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조우석 문화평론가 |
재확인하는 바이지만 한국사회의 갈등은 이념, 지역, 세대 등 각 부문에서 심각한 수준이다. 헌법적 가치인 자유민주주의 그리고 시장경제는 그래서 항구적 위기 국면인데, 올바른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데서 오는 혼란이 구조적 요인의 하나로 지적돼왔다.
문화예술 영역이라고 예외일 수 없다. 문제는 이 부문에서만은 상황 자체가 은폐-엄폐돼온 점이다. 믿기 어렵게도 이에 대한 문제제기란 드물거나, 아니면 없었다.
이 영역에 좌파 내지 유사(類似) 좌파가 유독 많은데다가, 문화예술이란 본래 제도권 질서에 비판적이라는 고정관념이 과도하게 컸던 탓이다. 이른바 전복적 성찰 내지 전면적 반성을 이유로 문화예술 그리고 이웃 인문학은 좌파 성향의 가치관을 서슴없이 받아들여 왔으며, 그쪽의 용어나 관용적 표현을 사용해왔다.
게다가 좌파는 문화를 나름 잘 안다. 그에 비해 우파는 문화를 정치-경제-사회영역의 옆 부문의 하나로 보는 산술적 접근에서 벗지 못했다. 그건 탈코트 파슨즈 식의 이른바 구조기능주의적 접근이며, 시효만기가 된 지 오래다.
그럼 문화는 마르크스 식의 하부구조 혹은 물적 토대를 단순히 반영할 뿐일까? 그런 시각도 낡았다. 요즘엔 문화가 정치 경제 부문과 융합하여 제3의 효과를 내거나, 외려 정치 경제를 주도하는 경향도 있다. 요즘에 각광받는 문화산업이 그 징후다.
정부 대 정부의 전통외교와 또 달리 외국민과의 직접 소통을 겨냥한 공공외교 분야에서 매력국가 혹은 소프트파워 등의 용어가 대세로 등장한 것도 그 맥락이다. 문화야말로 사회 모든 부문을 감싸 안는 전략적 요충지로 등장했는데, 이런 변화 기미를 선점해온 게 좌파다. 이는 국내외를 막론하고 동일한 현상인데, 현재 문화권력-지식권력을 구축한 것도 저들이다.
문화의 옷을 걸친 사실 상의 정치투쟁이 벌어지는 것인데, 현실적으로 한국사회 문화예술계에서 좌파 힘은 크다.
시기별로 구분해봐도 그렇다. 해방 이후 1980년대 중후반 이전까지가 보수반공주의 혹은 자유주의 문화의 패러다임이 주도하던 시기이고, 87년 체제 이후 지금까지는 좌파 문화 패러다임이 지배적이다. 자유주의 문화 35년, 좌파문화 35년인데, 현재 압도적인 건 좌파문화의 영향이다.
이게 문학 영화 미술을 포함한 문화 각 부문에 스며들었으며, 자연연령 50대 이하의 머리와 가슴을 지배하는 지식정보 혹은 정서다.
그래서 이 발제문에서는 사회혼란을 부르거나 문화예술 전체를 황폐화시키는 핵심 키워드 몇몇을 추려 그게 과연 올바른 것인가, 좌파 패러다임 속에서 어떻게 오염됐나를 점검해볼 것이다.
왜 그 중의 대부분이 한국사회 전체를 폄하하거나 깎아 내리는 악마의 용어인지도 규명하려 했다. 단 이 글은 시론(試論)의 성격을 벗어나지 못하는데, 선행(先行)작업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 크게 참조됐던 영화평론가 조희문 교수의 작업이 있었지만, 유감스럽게도 그것도 정곡을 찔렀다고 보긴 힘들다.
