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삶은 고단한데 남 탓·사회 탓·나라 탓…사회가 아니라 '개인'
   
▲ 김규태 재산권센터 간사

소설 『가마우지는 왜 바다로 갔을까』…‘아몰랑’ 남 탓의 변주곡

현명하지만 교묘한

이성아 작가의 소설 『가마우지는 왜 바다로 갔을까』는 현명하지만 교묘하다. 안이한 양비론이나 현실을 가리는 이상론이 아니라 개인이 국가와 사회구조에 파묻혀 허우적대는 모습을 정연하게 보여준다. 종북 친북이라는 프레임 문제가 아니다. 소설은 재일동포 북송 사업으로 북한에 들어간 이들의 비극적인 뒷이야기다. 조총련계 재일교포의 선택 등 남도 북도 아닌 이들의 삶, 1990년대 이후의 극심한 기근과 탈북 등 최근 북한 사회의 적나라한 현실을 담담히 펼치기도 한다. 탈북자들에 대한 상세한 취재를 통해 작가는 촘촘하고 설득력 있는 구성을 보인다.

“사회주의가 원래 이렇게 재미없는 거니?”

“아버지, 우리에게는 자랑스러운 우리 조국이 있는데 왜 남의 나라에서 이렇게 온갖 차별과 무시를 당하면서 살아야 해요?”

“안 동무의 말이 맞는지 몰라. 앵무새가 된 것도 꼭두각시가 된 것도, 그때의 나는 그게 필요했기 때문일 거야. 민족이란 것이 나를 안전하게 보호해줄 거라고 생각했던 거지.”

물론 소설은 북한에 대해서만 얘기하지 않는다. 작가는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언급을 작품에서 빠뜨리지 않는다. 친절하게도.

“남한의 독재 시절 질기게 독재반대 투쟁을 하던 사람들이, 밝아도 밟아도 죽지 않는 풀처럼 죽이고 또 죽여도 반대 투쟁하던 사람이 계속 나오던 시절, 사람들은 독재자가 다스리는 나라에서 숨죽이고 이런 노래를 만들었는데, 몰래 녹음한 테이프는 몰래몰래 퍼지고 퍼져서 마침내 일본까지 온 거에요. 그게 아버지 손에까지 들어오고 어린 나까지 그 노래를 들은 거에요. 그런데 지금 남한의 독재자는 암살당했고 이 노래는 정식 음반으로 만들어져서 팔리고 있다고 하더군요.”

작가의 의도

이성아 작가는 『작가의 말』을 통해 어린 시절 북송 교포를 태워가는 일본의 만경봉호 사진을 본 기억을 모티브로 삼아 작품을 썼다고 밝힌다. 작가는 북송 당시 이별과 축제가 교차하는 '괴이함’에 대한 느낌을 갖고, 소설을 통해 그 한 장의 사진에 감추어진 진실을 추구했다.

재미난 것은 작품을 소개하는 언론 기사의 논조다. “재일 조선인을 한 명이라도 더 보내려 한 일본과 이를 체제 선전의 기회로 삼은 북한, 그리고 무책임한 남한 사이에서 뒤흔들린 한 사람의 운명”이라는 언급이 거의 모든 소개 기사에 담겨있다.

   
▲ 이성아 작가의 장편소설 『가마우지는 왜 바다로 갔을까』의 표지. 소설은 안이한 양비론이나 현실을 가리는 이상론이 아니라 개인이 국가와 사회구조에 파묻혀 허우적대는 모습을 정연하게 보여준다./사진=미디어펜

이는 작가의 의도대로다. 작가는 역사의 격랑에는 국민을 볼모로 삼은 국가 권력의 정치 음모와 계략, 분명한 의도가 있었다고 말한다. 가장 밑바닥에서 희생당했으면서 국가로부터 버림받은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국가에 대한 총체적 의문을 던진다.

“그것이 북한의 문제만이 아닌, 지금 여기 우리 남한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질문이라는 것이, 세월호를 통해서 드러나지 않았던가.”

남 탓이면 다인가

이성아 작가는 한 가족의 삶을 끈질기게 응시함으로써 나름의 객관성과 균형감을 갖추었다고 자부한다. 좌우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게 노력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하지만 작품의 의도, 소설의 전체를 관통하는 얼개에서는 남 탓으로 일관한다. “선장 선원들의 무능력과 안전의식 미비로 일어난 해상교통사고가 국가로부터 버림받은 권력의 음모와 계략”이라는 문제의식이니 말 다했다. 작품 속 인물은 북한의 거짓 선전에 속아 넘어갔고 거기에 다른 이들까지 끌고 들어간다. 자신이 북한의 앵무새이자 꼭두각시 역할을 자임한 것도 민족이란 것이 본인을 안전히 보호해줄 거라고 생각했음에 기인하지만, 결론은 남 탓(?)이다.

자유는 책임이고 책임 없는 자유는 방종이다. 선택의 자유는 개인의 책임으로 귀결된다. 작가는 작품 인터뷰를 통해 “이들이 유토피아로 선택했던 곳은 다름 아닌 북한이었다. 당시 남한에서는 제주 4.3 사건이 벌어지면서 밀항을 통해 일본으로 건너가는 이들이 많았을 정도로 정치적 상황이 좋지 않았다. 재일교포 사이에서는 남쪽의 정치적 상황이 부정적으로 부풀려졌고, 그와 반대로 북한의 상황은 과도하게 미화돼서 알려졌다”고 말하기도 했다.

   
▲ 이성아 작가의 장편소설 『가마우지는 왜 바다로 갔을까』. 346p. 이성아 작가는 소설에서 친북 종북의 틀을 벗어나지만 개인 선택을 남의 책임으로 돌리는 일을 자청한다./사진=미디어펜

이 대목에서 명백히 국가전복과 무장반란을 꾀했던 '제주 4.3 사건’에 대한 작가의 판단도 의아할 따름이지만, 일본에서 '조선’ 국적을 유지하고 있는 2만 명의 자이니치*에 관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조선 국적을 유지한다는 것은 굉장히 적극적인 결심이자 선택”이라고 언급한 본인의 말과 소설 속 문제의식은 인지부조화를 보인다. 아 다르고 어 다른 이중 잣대다.

소설의 끝은 아래 문장으로 맺는다.

“세상일은 늘 이렇게 한발 늦거나 한발 빠른 건가 봐.”

자기는 멀쩡하고 세상은 야속하다는 생각이 여전하다. 애석하다. 생각과 현실은 다르다. 원래 그런 게 세상이고 삶이다. 이를 두고 남 탓할 필요 없다. 삶은 고단하다. 남 탓 사회 탓 나라 탓을 하기 전에 어떤 길을 선택한 자신을 돌아보라. 사회가 아니라 개인이다. '남 탓’은 포퓰리스트, 미숙한 자아의 전유물이다. 자기방어적인 심리기제다. '약하디 약한 누군가는 선하고 인간적’이라는 언더도그마이기도 하다. 피해의식 콤플렉스다. 이성아 작가는 소설에서 친북 종북의 틀을 벗어나지만 개인 선택을 남의 책임으로 돌리는 일을 자청한다. 사회는 개인 관계망의 총합에 불과하며, 모든 선택의 책임은 개인이라는 진실을 가리운다. /김규태 재산권센터 간사

* 자이니치는 무국적자다. 해외에 마음대로 나가지 못하며 거주민 신분으로 지위가 불안정하다. 투표권도 없다. 다만 본인이 원하면 일본이나 한국으로 얼마든지 국적을 바꿀 수 있다.

 

(이 글은 자유경제원 자유북소리 '도서고발' 게시판에서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