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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6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자유경제원 회의실에서 열린 자유경제원 토론회 '국제시장, 우리도 할 말 있습니다'에서 정재청 자유경제원 연구원이 발제를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
지난 1월 13일, 윤제균 감독의 영화 '국제시장'이 국내 개봉 영화 중 14번째로 천만 관객을 돌파했다. 윤제균 감독은 자신의 부모님과 부모님 세대에 대한 헌사로서 이 영화를 제작하였다고 명확히 밝혔다.
이 영화는 6.25 전쟁 당시의 흥남부두 철수 장면을 시작으로 ‘덕수’라는 한 아이가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일생을 살아가면서 고난과 역경을 헤쳐 나가고 묵묵히 자신의 아버지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과정과 함께 진한 가족애와 개인들의 고단한 삶을 다뤘다. 특히 산업화 시대를 다뤘기 때문에 중장년층들을 중심으로 전 세대에 걸쳐 많은 공감을 얻었다.
그러나 이 영화가 과연 우파 영화인지 그리고 단순히 정치적으로만 해석할 수 있는 영화인지는 의문이 들 수 있다. 오히려 정치색을 최대한 빼려고 노력한 감독의 의지가 많이 엿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영화가 우파 영화이든 아니든 자유주의 영화이든 아니든지 간에 우리는 얼마든지 이 영화를 자유주의적 관점으로 또는 우파적 관점으로 해석하고 논할 수 있다.
전쟁이 가져오는 해로운 결과, 인간 생명의 희생
영화 '국제시장'은 전쟁의 한 복판에서 시작된다. 흥남부두 철수라는 생사의 기로에서 많은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서 몸부림친다. 대규모 인파를 표현한 컴퓨터그래픽과 배우들의 연기는 스펙타클을 극대화하였지만 그만큼 비극적이다.
말 그대로의 생존경쟁에서 살아남지 못한 사람들의 시체와 인파 속에서 부모들을 잃고 우는 아이들의 모습, 겨우 배에 올라탔지만 등에 업은 동생을 잃어버린 ‘덕수’의 모습은 전쟁의 참혹함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전쟁이 해로운 것은 생명을 포함한 거의 모든 것을 앗아가기 때문이며 미제스가 말한 것처럼 자유주의자들이 전쟁을 혐오하는 이유는 인본주의자들과는 다르다.
전쟁은 승자에게조차도 해악임을 믿으며 평화가 전쟁보다 항상 더 낫다고 믿는다는 것이다. 물론 자유주의자들은 평화를 사랑하는 나라가 호전적인 적에게서 침공을 받으면 그들의 자유와 생명을 위하여 기꺼이 싸울 것이다.
‘덕수’라는 한 개인과 그 가족의 이야기
마거릿 대처는 한 때 ‘사회는 없고 개인과 가족만이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물론 이런 말은 한 것은 그에 대한 맥락이 따로 존재하지만 자유주의자들이 개인과 가족을 중시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 '국제시장'은 많은 측면에서 사회적 현상보다는 ‘덕수’라는 한 개인의 삶에 주목했다. 덕수가 살았던 시대적 배경이 주로 1950년대∼1980년대까지의 6.25전쟁과 산업화시대를 다루지만 그 것은 하나의 배경이고 영화는 그 배경보다는 덕수의 가족애와 근면성실함, 희생정신 등에 더 주목하고 있다.
가수 남진과 나훈아,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 패션디자이너 앙드레 김 등은 그저 코믹함과 함께 시대배경을 설명하는 까메오에 불과하다. 더 중요하게 다뤄지는 것은 어려운 시절, 자신의 안위보다는 가족의 행복을 바랬던 가장의 무거운 어깨이다.
경제성장 과정에서의 험난한 여정
이 영화가 우파 영화로 해석될 수 있는 부분은 한국의 경제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던 파독광부와 간호사,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병사와 현지 사업을 통해 외화를 벌어들였던 기업의 직원들의 모습을 그렸다는 면에서다.
