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은 자본주의를 통해 성공한 대표적인 국가다. 세계가 부러워하는 자랑스럽고 위대한 성취의 사례다. 우리가 여러 나라 사람들에게 당당하게 소개할 수 있는 성공의 역사다. 대한민국이 이러한 성공의 길을 걷는데 격려와 지지만 있지 않았다. 온갖 정치적 반대와 회의적 시각이 난무했다. 별의별 훼방으로 얼룩진 흔적도 상처로 남았다. 반대 논리는 내세웠던 사람들은 정치인, 지식인, 시민단체 등 다양하다. 우리 사회의 이념 간극은 크다. 선진국과 달리 아직도 반자본주의 투쟁에 힘쓰는 훼방꾼들이 권력을 쥐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잘못된 투쟁논리에서 벗어나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하에서 국민 삶을 향상시키는 상생의 길로 나가야 한다. 최승노 자유경제원 부원장은 이를 취지로 『경제발전의 훼방꾼들』이라는 책을 펴냈다. 미디어펜은 책의 내용 중 한국경제 발전의 중심 '수출주도형 산업화와 삼성전자'를 상, 하로 나누어 소개한다. |
수출주도형 산업화와 삼성전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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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승노 자유경제원 부원장 |
중화학공업 육성정책과 그 반대자들
1973년 1월 12일 당시 대통령이었던 박정희는 다음과 같은 기자회견을 했다.
“우리나라 공업은 이제 바야흐로 ‘중화학공업시대’에 들어갔습니다. 정부는 철강·조선·기계·석유화학 등 중화학공업 육성에 박차를 가해 이 분야의 제품수출 강화를 추진하고 있습니다.”
이 기자회견은 ‘중화학공업 육성정책’에 대한 대내외적 천명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 중화학공업 육성정책이 수립되고 실행되기 시작한 것은 이미 1960년대 중후반부터였다. 이를 위한 기반사업으로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했고, 포항제철의 설립도 추진되었던 것이다.
이 기자회견이 있던 1973년 무렵이면 이미 울산석유화학단지, 현대중공업 울산조선소(1973년), 구미전자공업단지(1973년) 등의 기반시설들이 준공 및 완공을 앞두고 있었다. 이런 추진 성과가 있었기에 박정희 대통령이 자신감을 갖고 기자회견을 할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사실 수출주도형 중화학공업정책은 박정희의 ‘할 수 있다’는 강력한 신념이 아니었다면 진행되기 어려운 일이었다. 대내외적으로 반대가 심했고, 사업의 미래를 낙관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나라의 수출주도형 중화학공업정책과 달리 수입대체형 공업화정책을 펼쳤던 외국 사례들이 부정적인 성과를 드러냈다. 당시 중화학공업정책을 추진하고 있던 남미국가들 대부분이 실패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에 대한 미국의 정책적 입장도 마찬가지였다. 개발도상국이 중화학공업정책을 추진하는 것은 무리이므로 경공업육성정책을 써 경공업을 발달시키고 수입대체산업을 일으키는 게 우선 되어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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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발연대 중화학공업, 한강의 기적을 이룩한 정주영 현대창업주, 이병철 삼성창업주, 박정희 대통령(왼쪽부터) |
이런 여러 사정으로 볼 때 박정희가 중화학공업화 정책을 추구한다는 것은 사실 큰 모험이었다. 그러나 박정희 입장에서는 이 정책을 추구해야 할 명확하고도 절실한 이유가 있었다. 첫 번째는 안보 문제였고, 두 번째는 수출입국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중화학공업의 육성과 정착이 반드시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우리나라는 미국의 닉슨 대통령이 주한미군 철수를 검토하고 있는데다 북한을 포함한 북방의 공산 세력과 대치하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국방이라는 안보의 필요성이 절실했다. 또한 수출주도형 공업화정책은 박정희가 나라를 번영으로 이끌겠다는 강한 신념을 갖고 추진하던 일이었다. 따라서 수출주도형 공업화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산업구조의 재편으로서의 중화학공업화가 절실했던 것이다.
중화학공업, 수출산업의 반대자들... 김대중, 박현채, 미국
외국의 성공 사례도 이렇다 할 것이 없고, 미국도 찬성하지 않았으며, 개발은행이나 세계은행에서는 자금공여를 거부하던 당시 박정희의 중화학공업화에 대한 국내의 반대는 당연히 심했다. 아주 가열찼다고 할 만큼 극심했다. 수입대체산업을 육성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먹고 살 수 있는데 외자를 도입해 그런 거창한 정책을 펼치다가는 재정이 거덜나고 외국에 종속되고야 말 거라는 것이 반대론자들의 주장이었다.
당시 야당 대표였던 김대중은 1972년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의 중화학공업정책의 무효화를 공약으로 내걸었다. 물론 결과는 박정희의 승리였지만 간발의 차라고 할 만큼 신승(辛勝)이었다. 그만큼 중화학공업화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가 컸다는 의미가 된다.
중화학공업정책에 대한 가장 핵심적인 반대의 목소리를 낸 인물은 바로 박현채였다. 김대중은 『대중경제론』이란 책에서 수출산업화와 중화학공업화를 비판하고 있는데, 이 내용은 박현채의 『민족경제론』에서 영향 받은 바가 크다.
