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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우석 문화평론가 |
영화 ‘국제시장’이 개봉 6주차인 지난 주말 관객수 1200만 명을 돌파했다. 막판 뒷심을 발휘하는 중인 이 영화는 ‘태극기 휘날리며’(1174만 명)를 꺾고 역대 박스오피스 순위 8위에 올랐는데, 남은 건 우리가 이 영화에 대한 기억을 어떻게 갈무리하느냐의 문제다.
26일 자유경제원 주최 토론회‘국제시장! 우리도 할 말 있습니다’는 그래서 의미 있는데, 일부 좌파는 여전히 볼멘 목소리다. 한마디로 “왜 이 영화가 그 시대의 정치적 질곡을 다루지 않았느냐?”는 시선이다. 인권 탄압, 계층갈등 등 좌편향 문화계의 단골 아이템을 왜 누락시켰냐는 투정이다.
단언컨대 개발연대를 포함한 현대사의 전체를 지난 수 십년 왜곡시켜온 게 좌파다. 그러한 비정상을 ‘국제시장’이 바로 잡았을 뿐이다. 이런 영화에 대한 비판 자체가 가소로운데, 사실 그 시절은 단군 이래 처음으로 역사의 수레바퀴가 굉음을 내며 돌아가던 국면이었다. 전면적 사회변화가 일어나던 그때 헌법상의 기본권 일부가 제약 당하는 아픔이 있었던 게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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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국제시장'. |
100년 가요사에 처음 등장한 도시 예찬의 노래들
역사의 전진에 희생과 그늘이 없는 경우란 없으며, 기본권 제약도 그런 경우의 하나다. 하지만 희생과 그늘만 강조하는 건 본(本)과 말(末)을 뒤집으려는 어리석은 짓인데, 그동안은 그게 주류를 이뤘다. 그걸 필자는 학문이라는 이름의 허위의식, 문화란 이름의 사기(詐欺)라고 감히 지적한다.
그 시절 평범한 대중은 무얼 생각하며 어떻게 살았을까? 당시 덕수를 포함한 우리의 꿈은 무엇이었고, 그게 시대정신과 어떻게 만났을까? 그걸 검증해보기 위해 생활사-일상사 추적이 요긴한데, 역시 대중가요가 의미의 보물창고다. 때문에 이 글은 보름 전의 칼럼 ‘너와 나 우리는 모두 흥남부두 금순이다’의 후속이다.
그 글이 영화 ‘국제시장’의 도입부인 흥남부두에 집중했다면, 이번엔 그 이후 1960~70년대 사회변화를 살펴볼 차례다. 가요사에서 6070시대 한국의 대중들은 도시라는 활력에 찬 공간을 음미하기 시작했고, 그 안에서의 삶을 노래하기 시작했다. 그건 가요사에서 처음 있었던, 실로 극적인 변화다.
“서울의 아가씨는 멋쟁이 아가씨/서울의 아가씨는 맘 좋고 슬기로워/서울의 아가씨는 명랑한 아가씨/남산에 꽃이 피면 라라라라 라라라라.”이시스터즈가 부른 ‘서울의 아가씨’(1962년)는 그렇게 시작하는데, 벌써 분위기가 다르지 않은가? 패티김의 노래 ‘서울의 찬가’(1969년)도 그렇다.
“종이 울리네 꽃이 피네/ 새들의 노래 웃는 그 얼굴/ 그리워라 내 사랑아 내 곁을 떠나지 마오/ 처음 만나서 사랑을 맺은 정다운 거리 마음의 거리…”
그렇다. 광복의 기쁨 속에 가수 현인이 일찌감치 예고했던‘럭키 서울’이 우리 현실이 됐다. 그 가요는“서울의 거리는 태양의 거리”요, “건설의 거리”라서 “타이프 소리로 해가 저무는 빌딩가에도 웃음이 솟”는다고 했는데, 거의 말도 안 되던 그런 소망이 우리 눈앞에서 실현되기 시작했다.