이런 상황에서 이 글은 다섯 개의 용어를 골랐다. '대안문화', '문화연구', '인간소외', '물신주의' 혹은 '물질만능주의' 그리고 '문화융성'이 그것인데, 주로 철학적 배경을 가진 큰 용어들이다. 상대적으로 작고, 테크니컬한 용어이지만 중요성이 덜하지 않은 몇몇 용어에 대한 비판적 고찰은 후속작업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1980년대 이후 크게 세력을 얻어온, 그러나 매우 수상쩍은 언어인 '민중', '민중문화운동', '리얼리즘', '창작의 자유', '보헤미아니즘(Bohemianism, 낭만주의)', ‘작가주의’, '생태주의' 등이 그것인데, 이에 대한 정리는 훗날을 기약한다.
|
|
|
▲ 영화 '웰 컴 투 동막골'. |
1) 대안문화(alternative culture) → 반(反)자본주의 문화투쟁
지난 세기 중후반 이후 국내외 문화적 좌파를 사로잡았던 가장 대표적인 용어는 대안문화(alternative culture) 혹은 대항문화(counter culture)가 아닐까? 대항문화는 반문화(contra culture)와 동일한 개념이다.
후기 산업사회가 파괴한 인간성의 회복을 주안점으로 하는 제3의 문화라는 게 저들의 설명이다. 대안문화는 환경운동, 인권운동, 평화운동 혹은 여성운동 등으로 빠르게 가지를 치는 특징이 있다.
대안문화-대항문화는 문학의 비트(Beat)세대, 록 음악, 히피문화 등에서 보듯 사회 주류에 편입되는 걸 거부하는 가치체계와 라이프스타일을 통칭하기도 한다. 이런 변화된 상황에서 우파는 저들의 복선(伏線)을 채 파악 못하는 경우가 왕왕 있다. 일테면 반(反)도시 혹은 도시파괴의 철학을 바탕에 깐 서울시장 박원순의 성미산 마을공동체운동 같은 것도 대안문화의 하나다.
서울복판에서 공동육아-공동생활에서 대안학교 운영에 이르는 자치를 표방하는 게 박원순표 공동체 지원정책인데, 대안문화를 표방한 움직임은 그만큼 핫한 현실적 문제다.
그런가 하면 현대사에서 대안문화는 뿌리가 깊다. 1970년대 통기타에 청바지를 상징으로 했던 청년문화도 박정희의 개발연대에 대한 심정적 저항을 전제로 한 대항문화 혹은 하위문화의 하나였다.
그게 문화계로 번지면서 훗날 민중 문화운동으로 발전했다. 1980년대 중반 역사학-정치학-철학-사회학을 포함한 거의 모든 인문사회과학이 '학술운동'이란 이름 아래 좌파 패러다임을 도입했던 것도 기존의 지식정보 구조를 바꾸려는 대안문화의 하나다.
그런 구조는 지금도 좌편향 문학판과 영화판에서도 은밀하게, 노골적으로 작동 중이다. 영화판의 경우 꼭 10년 전 개봉돼 흥행에 성공했던 '웰컴투 동막골'에서 드러난다. 전쟁이 터진 것도 몰랐던 순박한 한민족이 평화를 구가하며 사는 이상향으로 설정된 동막골, 국군과 인민군이 어깨동무한 채 미군 전투기를 공격하는 해방구 동막골의 개념 설정 자체가 대안문화적 발상이다.
대한민국은 태어나서는 안 될 국가이며, 미완(未完)의 근대국가인 분단체제는 민족통일로 극복되어야 한다는 눈먼 논리가 만들어낸 '상상력의 해방구' 즉 대안문화에 대한 강박증이 급기야 동막골로 표출된 셈이다. 대안문화 혹은 대항 문화는 기성체제에 저항하는 반문명의 놀음인데, 한국에서는 유독 현실정치 세력과 손을 잡고 움직인다. 그래서 심각한 사회적 위협이기도 하다.
반면 할리우드 영화의 경우 순치된 형태의 반자본주의 문화 충동으로 나타난다.‘매트릭스’ 1편에서 주인공 모피어스가 네오에게 했던 말이 의미심장하다.
