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경제원(원장 현진권)은 지난해부터 기업가연구를 통해 한강의 기적을 일구는데 기여한 기업가들을 연구하고 있다. '한국 출판계의 대부' 박맹호 회장에 대한 연구결과를 발표한 것은 남정욱 숭실대학교 교수다.
한국 근대의 모든 지식이 일본으로부터 왔다는 불편한 진실과 강점기 이후 찾아온 '지적 공백의 시대' 사이에서 새로운 시대를 열어젖힌 것이 바로 민음사 박맹호 대표였다.
학창시절부터 불만을 가져오던 책 디자인에 대한 관점을 바꿨다거나, 광고 자체를 하나의 콘텐츠로 본다거나, 서점이라는 공간을 확장적으로 재정의하는 등 한국 책의 역사에서 박맹호 회장이 끼친 영향은 지대하다. 박 회장의 궤적을 살펴보는 것은 자신의 분야에 존재하던 '룰' 그 자체를 바꾼 기업가란 어떤 것인지를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아래는 남정욱 교수의 발표문 전문이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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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정욱 숭실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
인간은 세대를 넘어 지식과 정보를 전달하는 유일한 동물이다. 전세대로부터 정보를 전달받은 세대는 집단 지능을 통해 그 정보를 확대 재생산하여 다음 세대로 넘겨준다. 다음 세대는 이를 모방하고 좋은 것을 간추려 제도로 만든다.
하이에크는 “사회 진화의 결정적인 요소는 '성공적인 제도와 습성을 모방하는 것에 의한 선택’이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구체적인 합의도 없는 상태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세대 간 협력에 의한 문명의 발전을 이만큼 명쾌하게 집어낸 발언은 흔치 않다. 그런 이유로 책은 인류가 만들어 온 문명의 가장 대표적인 형태이자 문명을 만들어 온 가장 효율적인 방식이다.
구전과 형식 혹은 형태로서의 지식은 차원이 다르다. 중국 한 제국을 다시 재건한 후한의 첫 황제 광무제 시기, 한동안 지지부진했던 유학의 발전은 속도감 있게 진행된다. 이 과정에서 발생한 게 금문학(今文學)과 고문학의 대립이다. 금문학은 진시황제의 분서(焚書)로 인한 경전의 유실을 기억과 구전으로 되살려 낸 것이다. 한동안은 금문학의 전성기였다. 후반부에 들어서 집안에 꽁꽁 숨겨 놓았던 개인 소장 서적들이 하나씩 시중으로 흘러나온다.
광무제 때에는 경전의 유실로 인한 체계의 부실함을 이유로 고문학을 배척하고 금문학을 장려했지만 그러나 '들은 것’이 '쓰인 것’을 이길 수는 없는 일이다. 점차 고문학의 학문적 성과가 금문학을 압박했으며 결국 고문학 중심으로 금문학을 통합하면서 신ㆍ구 학파의 대립은 고문학의 승리로 끝나게 된다. 형태를 갖춘 지식, 책의 가치와 의미는 이렇게 크고도 중요하다.
한국 근대의 모든 지식은 일본으로부터 왔다. 침략자들이 물러가자 지적 공백의 시대가 찾아왔다. 모든 공부는 책이 기본이다. 일본 책 밖에 없었으며 공수空輸가 중단되자 지식은 단절되었다. 일부, 언어 기능이 발달한 이들은 헌책방에서 미국 책을 구해 그 부족한 부분을 채워 넣었지만 대중의 영역은 아니었다. 이때 한국 출판계에 등장한 인물이 민음사 박맹호다.
방판(訪販) 시절을 아십니까
1960년대까지 대부분의 출판사의 주 종목은 에세이집이나 소설집이었다. 사회과학이나 인문학 같은 전문 도서를 펴내는 출판사는 아예 없었다. 에세이집은 일본 책의 중역으로 만들어졌다. 몽테뉴의 <수상록>은 축약 편집되어 <지혜와 사랑의 생활>이라는 제목으로 나왔다. 니체와 쇼펜하우어가 그렇게 소비되었다. 칸트와 데카르트가 졸지에 자기계발서의 저자가 되었다. 나머지는 문학 전집이었다. 집집마다 거실에 전축과 문짝이 달린 책장이 들어서던 시절이다.
