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는 지식이 넘치는 사회이지만, 역설적으로 가치관의 혼돈을 겪고 있는 '지혜의 가뭄' 시대이기도 합니다. 우리 사회가 복잡화 전문화될수록 시공을 초월한 보편타당한 지혜가 더욱 절실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고전에는 역사에 명멸했던 위대한 지성들의 삶의 애환과 번민, 오류와 진보, 철학적 사유가 고스란히 녹아있습니다. 고전은 세상을 보는 우리의 시각을 더 넓고 깊게 만들어 사회의 갈등을 치유하고, 지혜의 가뭄을 해소하여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와 '미디어펜'은 고전 읽는 문화시민이 넘치는 품격 있는 사회를 만드는 밀알이 될 <행복한 고전읽기>를 연재하고자 합니다. [편집자 주]


박경귀의 행복한 고전읽기(107) 영원한 자유인 조르바의 쓰고 달콤한 자유
니코스 카잔차키스(1883~1957) 『그리스인 조르바


 
   
▲ 박경귀 국민대통합위원회 국민통합기획단장
"나는 아무도, 아무것도 믿지 않아요. 오직 조르바만 믿지. …내가 조르바를 믿는 건, 내가 아는 것 중에서 아직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조르바뿐이기 때문이오."

조르바는 원초적 본능과 감성에 충실한 야수 같은 사람이다. 그는 세상의 위선과 종교의 타락을 조롱하며 하느님의 전능을 믿지 않는다. 그는 세속의 선악 개념을 초월하여 본능적 삶에 대한 열정이 지독한 자유인이다.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실존인물 '알렉시스 조르베스쿠'를 만나 함께 했던 실화를 바탕으로 <그리스인 조르바>를 썼다. 따라서 이 소설의 화자인 또 다른 주인공, 즉 조르바가 두목이라고 부르는 '나'는 상당부분 실제의 니코스 카잔차키스일 수 있다. 소설의 무대는 크레타 섬이다. 하지만 실제로 두 사람은 1917년 그리스 펠로폰네소스 반도에서 갈탄광 사업을 위해 사업주와 작업반장으로 만났다. 이 체험이 소설의 생생함을 뒷받침하는 토대다.

1943년 완성된 카잔차키스의 이 소설은 훗날 <미할리스 대장>, <최후의 유혹>과 함께 그리스 정교회와 교황청으로부터 신성모독으로 판정받아 파문을 당하게 한 계기를 제공한 문제작이다. 교황청은 끝내 <최후의 유혹>을 금서로 지정했다. 그런 만큼 이 소설엔 신과 인간의 관계, 육체와 영혼, 선과 악, 자유와 속박,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남자와 여자의 관계의 대척점에서 필연적으로 빚어지는 갈등과 고뇌가 가득 담겼다. 

조르바의 캐릭터는 단순하면서도 강렬하다. 그의 성격은 그의 거친 삶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하지만 반대로 호방하고 거칠 것 없었던 기질이 규범과 도덕을 개의치 않는 삶의 태도와 방식을 만들어냈는지도 모른다.  

그는 젊은 시절 그리스가 터키의 지배를 받고 있던 19세기 말 반란군에 가담하여 불가리아, 그리고 터키 군대와 맞서 싸웠다. 이 과정에서 그는 인간을 잔혹한 악마로 몰아붙이는 전쟁의 비참함에 대해 고뇌하고, 신에 대해서까지 회의한다.

"터키 놈들의 목을 얼마나 자르고, 터키인들의 귀를 얼마나 술에다 절였는지… 무슨 놈의 미친 지랄을 한 것일까요? ……도대체 무슨 지랄이 도져 우리에게 별로 나쁜 짓도 안 한 놈들을 덮쳐 깨물고 코를 도려내고 귀를 잘라 내고 창자를 후벼 내면서도 전능하신 하느님 저희를 도우소서, 그랬을까?"

조르바에게 갖가지 범죄와 타락, 잔인함이 범람하는 전쟁의 결과로 얻어지는 자유의 의미는 허탈하다. 그는 '자유'를 획득하기 위해 잔혹한 야수가 되어야 했던 인간들의 기만과 위선에 치를 떤다. 나아가 자신이 그 패악의 한 주역이라는 점에 스스로 역겨워한다.   