“매트릭스는 다름 아닌 시스템이라고. 네오, 알겠어? 그 시스템은 우리의 적이지. 주위를 둘러보면 뭐가 보이지? 사업가, 교사, 변호사, 목수 등 수많은 사람들이지. 우리가 구원하려는 게 이들의 정신이야. 그러기 위해서는 이들이 시스템의 일부이기 때문에 우리의 적이라는 것부터 알아야 해. 대부분은 시스템과의 접속을 끊어낼 준비가 되어있지 않거든.”
모피어스는 비참하게 사는 인류를 구출하겠다는 사명감을 가진 해커그룹의 우두머리인데, 네오에게 매트릭스 탈출을 권하면서 전사로 거듭날 것을 권유한다. 인간은 컴퓨터가 심어준 매트릭스 프로그램에 따라 살고 있는 가련한 존재로 설정된다.
지금이야말로 매트릭스 밖으로 뛰쳐나가야 한다는 설정에는 대안문화-대항문화를 만들어 잘못된 시스템인 기성체제를 해체하자는 논리가 맹렬하게 작동한다.
그게 한국의 좌파운동권의 체제변혁 구호와, 이른바 의식화 논리와 붕어빵이란 것은 우연일 리 없다. 이렇듯 대안문화란 용어는 얼핏 중립적인 듯 보이며, 문화적 순수함을 가장하고 있기 때문에 더 위험하다. 문화의 이름 아래 모든 무책임한 논의와 운동이 용인될 수 있다는 느낌, 그리고 기성체제가 허깨비에 불과하다는 고정관념을 심어주는, 대단히 무차별적이고 폭력적 언어라는 판단 때문이다.
그 심저에는 반(反)자본주의, 반 기업주의 충동도 아주 강력하다. 이미 세력을 형성한 이 말을 어떻게 바꿔 쓸까? 손쉬운 대체용어가 없는 게 현실이다. 일단 "반(反)자본주의 문화투쟁"이라고 설명하는 게 어떨까? 상황에 따라 "반기업 성향의 대안문화", "반도시 성향의 대안문화"라고 쓸 것도 제안한다.
이런 대체용어는 임시방편이다. 그에 앞서 상투적으로 매트릭스를 거부하며, 대안문화를 들먹이는 인식구조 자체에 대한 비판이 축적되어야 하며, 그런 시도 속에서 진정한 대체용어가 등장할 것이다.
냉정하게 말해 우리들은 거대한 헛것이라는 뜻의 매트릭스에 살고 있지 않다. 만일 누군가가 그걸 진지하게 믿고 있다면, 불교나 '나비의 꿈'의 노장사상 같은 종교적 성찰과, 구체적인 사회 처방 사이에서 심하게 헷갈리고 있을 뿐이다.
수십 억 지구촌 인간은 자신이 생각하는 선의 개념을 추구하며, 서로 협력하고 경쟁하며 애를 쓴다. 인간 이기심의 작동이기도 한 그건 성공하기도 하고 실패할 수도 있다. 다양한 사회적 제도가 있고, 그 안에서 우리는 진지하게 모색할 뿐이다.
그걸 매트릭스라며 한 칼에 부정하는 것은 멋진 레토릭 혹은 운동권다운 과격함일지 모르나, 현실의 삶 그리고 인류의 오랜 지혜를 외면한 이상주의적 행동이다. 이런 몰입은 혼란을 유포시키거나 비생산적이기도 하다. 개혁을 제도화하는 점진적이고 차분한 노력을 가로막는 부작용이 크기 때문이다.
자유주의 철학의 사촌 격인 에드먼드 버크 식의 보수주의 이념이 갖는 미덕은 여기에서도 빛난다.
|
|
|
▲ 영화 '매트릭스'. |
2) 문화연구(Cultural Studies) → 문화적 정치투쟁
이 용어는 국내에서는 영문학자를 중심으로 광범위하게 확산됐다. 당초 문화연구(Cultural Studies)는 1960년대 초 영국 신좌파인 레이몬드 윌리엄스가 문화를 보는 마르크스주의의 한계를 넘어서자는 뜻으로 제창했다.