책장 안은 그 집안 주인의 지적 수준이었고 그 안을 주로 채웠던 것이 세계문학전집이다. 읽기 위한 책이 아니라 그야말로 장식용이었다. 이때 그 전집들을 팔러 다닌 것이 방문판매 조직이다. 가가호호 방문해서 무작정 벨을 누른 뒤 전집을 팔았다. 지금은 사라진 책 외판원이라는 직종이 호황을 누리던 시기였고 당시 영업 사원 중에는 빌딩을 올린 사람도 적지 않았다. 세계문학전집에는 번역자 이름이 없었다.
있다 하더라도 대명(代名)이었고 태연하게 '편집부’로 되어 있는 경우도 흔했다. '리프린트’라고 아예 외국 책을 번역도 하지 않고 통째로 복제해서 파는 경우도 있었다(이 리프린트의 경우 80년대 중반까지도 맥을 유지했다. 주로 어학이나 자연계통 전문 서적들이다). 도둑질인지 몰라서 했다. 알았더라도 생계가 먼저였다. 돈이 뻔히 보이는 불법 도서 방판 조직과 결별하고 단행본으로 시장에 진출한 박맹호의 '양심적’ 사업 전개는 그의 성격과 무관하지 않다.
유년 시절
박맹호는 1933년 12월 31일 충북 보은군 보은읍의 비룡소에서 태어났다. 비룡소는 이무기가 날아오른 곳이라는 뜻인데 청소산 아래 깊은 소를 이르는 명칭이다. 아버지 박기종은 정미업과 운수업을 기반으로 건축업에까지 진출, 스무 살에 보은군에서 가장 세금을 많이 낸 성공적인 사업가였다.
'보은의 왕’으로 군림했던 아버지는 하필 정치에 취미가 있었다. 선거 때마다 가산을 털어먹었지만 빈 곳간을 다시 채우는 능력 또한 출중해서 금세 원래 재력을 회복하곤 했다. 기골은 장대했고 목소리는 컸다. 본질이 마초형 가부장인 인물이었다. 아버지 앞에서 아들은 항상 위축되었다. 주눅 들었으되 그러나 시키는 대로 하지는 않았다. 사업을 물려받고 정치에도 손을 대기를 바랐던 아버지는 아들이 출판에 매달리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 까짓 책들 파지로 갖다 팔면 몇 푼이나 나오겠냐며 아들의 기를 죽였다. 아들에게는 '문화’였지만 아버지에게 책은 그냥 '종이’였다. 책에 대한 애착과 소명의식도 있었지만 바닥에 미량의 반발이 깔려 있었음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냉대와 반발은 박맹호의 동력이 되었다. 아버지는 열 셋에 다섯 살 위의 어머니와 결혼하여 누나 둘에 이어 스물에 박맹호를 낳았다. 박맹호와 세 살 터울인 동생이 태어날 무렵 아버지는 살림을 하나 더 차렸다.
당시에는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비룡소의 집에 제사 등 일이 있을 때마다 '다녀갔고’ 대부분 둘째 부인과 살았다. 어머니는 가끔 풀피리를 불었다. 그 소리는 애를 끓는 듯 슬펐고 인종(忍從)의 애가(哀歌)였다. 한학 세대였던 아버지는 등록금의 개념을 이해하지 못했다. “뭔 돈이 필요해? 천천히 내. 천천히!”
어머니는 연초에 신수를 보고 와서는 “너는 큰 사람이 된다더라.” 격려해 주곤 했다. 반발과 자신감이 함께 자랐다. 어머니는 쓰러지고서 “나 그만 갈란다.” 한마디 남기고 세상을 떴다. 아버지는 폐암으로 반년 동안 끔찍하게 고생하다가 갔다.
모색 그리고 전환
박맹호는 원래 소설가 지망생이었다. 그가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써 냈던 작품 '파벽 - 자유 풍속 서장’은 자유당 정부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풍자 소설이었다. 갓 출범한 신문사는 1등으로 뽑혔던 그의 원고를 잡아 내리고 차석을 당선작으로 올렸다.