"이 세상은 수수께끼, 인간이란 야만스러운 짐승에 지나지 않아요. 야수이면서도 신이기도 하지요. 마케도니아에서 나와 함께 온 반란군 상놈 중에 요르가란 놈이 있었습니다. 극형에 처해야 마땅한 진짜 돼지 같은 놈이었답니다. 아 글쎄 이런 놈까지 울지 않겠어요. <왜 우느냐, 요르가 이 개새끼야. 너 같은 돼지새끼가 뭣하러 다 우니?> 내가 물었지요. 
나도 눈물을 마구 흘리고 있었답니다. 그랬더니 이자는 내 목을 안고 애새끼처럼 꺼이꺼이 우는 게 아니겠습니까? 이 개자식은 지갑을 꺼내어 터키 놈들에게서 빼앗은 금화를 주르륵 쏟아 내더니 한 주먹씩 공중으로 던지는 겁니다. 두목 이제 자유라는 게 뭔지 알겠지요?"

   
▲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생전에 쓰던 서재, 이라클리온에 있는 크레타 역사 박물관 ⓒ박경귀

조국과 신의 관념은 조르바의 험난한 인생 역정 속에서 낯설게 재정립된다. 그는 인간 본성을 극단으로 몰아세우는 애국심에서 벗어나 사람과 사람으로 만나는 코스모폴리탄이 된다. 그는 오로지 스스로의 의지에 따라 행위를 선택할 수 있는 인간이 되고자 했다. 

"나는 사람의 멱도 따고 마을에 불도 지르고 강도짓도 하고 강간도 하고 일가족을 몰살하기도 했습니다. 왜요? 불가리아 놈, 터키 놈이기 때문이지요.… 요새 와서는 이 사람은 좋은 사람, 저 사람은 나쁜 놈, 이런 식입니다. 그리스인이든, 불가리아인이든 터키인이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조국 같은 게 있는 한 인간은 짐승, 그것도 앞뒤 헤아릴 줄 모르는 짐승 신세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조르바에게는 조국도 신도 모두가 속박이다. 그에게는 자신의 인생, 자신에게 주어지는 순간순간이 가장 소중한 현실이다. 그는 그저 본성의 추동에 충실할 뿐이다. 그에겐 넘치는 육욕은 신이 내린 유일은 은총이다.

그에게 육체는 영혼과 동일하게 중요하다. 그러니 신성한 욕망을 외면하는 건 남자의 치욕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물론 그의 마초적 여성관은 현대의 페미니스트들을 분노하게 할 것 같다. 분명 조르바의 여성관은 오늘날의 현실과 우리의 통념에서 크게 벗어나있다. 

"여자를 보는 남자는 모두가 여자를 갖고 싶다고 말해야 합니다. 여자란 가엾게도 그걸 원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남자라면 여자에게 그렇게 말하고, 여자를 기쁘게 해줘야 하는 겁니다."

"여자도 우리 같은 사람입니다. 품질이 좀 떨어질 뿐이지요. 여자란 지갑을 보면 돌아 버립니다. 착 달라붙어 자유고 뭐고, 에라 모르겠다. 모조리 남자에게 주어 버립니다."

그는 크레타 섬에서 만난 카바레 퇴물 가수 부불리나를 '화냥년'이라고 말하면서도 불타는 욕망을 그녀에게 거침없이 쏟는다. 그는 여자를 달뜨게 하는 재주를 가졌고, 섹스는 그의 생존의 증명이자 환희다. 두목 역시 마음속에 마을 과부에 대한 육체적 욕망이 일렁이지만, 자신의 심사만 괴롭힐 뿐 겉으로 표현하지 못한다. 그는 고백한다.

"나는 주문을 거듭하여 내 마음속에 들어앉은 비에 젖은 여인의 형상을 몰아내려고 했다. 여인의 육체는 밤이면 밤마다 엉덩이를 실룩거리며 내 눈앞을 지나가곤 했다." 

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고작 자신의 욕망을 책망하며 억압하기 위해 불경을 베껴 쓰는 일이다. 욕망을 가두지 않고 분출하는 조르바와는 역행의 반응이다. 그런 두목의 숨은 욕망의 불길을 조르바는 끈질기게 부채질한다. 

"하느님은 당신이 천사장 가브리엘처럼 과부 집에 가는 걸 더 좋아하실 겁니다. 잘 들어요, 하느님이 당신 같았더라면 마리아를 찾아가지도 않았을 테고, 그랬더라면 그리스도는 태어나지도 못했을 거요. 그럼 하느님이 어떻게 하셨느냐고 물으신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겁니다. 하느님은 마리아에게 가셨다, 마리아는 과부다, 어때요?"