일제하 설움과 탄식의 퇴행적 정서도 그때 졸업했다
1960~70년대는 이토록 명쾌하다. 한강의 기적을 낳은 그 시절은 경제 부문만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걸 바꿨던 마법의 시간이었다. 개발연대의 변화란 일제하에서 보편적이던 설움과 탄식의 퇴행적 정서로부터의 졸업을 뜻한다.
일제시대의 최고 가수 남인수의 히트곡 ‘애수의 소야곡’(1938년) 첫 소설을 떠올려보라.“운다고 옛 사랑이 돌아오리오마는….”‘황성옛터’(1928년)의 분위기도 그렇지만, 고복수‘타향살이’(1934년) 역시 고향 떠난 자의 초라한 부평초 신세를 거듭 한탄했다.
대부분이 그랬다. 백년설의‘번지없는 주막’(1940년)에 나오는“문패도 번지수도 없는 주막에/궂은 비 내리던”정서란 얼마나 칙칙한가. 그렇게 정처없는 나그네로 떠돌던 한국인은 도회지에 뿌리를 내린 뒤 직장을 잡아 버젓하게 사는 집단적 경험을 했는데, 그건 3공화국 출범 이후의 변화다.
또 있다. 1960년대 가요사는‘도시의 등장’과 함께 ‘한국 남성의 부활’이 또 다른 특징이다. 이 역시 전무후무했던 변화인데, 즉‘불효자는 웁니다’식의 정서를 깔끔히 걷어냈다. 이미 그들은 활력있는 생활인으로 변신, ‘국제시장’주인공 덕수처럼 가족의 부양에 책임지는 모습을 보였다.
그 징후의 첫 반영이 1961년 한명숙의‘노란 샤스의 사나이’다. 그녀가 매혹됐던 남자란 서구와 미국의 감수성을 가진 노란 셔츠 차림의 과묵한 사내, 즉 “말없는 그 사나이”였다. 김상희가 불렀던 ‘대머리 총각’(1966년)만해도 그랬다. 그가 연모했던 사람은 머리가 벗겨진 단벌 신사이지만, 여덟 시 통근길에 만나는 버젓한 직장인이 아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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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국제시장'. |
생활인-직장인으로 거듭난‘한국 남성의 첫 부활’
불세출의 가수 배호도 그러했다. 히트곡 ‘안개 낀 장충단공원’ ‘돌아가는 삼각지’에서 보듯 그의 노래의 주무대는 도시다. 장충단공원, 삼각지 등의 어휘 자체가 가요사에서 보기 드문 종류의 것인데, 유심히 들어보라.
통속적인 대중가요의 습관대로 배호도 탄식과 슬픔을 노래했지만, 고복수 류의 애조(哀調)따위는 찾아볼 수 없다. 그걸 떨쳐내고 선 굵은 남자의 묵직함을 등장시켰다. 대중이 열광했던 ‘공포의 바이브레이션’ 톤 자체가 1950년대 이전에는 꿈을 꿀 수도 없었던 새로운 남성성을 상징한다.
노래 스타일도 트로트에서 서구식 팝으로 변화했는데, 이런 모든 변화가 진정한 극일(克日)의 출발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유감스럽다. 문화사 차원의 이런 코페르니쿠스적 변화가 아직 학계에서 제대로 언급되고 연구된 바 없다. 일상사나 문화사의 혁명적 변화가 해독이 안 된 채 ‘의미의 나대지(裸垈地)’로 남아있을 뿐이다.
영화 ‘국제시장’이 중요한 건 대중 차원에서 현대사 바로보기의 불씨를 만들었다는 점인데, 그래서 고맙고 대견하다. 이참에 덕담 하나. 기회에 역대 흥행순위에서 선두권 추격도 기대한다. 랭킹 5위인 ‘변호인’은 가볍게 넘어설 것이고, 2~4위인 ‘도둑들’, ‘7번 방의 선물’, ‘광해, 왕이 된 남자’(모두 1200만 명 대)도 넘본다. 그렇게 된다면 1위 ‘명량’(1760만 명) 옆에 ‘국제시장’이 있는 셈인데, 최상위권 모두가 애국영화로 채워지는 셈일까? /조우석 미디어펜 논설위원,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