미안했던지 신문사에서는 소설 연재를 맡겼다. 나쁘지 않은 보상이었지만 그는 소설 연재를 통해 자기의 재능을 객관적으로 따져 보았다. 서머싯 몸의 <달과 6펜스>를 읽고 절망했던 기억으로 그는 고민 끝에 소설에 대한 로망을 접었다. 그의 자서전 <책>에서 그는 이렇게 적고 있다.
“지금도 내가 살아오면서 가장 잘한 일 중 하나는 내 능력을 스스로 간파하고 소설가의 길을 포기한 것이라고 확신한다...(중략)...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안 되는 일이라고 판단하면 과감하게 미련을 버리고 되는 길을 찾아왔다. 이런 면에서 나는 냉정한 리얼리스트에 가깝다. ..(중략)...소설가의 길은 청산했지만 소설로 지새웠던 문학청년 시절이 후일 민음사를 만들고 한국에 문학 단행본 시대를 본격적으로 개척해 나가는데 중요한 밑거름이 됐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 자서전 <책> p42~43 중에서 -
꽤 괜찮은 소설가 하나를 얻는 것도 나쁘지 않았겠지만 그가 없었더라면 결코 얻을 수 없었을 출판계에서의 성과를 생각하면 그의 판단은 '공리적’으로 옳다. 1966년 박맹호는 본격적으로 출판에 뛰어든다. 첫 작품은 <요가>였다. 앉거나 서서 몸을 배배 꼬는 그 요가다.
1만 5천 권이 팔려 당시로서는 초대형 베스트셀러를 기록했다. 에스디안 요기 뷔르다스가 쓴 책을 오기 마사히로가 일본어로 번역했고 이것을 그의 평생의 벗인 신동문이 다시 한국어로 옮긴 것이다. 번역자의 필명은 동방구(東方龜)로 지었다. 거북이처럼 오래 가고 싶어서 그랬을까. 일종의 테스트 버전에서 스매쉬 히트를 날린 박맹호는 본격적으로 소설 출간에 눈을 돌린다.
<조선총독부>로 유명한 유주현의 '장미부인’을 두 번째 작품으로 내놓았지만 실패였다. 그는 역사물에는 좋았지만 현대물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일본 <서유기>를 무단으로 번역해서 출간했지만 역시 반응이 없었다. 시장에서 연달아 깨지는 와중에 그는 시인 고은과 '인문서점’이라는 출판사를 하나 더 차렸고 여기서 앙드레 말로의 책과 고은의 시집 등을 펴냈다. 나중에 '인문서점’은 민음사와 합친다.
'세계 시인선’과 '오늘의 시인 총서’
박맹호는 인복이 많은 사람이다.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하나 있다. 그럴만한 사람 옆에 사람들이 모인다. 인복의 기본은 그 당사자다. 고은에 이어 김현이 합류한다. 김현은 텍스트보다 더 재미있는 콘텍스트를 쓰던 사람이다.
그의 비평은 그 자체로 별도의 문학이었다. 박맹호와 김현은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깊은 교분을 나눈다. 그래서 나온 책이 한국 최초의 문학 공동 비평서로 꼽히는 <현대 한국 문학의 이론>이다. 1972년의 일이다. 김현, 김윤식의 공저로 <한국 문학사>도 펴냈다.
정현종의 <사물의 꿈>, 박상륭의 <박상륭 소설집>, 이청준의 <소문의 벽> 등을 펴내며 갈증을 달래던 박맹호는 민음사를 문학 출판사로 확실하게 포지셔닝하면서 한국 문단에도 기여하기 위한 기획 '세계 시인선’과 '오늘의 시인 총서’를 발동시킨다. 당시에는 외국 시인의 시집을 일본 사람이 옮긴 것을 다시 한국어로 중역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것을 한국의 학자들이 바로 옮기고 원문을 병기하는 방식으로 바꾼 것이다. 이런 걸 혁명이라고 부른다.