즉 문화를 하부구조를 반영하는 상부구조로 간주하지 않고 일상을 포함한 총체적 삶의 방식을 문화로 보자는 제안이었다.(한국에서 레이몬드 윌리엄스를 소개한 것은 1950년대 후반에서 1960년대 초반까지 미국에 유학했던 영문학자 백낙청이었다는 걸 기억해두자.)
'일상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는 명제는 이런 맥락에서 탄생한 것이다. 이걸 계기로 문화가 고상한 예술이나 지식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판단 아래 훨씬 현실적이고 일상적인 영역인 광고산업 분석, 문화산업론, 대중사회론으로 뻗어갔다.
일테면 강내희(중앙대 교수)는 '리틀 백낙청'의 한 명인데, 그는 20년 넘게 좌파 문화잡지인 계간 <문화/과학>을 만들어오고 있으며, 문화연대 공동대표, 맑스코뮤날레 공동대표로 활동 중이다.
그가 대중에게 알려진 것은 지하철에 대한 분석이다. 레이먼드 윌리엄스 류의 문화연구를 하는 그의 눈에 지하철이라는 공공의 시설이 자본과 결탁한 나쁜 공간이 롯데월드였다. 대중이 편리하다고 느끼고 있지만, 음험한 대자본의 논리가 우리네 일상 속에서 무시로 관철되고 있다는 식의 반자본, 반도시의 좌파 철학이 이 글에서 신랄하게 펼쳐졌다. 지금 그런 논리를 따르는 무리는 상당수다.
문화연구는 대학의 영문학 혹은 언론학 등에서 커리큘럼으로 자리 잡았고, 시민강좌로도 인기다. 그런 과정을 이수한 사람들은 "국가의 기관이 노골적으로 자본의 편을 들다니"하는 심리를 갖게 된다.
자본 대 비자본, 국가 대 개인 등의 상투적인 이분법도 저들의 기본적인 논리구조다. 즉 음험한 좌파적 기획인 문화연구는 조금 전 언급했던 대안문화란 용어처럼 문화적 좌파가 창궐하는 또 하나의 영역이다.
반(反)자본주의, 반 기업주의 충동도 그 때문이다. 그건 프랑스혁명 이후 펼쳐진 근대세계 이후 등장했던 지식인, 문화인들의 상투적 반란이기도 하다. 상식이지만 “소유권이야말로 악의 시작”이라고 했던 룻소가 그러했다.
그것의 좀 졸렬한 버전이 프랑스 초현실주의 시인 루이 아라공의 입에서 나왔다.
“아, 은행원, 학생, 근로자, 정부관리, 하인 그대들은 아첨꾼이군. 난 절대로 일을 하지 않을 걸세. 내 두 손은 더 없이 순수하다네.”
돈과 상업에 오염된 나쁜 체제인 자본주의에 자신은 순응하지 않을 것이라는, 냉소를 바탕에 깐 선언이다. 중산층의 라이프스타일을 불결한 그 무엇으로 취급하려는 보헤미안 기질인데, 바로 그런 게 20세기 중반 이후 이른바 작가주의의 멘탈리티를 구성한다.(실은 잔뜩 겉멋 든 보헤미아니즘(Bohemianism) 즉, 얼치기 낭만주의가 어떻게 좌파성향으로 뒤바뀔 수 있고, 수두룩한 케비어 좌파 혹은 강남좌파 무리를 낳는 비옥한 토양인가는 의외로 흥미로운 주제다.)
그럼 문화연구란 용어를 어떻게 바꿔야 할까? 그 용어는 학문 분과의 하나로 고착됐고, 일상의 용어로도 쓰인다. 이미 언어세계에서 시민권을 얻은 상태라서 지금 그걸 없었던 일로 치부할 순 없다. 즉 너무 늦은 문제제기인 셈인데, 이런 상황에서 상황과 문맥에 따라 ‘문화적 정치투쟁’이라는 말을 병기할 것을 필자는 제안하는 바이다.