조르바에게 육신의 즐거움은 영혼의 즐거움이다.

"그렇다. 바다, 여자, 술, 그리고 힘든 노동! 일과 술과 사랑에 자신을 던져 넣고, 하느님과 악마를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그는 세이렌의 달콤한 유혹에 맞서지 않는다. 부불리나의 과거 화려했던 창부의 기억조차 그에게는 경멸의 대상이 아니다. 측은지심과 욕망이 한 데 얽혀 순정을 쏟는다. 조르바가 여성에 대해 느끼는 그 거친 달관의 즐거움이 마침내 과부를 찾은 두목에게도 찾아든다. 결국 욕망의 부채질에 밀려 스스로 그 과부를 찾아간 것이다. 

"내 존재의 심연에서 전날 밤에 느낀 즐거움이 솟아올라 필경은 흙으로 빚어졌을 내 육체라는 대지에 물을 대어주는 것 같았다.…그날 밤 나는 생전 처음으로 영혼이 곧 육체, 다소 변화무쌍하고 투명하고 더 자유롭긴 하지만 역시 육체라는 것을 깨달았다."

결국 카잔차키스는 육체적 욕망에 허물어질 수밖에 없는 인간의 나약함 또는 육체와 영혼의 이분법에 갇혀 자유로운 인간의 본성을 억압하는 지식인의 허위의식을 들추어내려 한 것은 아닐까? 

   
▲ 카잔차키스의 무덤, 크레타 섬 이라클리온 시내를 둘러싼 성채의 한 보루 위에 설치되었다. 성 안도 아니고 성 밖도 아닌 경계 위에 안치된 그의 무덤이 평생 주류 사회에 편입되지 못하고 경계인으로 산 카잔차키스의 삶을 상징하는 듯 느껴진다. 필자는 2014년 2월에 이곳을 방문했다. ⓒ박경귀

조르바의 여성 편력은 자유롭고 당당하다. 하지만 그의 삶을 지탱해 줄 수 있었던 게 단지 여성과의 육체적 사랑 뿐만은 아니었다. 육체적 욕망에 자신을 내맡기는 것도 매순간, 매사에 몰입하는 삶의 한 방식일 뿐이다. 키스할 때는 키스에, 일할 때는 일에 온전하게 매진한다. 일에 대한 철저한 몰입이 자신의 존재가치를 만들어준다.

"새 길을 닦으려면 새 계획을 세워야지요. 나는 어제 일어난 일은 생각 안 합니다. 내일 일어난 일을 자문하지도 않아요. 내게 중요한 것은 오늘, 이 순간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일을 어정쩡하게 하면 끝장나는 겁니다. 말도 어정쩡하게 하고, 선행도 어정쩡하게 하는 것, 세상이 이 모양 이 꼴이 된 건 다 그 어정쩡한 것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악마 대장보다 반거충이 악마를 더 미워하십니다!"

"나는 일에 몸을 빼앗기면, 머리꼭지부터 발끝까지가 잔뜩 긴장하여 이게 돌이 되고 석탄이 되고 산투르가 되어 버린단 말입니다."

이런 철저한 몰입이 일자무식인 그가 세상을 떠돌며 생존할 수 있는 조건이 된다. 그의 자유는 자신이 선택한 순간의 소명을 다하는 과정에서 확보된다. 그에게 선과 악은 선택의 고려조건이 아니다. 감정의 흐름에 몸을 내맡기는 조르바의 찰나주의는 비판의 여지가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을 무엇 하나 제대로 해내지 못하면서 자신의 욕구와 소망의 충족만을 바라는 현대인의 얄팍한 삶의 태도에 대한 질타로도 읽힌다. 

조르바는 갈탄광 사업을 끝내 파탄내지만, 두목은 그에게서 받은 무한한 영혼의 자극으로 인생의 광맥을 대신 찾았다. 동네 사람들에게 억울하게 살해당하려는 과부를 구하기 위해 무모하게 뛰어드는 조르바, 수도원의 타락상에 고뇌하는 수도승에게 수도원을 불사르도록 사주하는 조르바, 죽어가는 부불리나에게 뜨거운 눈물을 보여주는 순정의 조르바, 그는 위선과 기만에 찌든 세상과 종교에 대해 분노하고 항거하면서도, 화려했던 추억으로나마 힘겨운 삶을 자위하는 늙은 창부에게만큼은 뜨거운 연민을 보여주었다. 