폴 발레리의 <해변의 묘지/김현 역주>등 4권이 이렇게 세상에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 불성실한 번역으로 맛보지 못했던 원시(原詩)의 매력은 당시 시인 지망생들이 현대성을 확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이 성공에 고무되어 벌인 것이 '오늘의 시인 총서’다.
국내 시인들의 작품을 모아 총서로 발간하는 것으로 1974년 김수영의 <거대한 뿌리> 등 5권이 첫 선을 보였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발간 두 달 만에 초판을 다 팔아치우고 재판에 돌입했다. 해방 이후의 한구 시단의 성과를 하나로 모은 기획은 시에 대한 사회적인 인식을 바꿔놓았다. 시는 고루한 것, 안 팔리는 것으로 여겨지던 편견을 격파한 것이 산뜻한 판형이다. 국판 30절 판형이 이때 최초로 시집에 사용되었다.
이 판형이 우리가 지금 시집하면 떠올리는 날렵한 몸매의 그 판형이다. 휴대성은 높아졌고 시집은 품격을 얻었다. 시집에서 가로 쓰기를 감행한 것도 화제였다. 사람들은 처음에는 어색해했지만 이내 가로 쓰기에 익숙해졌다. 30절 판형, 가로 쓰기, 중질지(中質紙) 사용, 산뜻한 장정이라는 현대 한국 시집의 스탠다드는 전적으로 박맹호의 공적이다.
계간 <세계의 문학>과 '오늘의 작가상’
제호를 <세계의 문학>으로 정한 이유는 기존에 발행되는 <창작과 비평>이나 <문학과 지성>과 차별화하기 위한 의도였지만 어릴 때부터 탐독하고 내 인생에 깊은 영향을 미쳤던 세계 문학의 기라성들을 일본어 중역이나 베끼기가 아니라 해방 이후 쌓인 우리 힘으로 제대로 출간해 보고 싶은 욕망이 잠재의식 속에 쌓여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찌 보면 '세계 시인선’의 연장선상에 있는 기획이다. 그러나 그 결이 다른 기획이었다. '세계 시인선’에는 '현재성’이 결여되어 있었다. 지금 막 생생하게 분화되는 세계 문학의 입김을 바로 맡을 수 있다는 측면에서 <세계의 문학>은 그 가치가 남달랐다. 창간호에 작가론이 나갔던 솔 벨로가 그 해 노벨문학상을 수상했고 단편 번역이 실렸던 도리스 레싱도 후보군에 이름을 올렸다. 한국 문학잡지가 세계적인 흐름과 걸음을 같이 하기 시작한 것이다. 세계 문학과 시차를 없앤 박맹호가 이어 시도한 것이 '오늘의 작가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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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음사 박맹호 회장 /사진=SBS 뉴스화면 캡쳐 |
당선과 동시에 단행본으로 출간한다는 것은 이전에 없던 방식이었다. 1976년 창간호에 공고를 내 보낸 후 2회 차인 겨울 호에 당선작인 한수산의 장편 소설 '부초’를 전재했다. 원고지 1030매 분량으로 문단은 경악하고 독자들은 분재(分載)의 찔끔찔금을 뒤엎은 기획에 박수를 보냈다. 단행본은 30만부가 팔렸다. 통속소설을 빼면 문예지에 실린 본격문학이 이렇게 대중의 사랑을 받은 것은 처음이었다. 3회 당선자는 미문의 작가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이다.
책 디자인, 가히 혁명
박맹호에게 학창시절부터의 불만은 책 디자인이었다. 단행본 출간이 대세가 아닌 전집류 출간이어서 상황은 더 나빴다. 디자인은 일종의 책의 입장에서 보면 '화장(化粧)’이다. 그는 표지가 독자와 맨 처음 만나는 지점이며 책의 첫 인상을 좌우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의 소원을 충족시킬 수 있을 만한 사람이 있어야 했다.
