, 5위 김복희 의 순서다.

시장에서는 트로트가 강세였지만 민중들은 여전히 신민요를 더 선호하고 있음이 나온다. 그러나 30년대 후반부터 트로트의 강세가 뚜렸해지더니 40년대 들어서는 거의 자취를 감추게 된다. 계속된 일본식음악교육은 신세대를 중심으로 트로트에 대한 선호도를 높여나갔고 거스를 수 없는 대세였다.

사실 신민요의 등장 자체가 통속민요에서 유행가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나온 소리꾼들의 안간힘이었을 뿐이다. 동일 잡지 삼천리에서 한 평론가의 신민요에 대한 평이다. “유행가도 아니고 민요도 아닌 중간식 비빔밥” 이 말처럼 애시당초 오래가기 어려운 장르였다. 어쨌든 이렇게 트로트가 시장을 평정한지 얼마되지 않아 해방이 닥치게 되고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경제는 순식간에 붕괴된다.

   
▲ 잡지 삼천리의 모습 

경제의 붕괴는 트로트음악의 수명연장에 결정적 기여를 하게 된다. 해방은 일본식 음악교육의 중지를 뜻했다. 그리고 뒤이어 미국식교육이 자리를 대체한다. 그러나 일본의 그것처럼 미국식POP이 확산되지는 못했다. 추락한 경제는 새로운 음악을 받아들일 여유를 빼앗았고, 실제로 돈을 버는 가장의 경제력이 절대적이 됐다. 30년대 40년대 트로트를 즐겼던 젊은 세대는 50년대에는 가장이 되었고 경제생활의 중추가 됐다. 음악시장은 이들의 몫이었다. 30~40년대 젊은이의 정서를 노래하는 가사는 50~60년대에는 장년층의 정서를 말하고 있다.

50년대부터 미국식 음악교육을 받고 다량의 헐리우드영화를 소비하게 된 10대들은 가장에게서 듣는 트로트음악보다 미국식POP 모두를 받아들이기 쉬웠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경제력이 없었고 시장은 이들을 위한 음악을 만들 여유가 없었다. 이들은 대체품으로 국내가요보다 미국POP음악을 듣기 시작했다. 한국에서 흔히 팝송이라고 불리는 음악들은 이 시기에 대거 수입됐다.

위에서 말한 1910~1920년대 트로트의 산파역할을 했던 세대들이 경제전선에서 퇴장하기 시작한 60년대 후반에 변화의 조짐이 일어난다. 이들의 퇴장은 신세대들이 경제력을 갖추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더구나 값싼 LP가 보급되면서 대중가요는 서민의 영역까지 내려오게 된다. 집집마다 전축이 보급되고 누구나 판 한 장만 사면 음악을 즐길 수 있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국민소득도 30년대 수준을 회복하면서 음반시장도 다시 활기를 띈다.

펄시스터즈의 커피한잔과 같은 비트로트곡이 히트하기 시작한다. 이 시기 급성장하는 경제는 신세대들의 음악활동에 날개를 달아줬다. 제작이 활발해지면서 기존 음악을 밀어낼 동력을 갖추게 된다. 경제인구 뿐만 아니라 비경제인구도 부모의 용돈 등으로 음악을 소비할 수 있는 시대가 됐다. 더 이상 신세대들은 부모세대의 음악을 따라 듣지 않아도 자신들에게 맞는 음악을 주체적으로 들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마치 30년대 신세대가 트로트를 위시해 구세대들의 음악인 민요를 몰아낸 것과 같은 르네상스시대다.

즉 192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의 가요는 한 세대가 향유하고 공유한 문화였다. 머리의 조사가 진행된 1981년 기준으로 60대 노년층부터 30대 청년층까지 같은 음악을 즐기고 20대부터 급격히 변화된 것은 이런 경제적 요인이 크다.

1981년 발표한 대규모 여론조사의 연령별 가요 선호도에서 10대 20대는 조용필의 <고추잠자리>를 선호한 반면 30대 40대 50대 모두 1930년대 노래인 <눈물젖은 두만강> <나그네 설움> <목포의 눈물>이 1~3위에 오른 것은 한국가요가 얼마나 오랜 시간동안 그 시절 인텔리들이 만든 음악시장에서 정체했는지를 보여준다.

   
▲ 가수 서태지·아이유. 1990년대 서태지와 아이들의 등장 이후 가요 음반시장은 환골탈태했다. 2000년대 2010년대로 접어들면서 한국가요는 K POP이라는 이름으로 글로벌 시장에 진출하기도 한다. /사진=서태지컴퍼니,로엔트리 제공 

이전과는 다른 1970년대 음악, 그리고 1990년대

앞선 시대의 음악과는 달리 1970년대 음악은 안타깝게도 그다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한다. 신세대들의 등장에 위기감을 느낀 정부는 가요시장에 직접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한다.

수많은 곡들을 금지곡으로 지정하고 모든 음반에는 건전가요를 한곡씩 넣게 했다. 방송과 라디오를 총동원해 30~40년대 가요를 집중적으로 다시 틀어댔다. 김정구의 ‘눈물젖은 두만강’은 1938년에 발표되어 1970년에 히트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그야말로 하루 종일 틀었다. 머리의 조사에서 30대가 태어나기도 전의 노래들을 베스트5로 꼽는 상황은 이렇게 벌어졌다.

그러나 90년대 국민소득이 5000불이 넘으면서 음반시장은 아이들의 용돈이 장악한다. 10대들이 지지하는 서태지와 아이들이 최초로 음반시장을 석권한다. 음반시장은 이들 위주로 막대한 수익을 안겨주게 되고 돈이 된다는 소식에 더 많은 뮤지션이 뛰어들며 양적팽창도 이룬시기다.

음반은 10대들의 유일한 놀이터였다. 컴퓨터도, 스마트폰도 없던 시절 유일한 낙이었다. 고성장의 시대는 음반시장이 팽창과 함께 질적 수준도 향상시킬 수 있었다. 오늘날 KPOP가 세계시장에서 통할 수 있게 된 것은 1990년대 고성장 시대의 뮤지션들의 역할이 컸다. /조성일 경제진화연구회 청년운영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