3) 소외 → 소외라는 가짜 신화
“한국문학이 수 십년째 천착하고 있는 주제는 ‘소외’다. ‘가까운 거리에 있지만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 우리, 섬처럼 떨어져있는 우리들의 모습, 난 오늘도 이 사회가 요구하는 가면을 쓰고서 거짓말을 한다…’는 식의, 아무래도 좋은 이야기들이 자못 심각한 어조로 논의되는데 독자들은 아무도 관심이 없다.”
이원우 기자가 자유주의예술포럼에서 발표했던 글 ‘문화와 예술, 그리고 시장에 관한 여섯 가지의 단상들’에서 적절하게 지적한 대목이다. 그건 실은 자의식 과잉 속에 "아프다 아파"를 반복하는 치기어린 몸살에 다름 아니다. 이미 너무도 일상용어가 됐지만, 결코 중립적 용어는 아니다. 문제의 인간 소외란 용어를 둘러싼 반복적 사용은 뿌리가 아주 깊은데, 다분히 서양지성사에 뿌리를 두고 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이야말로 돈에 대한 혐오의 감정을 인간 이해에 결부시켰던 사람이다. 그는 <국가론>에서 신이 인간을 창조할 때 사람의 그릇 크기에 따라 서로 다른 금속으로 만들었다고 말했다.
덕이 가장 높은 사람은 금과 은으로, 낮은 영혼을 타고 난 사람은 철과 황동으로 만들었다. 때문에 철과 황동으로 만들어진 사람들은 결핍의 느낌 때문에 금과 은에 대한 소유욕이 크다. 그 생각을 보편화한 것이 기독교인데, 성경은 과연 부자에 대한 경고로 가득하다.
“하나님과 맘몬(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는 것이다.“이번에는 부자에게도 한 마디 하겠습니다. 당신들에게 닥쳐올 비참한 일들을 생각하고 통곡하십시오. 당신들의 재물을 썩었고 그 많은 옷가지들은 좀먹어 버렸습니다. 당신들의 금와 은은 녹이 슬었고 그 녹은 장차 (남들이) 당신들을 고발할 증거가 되며 불과 같이 당신들의 삶을 삼켜버릴 것입니다.”(야고보서 5장)
그걸 이어받아 돈(자본주의)과의 전쟁을 선포한 19, 20세기 지식인 그룹은 세상을 풍미했던 소외론을 만들어냈다. 마르크시즘도 물신주의와 소외론을 무기로 해서 계급투쟁론을 향해 달려갔다. 그 바탕에는 맘몬을 섬기느라 여념이 없는 대중은 본래의 자족적 존재에서 벗어난 채 외롭고 쓸쓸한 삶을 산다는 엘리트주의가 깔려있다.
그런 식의 지적을 비판이론의 철학자 마르쿠제나 에리히 프롬이 번갈아가며 했다. 대중을 소외의 늪으로 내몬 것은 자본주의의 악덕 때문이라는 추상 같은 언명이었다. 그들에 따르면 소외된 대중은 자신의 진정한 욕구를 만족시키지 못해 무기력하다. 타자와의 진정한 연대를 이루지 못해 불행하며 의미있는 정치적 변화를 이끌어내지 못한다.
여기서 물어보자. 소외, 그게 과연 검증 가능한 주장일까? 전혀 안 그렇다. 단 매우 모호하다는 특성 때문에 소외란 용어는 외려 더 유행을 탔다. 귀족 티를 내는 지식엘리트가 대중에게 경멸의 시선을 보내기에 딱 좋은 아이템이자, 마르크스 이후 등장했던 전면적인 비관주의의 주문(呪文)이기도 했다.
대중들은 지식인들의 진단 앞에 잔뜩 주눅 들었지만, 소외론이 수상쩍은 반자본주의 아류 이론이자, 종교와 현실 사이를 착각했다는 비판을 지금껏 받는다.