이런 부분은 좌파들이 애써 외면하려고 노력하는 역사적 사건들이다. 바로 이 사건들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박정희 대통령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좌파들에게 이런 사실들은 최대한 폄하해야 하는 일들이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등장하지 않는다. 그런 측면에서 감독은 정치적 해석을 최대한 피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 의도는 실패한 것 같다. 단지 그 시대를 다뤘고 그 시대에 대해 비판적인 해석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영화비평가들에게 맹렬한 비판세례를 받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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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국제시장' |
세대 간의 소통의 부재를 꼬집은 감독
감독은 이 영화를 제작하게 된 계기로 대학 시절 돌아가셨던 아버지에 대한 미안함과 아버지 세대에 대한 고마움을 표현하고 싶어서였다고 밝혔다. 또한 이 영화의 여러 장면에서 ‘덕수’와 그 자식들 간에 소통이 원활히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장면들이 여러 번 나온다.
‘아버지하고는 말이 안 통한다’고 한탄하는 아들의 대사나 가족여행을 간다면서 부모들에게 아이만 맡기고 가는 자식들의 모습은 부모세대들이 느끼는 자녀들에 대한 서운함이 그대로 묘사되고 있다. 이런 광경은 사실 주변에서도 볼 수 있다. 또한 세대 간 소통의 부재는 ‘덕수’가 동남아인에게 행패를 부리는 고등학생들과 싸우는 장면에서 더 확장된다.
가난한 나라에서 태어나고 자랐던 ‘덕수’와는 달리 풍족한 환경에서 자란 고등학생들은 자신들의 부모, 조부모 세대들 또한 가난한 나라의 국민이었음을 잘 알지 못한다. 그리고 자식들과 부모세대의 소통의 부재는 사실 후반부 장면에서 극대화되고 있다.
아버지와의 약속을 생각하며 힘들었던 삶에 대해 고백하며 흐느끼는 덕수의 모습과 뛰어노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즐겁게 웃고 떠드는 자식들의 모습을 서로 대비시킨 장면은 오늘의 풍요와 즐거움이 부모세대들의 눈물바다로 만들어진 것임을 관객들이 알게 한다.
문화, 뭥미?
영화 '국제시장'의 열풍은 사실 영화 한 편이 온 사회의 여론을 이끌어갈 정도로 이 사회에서 영화 더 넓게는 대중문화의 영향력이라는 것이 얼마나 강해졌는지를 실감할 수 있게 한다. 그러면 대중문화 더 넓게는 문화란 어떤 의미이고 어떤 식으로 발전해온지 역사적 맥락을 알아보아야 할 것 같다.
원래 문화라는 용어는 라틴어의 cultura에서 파생되었다. 본래의 뜻은 ‘경작’이나 ‘재배’였는데, 나중에는 ‘교양이나 예술’ 등의 뜻을 가지게 되었다. 문화의 어원이 농업과 연관이 있다는 점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그러나 이런 사실은 그다지 새로운 것도 아니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회화 작품 가운데 가장 오래된 구석기 시대 동굴 벽화는 프랑스 남부 도르도뉴에 있는 라스코 동굴 벽화이다.
1940년에 발견된 이 동굴에는 들소, 사슴, 말과 같은 동물이 다양한 색체로 그려져 있다. 그 시대의 사람들이 대상에 대해 깊이 관찰한 목적은 다름 아닌 경제활동을 위해서였다. 구석기 사회에서는 수렵이 주된 경제활동이었기 때문에 예술에도 그러한 경제생활이 정확하게 반영된 것이다. 이렇듯 문화예술이라는 것은 경제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이다.
또한 문화는 정치나 사상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다. 하이에크는 '노예의 길'에서 현대문명의 개인주의적 기초로 르네상스 시대의 에라스무스와 몽테뉴, 로마 시대의 키케로와 타키투스, 고대 그리스의 페리클레스, 투키디데스로부터 기본적 개인주의를 물려받았다고 말하는데 사실 이들은 고대의 정치와 역사, 인문주의 또는 르네상스정신을 대표하는 인물들이기도 하다.