박현채는 6.25를 전후해서 빨치산 활동을 한 인물이다. 이념적으로 사회주의자이며 대한민국 건국 자체를 부정하는 인물이다. 서울대 상대를 나와 『민족경제론』이라는 책을 집필하였는데, 이는 1990년대 중반까지 훼방꾼들의 가장 중요한 정치경제 이론서이자 필독서 가운데 하나였다. 그 영향력은 국가발전의 훼방꾼들 사이에서는 여전히 유지되었다.
『민족경제론』에서 박현채는 박정희가 추구했던 수출산업화와 중화학공업화 모두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그러한 정책은 식민자본에 종속되는 길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박현채는 중소기업을 중심으로 한 수출대체산업화를 옹호하고, 농업경제에 기반한 자급자족사회를 방향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것이 제국주의의 식민자본으로부터 벗어나 진정으로 자율적인 자립국가경제를 세우는 길이라고 주장했다.
오늘날 한국이 걸어온 수출산업화·중화학공업화의 길과 박현채가 제시한 길 가운데 어느 길이 맞았는지는 재론의 여지가 없다. 한국은 식민자본에 예속화되지 않고 그와는 정반대로 눈부신 발전을 거듭하여 무역대국으로 우뚝 서고 있지 않은가.
세계시장에서 경쟁하는 대기업
중화학공업화의 성공은 박정희의 강력한 추진력과 의지가 없었다면 결코 성공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민간 기업들의 활약 또한 없었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기업가들이‘사업보국’이라는 애국심으로 똘똘 뭉쳐 당시로서는 불가능하다고 평가된 거대한 리스크를 기꺼이 감내하면서 이겨내지 못하였다면 박정희의 의지가 아무리 강했다 하더라도 성공하긴 어려웠다고 봐야 한다.
세계 시장의 무한 경쟁 속에서 큰 성공을 이룬 기업들은 대기업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반대세력은 이들 대기업의 성공을 받아들이기 보다 ‘재벌’이라며 깎아 내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대기업을 정부의 특혜 아래 산업자본의 이윤을 독식하는 문어발식 기업집단이라며 몰아붙이면서 재벌을 해체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서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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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성장 시대 한국의 에너지를 간직한 큰 기업인인 김우중 전 대우회장의 명예회복은 눈앞의 이익에 눈먼 대중들의 상식과 균형감각 회복이 동시에 이뤄져야 하는 큰 작업이다. |
IMF외환위기를 겪으면서 무수히 많은 기업들이 문을 닫았고, 4대 그룹으로 성장했던 대우그룹이 정치적 리스크를 넘지 못하고 해체되기도 했다. 지금도 대기업들은 재벌이라는 오명을 쓴 채 반기업적 규제에 시달리면서 세계시장에서 외롭게 분투하고 있다. 성공의 길을 열고 대한민국 발전을 이끈 대기업에 대한 정당한 평가가 이루어지지 않고 작은 문제를 침소봉대하여 대기업을 폄하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반기업적 논리들은 점차 영향력이 커지면서 오랜 시간 동안 정부의 정책과 법체계에 파고들어갔다. 지금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반기업 규제들은 기업의 성공을 부정해온 훼방의 퇴적물들이다.
당시 우리나라의 중화학공업화 추진은 그 성공이 불가능한 것으로 대내외적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불가능하다는 인식은 이를 무릅 쓰고 나아가야 하는 대상에게는 엄청난 위험일 수밖에 없다. 큰 위험이 큰 수익을 낸다는 것은 투자의 상식이다. 물론 모든 기업이 성공한 것은 아니다. 세계시장의 무한경쟁을 견디지 못한 기업들은 도태되었고 무한경쟁을 버텨낸 기업들만이 세계 수준의 경쟁력을 확보하면서 글로벌 기업으로 올라설 수 있었다.
우리나라 대기업은 세계 기준으로 보면 그다지 크지 않다. 세계화시대인 지금 외국의 대기업들과의 경쟁은 회피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들과 비교했을 때 우리 대기업들의 규모는 여전히 그렇게 크다고 할 수 없다. 세계적 기업 수준으로 어느 정도 규모를 갖춘 기업은 삼성·현대·LG·SK 정도이다. 이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기업들은 세계시장에서 대기업이라고 하기에는 여전히 작은 규모라고 할 수 있다.
박정희는 중화학공업을 육성하는 데에 있어 여섯 가지 중점 분야에 집중하였다. 석유화학, 기계, 조선, 철강, 비철금속, 전자가 그것이다. 철강은 기본적인 원자재를 공급하는 기업으로 포항제철을 건설했고, 각 분야별로 대표적인 기업들이 탄생했다. 조선 분야의 현대중공업을 비롯해 울산석유화학단지와 구미전자공업단지가 건립되었다. 정부의 이러한 중공업육성정책으로 수많은 기업이 태어났지만 모두 성공한 것은 아니다. 경쟁을 통해 경쟁력을 확보한 기업들은 더 큰 도전을 향해 나아갔고, 그렇지 못하고 경쟁에서 패배한 기업들은 도태되었다. /최승노 자유경제원 부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