“(소외론에 따르면) 이 세상은 선해질 수 있다. 단 우리가 태어나는 소외(악)를 극복할 수 있을 때만 그렇다. 소외는 인간의 조상 아담과 이브의 잘못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본주의의 결함 때문이다. 그렇게 소외의 신화는 악의 근원을 자본주의로 돌리고, 모든 개인에게서 그 악을 찾아냈다. 우리 모두는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소외당하고 있다.…소외의 신화는 준 성직자들(인 지식인들)이 들려주는 일종의 종교적 이야기이다.”( 앨런 케이헌, <지식인과 자본주의> 38쪽)
그러면 소외란 용어를 어떻게 대체할까? 너무도 일상 속에 자리 잡고, 문학을 포함한 미술, 영화 등에서 빈번하게 쓰이는 용어라서 대체용어를 제시하긴 거의 불가능하다. 임시방편으로 '이른바 소외'라는 식으로 접두사를 붙이는 것도 방법이다. 아니면 '소외라는 가짜 신화'라고 풀어서 써주는 것도 함께 제안한다.
4) 물신(物神)주의 혹은 물질만능 → 정당한 재산증식 노력
'대안문화', '문화연구', '인간소외' 등의 용어에서 보이는 반문화의 충동은 서구 못지 않게 한국사회에서 널리 퍼져있다. 압축성장 과정을 거쳤던 한국사회이기 때문에 서구 못지않게 반자본주의 심리가 존재한다. 전형적인 사례가 작고한 개신교 지도자인 고(故) 강원용 목사의 다음 발언이다. 그의 자서전인 <빈 들에서:나의 삶, 한국현대사의 소용돌이>(1993년) 서문에 내비치는 말이다.
“내가 살아온 한국의 80년은 계속 ‘빈 들’이었다. 이 빈 들은 성서에도 나오듯 ‘돌로 떡을 만들라’는 물질만능과 경제제일주의, 악마에 절하고라도 권력만 잡으면 된다는 권력숭배 사조,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는 비합리적이고 광신적인 기복종교에 의해 지배되는 공간이었다.”
강원용은 개신교 목사 중 현대사의 복판에서 움직였던 사람, 재야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했던 인사였다. 그런 그의 반시장경제 인식이 의아한데, 뿌리도 마르크시즘이다.
정신이 아니라 물질을 신격화하는 정신적인 태도를 말하는 물신주의(物神主義, fetishism)를 비판한 게 마르크스였다. 요즘 좌파도 그와 다르지 않다. 그들은‘모든 것은 경제적 가치의 실현에 있다’는 논리가 오늘날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며 즐겨 개탄한다.
마르크시즘에서 멀지 않는 강원용 목사 류의 발언이 메아리를 만들고 있는 셈이다. 이토록 한국사회를 악마의 집단으로 모는 극단의 언어들이 수두룩해서 젊은이들을 유혹한다. 귀화 러시아인 박노자도 그 한 축을 맡고 있다. 박노자가 보기에 한국사회는 “서로를 잡아먹기를 탐하는 자본주의 지옥”에 다름 아니다.
재벌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죽은 폭군(박정희 대통령을 지칭함)의 어용시전(市廛)”에 불과하다. (박노자 지음 <당신들의 대한민국>)
한국사회의 발전을 백안시하거나 사시의 눈으로 보는 태도 역시 현실과 어긋난다. 하지만 지금도 대학가 논술고사에 물신주의 비판 어쩌구가 단골로 출제되는 게 우리네 현실이다.
대안은 무엇일까? 쉽지 않다. 임시방편으로 필자는 물신(物神)주의 혹은 물질만능이란 용어를 ‘정당한 재산증식 노력’으로 바꿔 쓸 것을 일단 제안한다.
5) 문화융성 → 문화정상화
앞에서 따져본 네 개의 용어가 다분히 철학적인데 비해 마지막으로 다루는 문화융성이야말로 관변(官邊)에서 즐겨 쓰는 말이다. 이 말이 수상쩍은 이유는 좌파 문화권력에 대한 경계를 전혀 하지 않기 때문이다.