인간만의 특권, 문화
사실, 문화는 인간만이 향유하는 일종의 특권일 수 있다. 동물의 세계는 자연의 세계이다. 자연 상태에 놓여 있는 동물과 인간이 구분되는 지점은 바로 문화이다. 그렇기에 ‘문화’는 ‘자연(nature)’의 상대어이다.
이에 독일 마르부르크 신칸트학파의 문화철학자인 에른스트 카시러는 자연과학에 상대되는 개념으로서 인간 정신 내지 이 정신이 이룩한 산물을 탐구하려는 학문을 문화과학이라고 정의한바 있다. 이는 인문학과 사회과학을 포함하는 개념이지만 주로 인문학을 뜻한다.
문화는 인간이 자유를 실현하는 과정
문화는 인간이 자유를 실현하는 과정이라고 정의되기도 한다.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의 문화 해석은 ‘문화의 본질’을 정확하게 보여준다. 칸트는 성경에 나타난 천지창조와 인류의 출현과정을 통해 문화의 기원을 논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인간은 인간의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을 스스로 만들어내야 했고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신화, 종교, 예술, 과학, 언어, 규범, 기술 등이었다. 이런 모든 것이 바로 인간의 문화라는 것이다.
신의 관점에서 볼 때 선악과를 따먹은 것은 신의 명을 어긴 죄였지만, 인간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 스스로 내린 결정 즉 ‘인간의 자유의지의 실현’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칸트는 결론적으로 문화는 자연의 보호 상태로부터 자유의 상태로의 이행이라고 정의했던 것이다.
루소 vs 칸트
18세기의 계몽기의 한가운데에서 루소는 예술과 과학 즉 문화에 대해 반기를 든다. 문화가 인간의 물질적 욕구를 채워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만족할 수 없는 수천 가지의 욕망만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칸트는 루소가 전제하는 “행복주의”에 대한 철저한 거부로 답한다.
행복이 인간 노력의 본래 목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칸트에게 있어서 문화의 정당화는 행복과는 다른 가치척도에만 있을 수 있다. 루소의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외침은 인간을 인간 본래의 사명에서 멀어지게 할 것이다.
문화가 인간에게 약속해주는 것 그리고 문화가 인간에게 줄 수 있는 것은 궁극의 행복이 아니라 ‘행복할 만함’일 뿐이다. 문화의 목적은 이 세상에서 행복을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의 성취요, 진정한 자율의 성취이다. 이런 칸트의 역사 철학을 통해 자유주의자들은 자유주의 문화철학과 문화이론에 대한 시작점에 설 수 있다고 본다.
시장경제와 문화예술의 상호보완관계
루소는 하이에크가 '치명적 자만'에서 지적하는 것처럼 낭만주의와 구성적 합리주의 즉, 사회주의의 조상이다. 문명과 물질세계에 대한 반감 그리고 행복지상주의는 작금의 좌파들의 행태를 그대로 대변한다.
좌파들은 자신들의 사회주의가 유토피아를 만들어 줄 것처럼 선전한다. 그러나 인간 세상에서 완벽한 세상, 천국과 같은 세상은 없으며 철학자 칼 포퍼가 말한 것처럼 역사 속에서 지상천국을 만들려는 모든 시도는 항상 지상지옥을 만들고 말았다.
미제스는 '자유주의'에서 자유주의가 인류에게 행복과 안심입명을 약속하는 것은 아니며, 단지 외적 사물들로 충족될 수 있는 인간의 모든 욕구를 가능한 한 풍부하게 채워줄 것을 약속하고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인간의 내면적이며 정신적인 풍요는 밖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유주의 시장경제는 인간의 물질적, 외형적 전제조건들을 마련해주는 것만을 목표로 한다.
반면에 대중문화와 문학, 예술 등은 인간의 정신적 욕구를 일시적으로나마 일정수준만큼 채워줄 수 있다. 반면에 문화예술의 부흥과 문화산업의 발전에는 경제적 번영이 필요하다. 따라서 자유주의 시장경제와 문화예술 또는 대중문화는 서로 상호보완관계로서 기능할 수 있다고 본다.
문화예술계는 왜 좌파 세상인가?