그렇게 인연을 맺게 된 인물이 정병규다. 대한민국 북 디자인의 1세대인 정병규는 고등학고 시절 미술부장을 하면서 교지 편집을 했고 서라벌 예대 문창과에 다니면서 소설가 송기원이나 시인 이시영과 어울리던 사람이었다. 정병규를 처음 만난 자리에서 박맹호는 그의 기재를 보았다. 그리고 바로 편집장 자리를 제안했다. 정병규는 밤에 일하는 스타일이라 오후 세시에 나와도 되겠냐고 조건을 타진했고 박맹호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정병규의 첫 작품은 제 1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인 <부초>였다. 박맹호는 편집장인 정병규에게 디자인까지 일임했다. 그렇게 해서 나온 표지가 파란 빛이 도는 어두운 추상화를 배경으로 제목을 한껏 부각시킨 것으로 당대 책 표지 디자인의 통념을 허물어버린 디자인 방면의 '문제작’이었다. 독자들은 당혹스러워했지만 원래 안목이란 서서히 높아지는 게 아니라 급격하게 올라가는 것이다. 정병규가 벌인 두 번째 파격은 이청준의 <매잡이>였다.
작가의 사진 한 장과 활자로만 디자인 한 것으로 역시 대중들의 눈높이를 올려놓았다. 사람들은 표지만 보고도 민음사의 책이라는 것을 알 정도였다. 박맹호는 그를 재정적으로도 후원했다. 더 많이, 더 넓게 보고 오라고 프랑스로 유학을 보냈다. 박맹호가 주도하여 모금한 유학비로 프랑스에 다녀온 정병규는 한국 최초의 북 디자이너라는 타이틀을 얻었으며 디자인에 대한 인식을 변화 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판매 먼저? 광고 먼저?
민음사에서 책 광고를 본격적으로 하기 전까지 신문이나 잡지에서 책 광고를 찾아보기는 어려웠다. 그리고 당시까지의 통념은 책이 팔리니까 광고를 하는 것이지 먼저 광고를 해서 책 판매를 유도하는 것이 아니었다.
“좋은 책은 언젠가 독자들이 알아줄 것이고 반드시 팔리게 마련이라는 소극적 사고방식으로는 격류를 헤쳐 나갈 수 없었다. 좋은 책을 출판하는 것은 훌륭한 출판사가 되기 위한 필요조건일 뿐이다.”
- 자서전 <책> p119 중에서 -
박맹호는 신문 하단의 5단 통 광고 전체를 할애해서 단행본 한 권을 광고하는 초유의 방식을 선보였다. 그는 광고를 통해 책을 하나의 뉴스로 사건으로 만들고 싶었다. 내용도 이제까지의 과장된 감성문구가 아니었다. 신문사의 서평을 활용하여 책 내용의 핵심을 담은 사실적 언론 기사로 독자에게 다가갔다. 이제는 모든 출판사가 활용하는 그 기법이다. 전면 칼라 광고를 시도한 것은 민음사가 처음이었다. 그는 광고 자체를 하나의 콘텐츠로 보았다.
서점이라는 공간의 확대
민음사가 선도한 단행본 시장은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폭발적으로 성장한다. 붐은 일었지만 거대한 매장을 가진 서점이 없었던 터라 독자들에게 그 많은 책을 효과적으로 선보일 방법이 없었다. 1984년 현재 신간은 3만 74,000종이 쏟아져 나왔지만 평균적인 서점의 매장 규모는 6평으로 많아야 2,500권 보통 1,200권만을 전시할 수 있었다.
일본에는 121개인 200평 이상 서점이 한국에서는 겨우 두 곳이었다. 이런 시기에 교보문고가 부산, 인천, 대전, 광주, 전주, 울산에 넓은 매장의 소점 개장을 선언한다. 동네 빵집 다 죽일 거냐 같은 반응이 이때도 나왔다. 중소 서점들의 모임인 서적상 연합에서는 강하게 반발했다. 대형서점을 지지하는 민음사 책 안 받기 운동까지 벌어졌다.
박맹호는 정면으로 돌파했다. 민음사 역시 연합에 책을 주지 않겠다고 했다. 오기가 아니었다. 서적상 연합이 '영세 서점 필망론(必亡論)’을 들고 나오고 일부 출판인들이 이에 가세 할 때 그는 “그러면 당신들이 펴내는 책들은 어떻게 독자들에게 선보일 거냐”며 소비자 이용 편리론으로 맞섰다. 1년의 공방 끝에 서적상 연합이 손을 들었다. 이미 대세였고 방어논리가 부실했다. 교보문고의 지방 서점들은 자리를 잡아 나갔고 군소서점들은 서로 연합해서 중형 서점들을 개설하기 시작했다.