박근혜 정부의 핵심 국정과제 3개의 하나인 문화융성이 그 대표적인데, 문화예술 영역에서 두드러지는 좌편향 현상에 대한 문제의식을 읽어낼 수 없다. 2013년 출범한 대통령 직속 문화융성위원회(위원장 김동호)가 존재감이 없는 것도 그런 맥락이다.
박근혜 정부가 문화융성을 구현하기 위한 이른바 3대 전략, 8대 정책과제를 꼽은 것도 그렇다. 3대 과제는 문화참여 확대, 문화·예술 진흥, 문화와 산업의 융합을 제시했다.
8대 정책과제는 ▲인문(人文)정신의 가치 정립과 확산 ▲전통문화의 생활화와 현대적 접목 ▲생활 속 문화 확산 ▲지역문화의 자생력 강화 ▲예술 진흥 생태계 형성 ▲창의 문화산업의 방향성 제시 ▲국내외 문화적 가치 확산 ▲국민통합 구심점으로서의 '아리랑' 활용 등이다.
8대 과제를 ‘자율, 상생, 융합’의 키워드 아래 상향식 생활밀착형 문화정책을 펴겠다는 게 관료적인, 지극히 관료적인 설명이다. 못내 공허하다.
그걸 알리려는 시도로 대통령이 '문화가 있는 날'(매월 마지막 수요일)에 문화·체육 현장을 찾는 행보를 해오고 있지만, 막상 국민들 사이에 체감되는 것은 별로 없다. 주무부처인 문화체육관광부도 마찬가지다. 문화예술 스포츠 관광 등 소프트파워 전체를 관장하는 전략부처라서 이 정부 성공의 열쇠를 쥐고 있으면서도 지난 2년 동안 고식적인 상황 관리에 그치고 있다.
아니 문화예술 분야 그리고 인문학 분야의 좌편향 현상이 너무도 방대하고 보편적이기 때문에 현 정부도 어떻게 손을 쓰지 못한 채 무력감에 사로 잡혀있다고 해야 할까?
어쨌거나 문화융성이라는 용어에는 현 상황을 타개해야 할 의무가 있는 우파 정부가 제도권으로 자리 잡은 좌파 문화권력과 엉거주춤하게 타협 혹은 굴종을 하겠다는 태도가 어렵지 않게 읽힌다.
기존 좌파 문화권력의 기득권을 양해해 주겠다는 패배주의적 뉘앙스도 묻어난다. 문화융성은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무신경하게 갖다붙인 캐치프레이즈일 수도 있는데, 만일 그랬다면, 그 역시 이 정부의 수준을 여지없이 반영한다.
캐치프레이즈란 게 공감대를 넓히고 포용력을 끌어올리기 위한 것 아니냐고 할 수 있지만, 지금은 그런 한가한 상황이 아니지 않은가.
이에 필자는 ‘문화 융성’ 대신 ‘문화 정상화’로 바꿔 쓸 것을 제안한다. 이렇게 바꿀 경우 지금 문화권력과 지식권력에 무언가 문제가 있으며, 예산과 인적 자원을 가진 정부가 손을 대겠다는 의지를 확인시켜주는 효과가 있다.
궁금한 건 이 대목이다. 이명박 정부가 이렇다 할 힘을 쓰지 못했듯이 박근혜 정부도 매일반으로 그칠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이다. 두 정부 모두 취임 전 충분한 준비와 큰 그림이 필요했는데, 결과적으로 역부족일까? 유감스럽게도 그게 사실로 확인될 경우 이 정부의 우파 철학에 대한 빈곤 그리고 실력 탓이다. /조우석 문화평론가
(이 글은 자유경제원이 주최한 <정명(正名)으로부터 정도(正道)가 시작 된다-이념·사상, 문화 분야의 바른 용어> 토론회에서 조우석 문화평론가가 발표한 토론문 전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