영화 '국제시장'에 대한 영화비평가들의 비평을 듣고 많은 우파 성향의 학자들과 시민들은 불쾌감을 가지게 된다. 아니 꼭 우파가 아니더라도 일반 대중들에게 이 영화는 재미와 감동을 준 좋은 영화로 평가되며 청년들에게는 부모세대에 대한 이해도를 높일 수 있었던 계기가 되고 세대 간의 소통과 공감이 늘어나는 긍정적인 영향이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영화비평가들 대부분은 이 영화에 대해 거의 악담에 가까운 악평을 쏟아내고 있다. 이런 현상은 영화비평가 더 넓게는 대중문화 비평가들 대부분이 좌파 성향이라는 점과 연관이 있다. 또한 이것은 한국만의 현상도 아니다. 전 세계적으로 문화예술계는 좌파들의 온상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좌파적일까?
‘문화연구’와 ‘진지전’ 통해 사회주의 혁명을 실현하려던 지식인들
사실 문화비평 분야에서 좌파들이 두각을 나타내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뿌린 대로 거두리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좌파 지식인들은 20세기를 거치면서 치열하게 문화를 연구해왔다.
서유럽의 많은 마르크스주의 지식인들은 칼 마르크스가 ‘문화는 보다 중요한 경제적 토대에 종속되어 있는 산물이며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간주했던 반면에 그의 경제 결정론에 대한 반작용으로 오히려 문화적 해석을 마르크스주의 구조틀(framework)속에서 흡수하려고 시도하였다.
또한 마르크스가 불가피하게 도래한다고 했던 혁명이 서유럽에서는 일어나지 않은 이유를 설명하는 데 깊은 관심을 갖고 서유럽의 노동자들이 급진적 혁명에 동참하지 않은 것을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방해받은 것으로 해석하며 이데올로기의 중심적 역할에 관심을 가졌다.
또한 게오르그 루카치(1885∼1971)는 마르크스의 '1844년의 경제학-철학 수고'를 재발견하면서 문화적 마르크스주의 전통의 중요한 인물이 되었다.
이보다 약간 후에 안토니오 그람시(1891∼1937)는 문화와 정치를 사회주의 혁명 전략과 연결시키기에 매우 중요한 '옥중수고'라는 저작을 통해 ‘유기적 지식인(종교인, 언론인, 교육자, 철학자 등)’이 일상의 언어로 헤게모니적 믿음의 확산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며 자본주의 이데올로기가 가진 문화적, 정치적 헤게모니의 붕괴가 잠재적인 사회주의적 경향을 동원하고 혁명적 의식을 발흥시킬 수 있는 근본적 전제 조건이라고 주장했다.
유기적 지식인의 교체 혹은 사회주의적 유기적 지식인의 등장은 이러한 과제의 첫 단계이다. 그람시가 그린 정치적 삶의 모습은 진지전(war of position)으로서 문화적, 정치적 전선에서 좌파들이 헤게모니를 가지는 것이었다. 그리고 1960년대 신좌파 지식인들은 그람시의 이론을 통해 그들의 정치 문화적 활동을 정당화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예술의 도시 오스트리아 빈에서는 자유주의 경제학을 대표하는 오스트리아학파가 탄생했다면 경제도시이자 산업도시인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는 문화이론을 대표하는 프랑크푸르트학파가 탄생했다.
프랑크푸르트학파는 프랑크푸르트대학에 있던 1920년대 초에 설립된 ‘사회조사연구소’에서 활동했던 독일 지식인 집단을 일컫는데 이와 관련된 인물들은 아도르노, 벤야민, 프롬, 호르크하이며, 마르쿠제, 하버마스 등 매우 많다.
그리고 문화이론은 구조주의, 문화주의, 포스트모더니즘, 포스트구조주의 등으로 대표되는 프랑스의 알튀세르, 소쉬르, 레비스트로스, 바르트, 푸코, 데리다, 부르디외, 라캉, 보드리야르 등과 영국의 윌리엄스, 홀 등의 철학자, 사회학자, 언어학자들의 주도로 연구되어왔다.