“1990년대 대중출판시대의 개막은 서점 공간 확대라는 전제가 없었다면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랬다면 지금처럼 우리 출판문화가 국제적 수준에 올라서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내가 서점 공간 확대 운동을 수요회의 중요한 실적 중의 하나로 꼽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 자서전 <책> p150 중에서 -
(* 수요회는 잡지들이 폐간되고 사방에서 표현의 자유가 위축되는 시점에 1970년대 이래 의미 있는 단행본들을 펴내는 출판인들이 결성한 모임이다.)
전문 경영인 시대를 열다
1990년대 초반 한국 문단의 화제작이었던 <경마장 가는 길>은 민음사 주간으로 있던 이영준이 아니었더라면 세상에 나오지 못할 작품이었다. 숱한 공모전 낙방 기록을 가지고 있었고 오늘의 작가상 심사에서도 떨어졌던 작품이다.
그걸 이영준이 가지고 와서 출간하자고 한 것이다. 이영준은 입사 4년 차에 주간으로 발탁된 인물이다. 그전까지 민음사 주간은 황지우, 김원우, 최승호 등 필자 섭외가 유리한 작가들이 돌아가면서 맡는 식이었다. 다른 출판사도 사정은 비슷했다. 박맹호는 생각의 틀을 바꿨다.
“한국 출판이 유년기에서 벗어나 청소년기에 접어듦에 따라 출판사가 더 이상 사장이나 주간의 친소 관계를 근간으로 한 운영으로는 버틸 수 없었다. 좋은 책을 골라서 잘 만들기만 하는 시대를 지나서 어느새 독서 대중에 대한 숨은 욕구를 제대로 파악하고 이를 책으로 실현하는 기획 출판의 시대를 예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출판 관행을 깨고 편집부 직원이었던 이영준을 회사의 얼굴로 선택하는 파격을 통해 나도 모르게 그 시대에 한발 다가갔다.”
- 자서전 <책> p 193 중에서 -
이영준은 1990년 후반까지 민음사의 폭발적인 성장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하일지, 성석제 등을 발굴했다. 신춘문예나 문예지 추천을 거치지 않은 신인을 출판사가 발굴하여 단행본으로까지 끌고 간 것은 당시까지 복거일의 <비명을 찾아서>가 유일했다. <경마장 가는 길>은 수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으며 영화로까지 만들어졌다.
문학 평론가 김윤식은 “60년대는 무진, 70년대는 삼포, 90년대에는 경마장이 있다.” 며 이 소설의 의미를 진단했다(80년대는 왜 비어있을까. 이념의 시대였기 때문이다. 이데올로기에 모든 것이 복속되었고 질 낮은 체험기와 과다한 부채 의식이 문학의 목을 졸랐다. 그 상처는 지금도 낫지 않았다. 리얼리즘이라는 말로 행해진 그 야만의 시대는 지금도 지속 중이다).
이영준을 출발로 민음사는 편집자 중심의 주간 체제로 운영된다. 박맹호는 큰 흐름만 정하고 최종 체크만 한다. 한국 출판의 역사에서 '전문 편집자’ 시대를 연 것이다. 이영준 뒤로 이갑수, 박상순, 장은수가 그 자리를 이어받았다. 장은수는 이영준이 주간일 당시 신입 사원으로 입사했다. 철저한 능력별 선발이었다.
민음사는 이외에도 비룡소로 알려진 어린이 책 출판이나 황금가지라는 브랜치를 통한 판타지 문학에의 도전 및 고전 문학은 그 시대의 감각과 언어로 다시 씌어져야 한다는 논리에 따라 출간된 세계 문학전집 등으로 그 위세를 이어가고 있다. 원칙의 바탕 위에서 혁신이라는 박맹호의 정신은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남정욱 숭실대 문예창작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