따라서 사실상 문화이론은 약 100년 간 좌파들의 정치적 헤게모니 투쟁의 수단으로서 기능하였으며 문화연구자들이나 문화비평가들의 사상적 근간은 사회주의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는 경제학 분야에서 오스트리아학파, 프라이부르크학파, 시카고학파, 버지니아학파 등 많은 범자유주의 성향의 경제학자들이 경제사상과 경제이론을 주도했던 것과는 많이 다른 상황이다.
자유주의 문화연구의 필요성
지난 20세기는 사회주의자들이 문화이론과 그 연구를 주도해왔다. 그러나 이제 자유주의 철학과 경제학을 기반으로 한 문화이론이 필요하다. 특히 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의 문화경제학, 문화산업론 등에 대한 연구가 먼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공연예술 분야를 제외하고 문화산업 또는 엔터테인먼트 산업은 신고전학파 경제학의 경제이론으로 제대로 설명되지 않는 결과들이 많이 나오는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이는 소비자들의 주관적인 효용 또는 만족에 의해서 다른 어떤 산업 분야보다도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리고 선택과 선호가 결정되는 대중문화의 특성에 따른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자연 세계에서의 인과론에 기초한 실증주의는 인간의 행동을 설명하고 이해하는데 부적절하다고 주장하는 오스트리아학파, 특히 미제스의 선험주의 인간행동학은 문화산업의 경제이론의 연구방법론으로서 매우 적절할 것이다.
지금까지 문화연구 또는 인간의 감성, 감정에 대한 연구는 좌파 지식인들의 전유물처럼 여겨져 왔다. 그러나 이제 정치학 분야에 경제학 이론을 도입한 ‘공공선택이론’처럼 문화이론에 대한 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의 침투전략이 필요하다.
과감하게 사회주의 문화이론의 아성에 도전하여 좌파 대중문화 이론가들이 채우지 못하고 있는 자유주의 사상을 바탕으로 한 문화경제학과 문화산업론에 대한 연구에 박차를 가해야 할 것이다. 사실 애초부터 인간의 감성, 감정, 미학, 예술철학에 대한 연구 또한 사회주의자들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예를 들면 애덤 스미스는 '도덕감정론'에서 인간의 도덕 감정에 대해 탐구하며 연민과 동정심이 인간의 천성이며 이것은 타인의 고통을 보거나 또는 그것을 아주 생생하게 느낄 때 우리가 느끼는 종류의 감정이라며 ‘동감’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
스미스는 다른 사람에 대해 갖는 감정인 ‘동감’이 도덕감각의 기초가 된다고 생각했다. 인간에게 상호동감이야말로 인생에서 가장 큰 즐거움이라고 여긴 것이다.
또한 흔히 보수주의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정치사상가 에드먼드 버크는 '숭고와 미의 근원을 찾아서'라는 저작을 남긴 미학자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누구보다도 미학과 감성학 분야에서 큰 족적을 남긴 임마누엘 칸트는 '판단력비판'이라는 책을 통해 선험적 원리에 의한 취미 비판 또는 ‘감성학’이 가능함을 발견했다고 밝혔다. 칸트는 ‘예술 작품들은 자유에 의해 산출된다’고 하였다.
‘문화는 인간이 자유를 실현하는 과정’이라는 칸트의 말처럼 문화는 자유라는 물과 빛을 받고 창조의 향기를 내뿜는 꽃과 같다. 자유주의 철학이 문화이론에 접목되지 못할 이유가 전혀 없으며 오히려 자연스러운 것이다. 더군다나 문화경제학과 문화산업에 관한 이론은 시장경제를 부정하는 사회주의 이론가들에게 맡겨놓을 수 없는 과업이다.
따라서 영화 '국제시장'을 통해서 문화의 중요성을 깨달은 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은 문화이론에 대한 치열한 탐구에 들어가야 할 것이다. 특히 대중문화는 그 자체로 산업이며 부가가치의 원천이 될 수 있으므로 경제학자들이 개척해야할 새로운 분야로서 적격인 것이다. /정재청 자유경제원 연구원
(익 글은 자유경제원에서 주최한 '국제시장, 우리도 할 말 있습니다' 토론회에서 정재청 자유경제원 연구원의 주제 발표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