주인공 두목이 이런 조르바에게 빠져들지 않을 도리가 없다. 두목 역시 "신도 없고 악마도 없고 오직 자유로운 인간만 있는 수도원"을 짓고 싶었다. 세상의 부조리에 번민하면서도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하는 자신의 무력함에 대한 회의와 부끄러움이 컸기 때문이다. 두목은 자신의 삶이 대부분의 책상물림과 같이 "미적지근하고 모순과 주저로 점철된 몽롱한 반생이었다"고 자탄한다.  

조르바는 "살아있는 가슴과 커다랗고 푸짐한 언어를 쏟아내는 입과 위대한 야성의 영혼을 가진 사나이, 이직 모태(母胎)인 대지에서 탯줄이 떨어지지 않은 사나이였다." 그는 "교육받은 사람들의 이성보다 더 깊고 더 자신만만한 그의 긍지에 찬 태도"를 보여주었다. 조르바는 "우리들이라면 고통스럽게 몇 년을 걸려 얻을 것을 그는 단숨에 그 정신의 높이에 닿을 수 있었다." 두목이 '조르바는 위대한 인간'이라고 말하는 이유다. 

조르바는 인생의 달관자인가 아니면 궤변론자인가? 조르바는 진정한 자유인일까? 조르바에게 여러 의문이 끊임없이 따른다. 그는 호기 넘치는 대장부로 보인다. 하지만 숙명적으로 잔혹할 수밖에 없는 전쟁의 비극적 상황을 견디어 내지 못한 도피자는 아닐까? '자유'를 잃은 그리스에서 자신이 '자유'를 누릴 공간마저 함께 소멸된다는 것을 알지 못한 것은 아닐까? 

오로지 자기 자신의 삶으로만 울타리를 한정하고 자신만의 동물적 본능을 충족시키기 위해 다른 모든 것을 외면한 또 다른 의미의 갇힌 자유인은 아니었을까? 카잔차키스가 이러한 조르바에게서 자유인의 모습을 발견하려한 것 자체가 그가 불교적 체념에 빠져있었던 때문은 아닐까? 조르바의 삶의 태도가 국가 부도의 위기에 내몰리고 있는 오늘날의 그리스인들에게 잔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만약 조르바의 삶이 누군가가 선망하는 자유로운 모습이라고 해도, 현실적으로 조르바형 자유인이 되는 일은 쉽지 않다. 그의 일탈을 따라가기도 어렵고 그의 의분을 실행하기는 더욱 힘들다. 자신과 가족, 사회의 인연과 규범, 제도, 인습으로부터 우리는 자유로울 수 없다. 조르바는 감성적 인간, 주인공 두목은 이성적 인간의 전형이다. 우리는 언제나 앞뒤 재지 않고 돌진하는 조르바형 감성적인 인간을 질타하거나 경멸할 수 있지만, 주인공 두목과 같이 본성을 억압하면서 번민하는 연약한 인간형 또한 따르고 싶은 유형은 아니다.  

카잔차키스도 조르바 못지않게 실제 삶 속에서 모든 것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를 갈구했다. 맹렬하게 소설을 쓰기도 했고, 사회주의 사상에 빠져 사회당의 지도자로 정치활동에 나서기도 했다. 또 부처의 가르침을 통해 모든 것을 비우는 '순수한 영혼'이 되고자 분투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지난한 몸부림에도 불구하고 카잔차키스는 온전한 자신만의 '자유'를 찾지는 못했다.  

자유는 어떻게 얻어질 수 있을까? 우리가 욕망하는 이상이 달성되면 자유로울까? 우리를 옥죄는 모든 의무와 규범, 욕망과 위선을 던져 버리면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우리를 얽매는 유형무형의 사슬에 아예 자신을 성화(聖化)시켜 기꺼이 묶이면 자유를 만끽할 수 있을까? 모든 인식과 행동을 종교의 기준에 맞추고 신에게 간구하면 모든 장애와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그리스인 조르바>의 주인공 '나'의 번뇌는 우리들에게도 그대로 진행형이다. 
 
"다른 정열, 보다 고상한 정열에 사로잡히기 위해 쏟아 왔던 정열을 버리는 것, 그러나 그것 역시 노예근성이 아닐까? 이상이나 종족이나 하느님을 위해 자기를 희생시키는 것은? 따르는 전형이 고상하면 고상할수록 우리가 묶이는 노예의 사슬이 길어지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우리는 더 넓은 경기장에서 찧고 까불다가 그 사슬을 벗어나 보지도 못하고 죽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가 자유라고 부르는 건 무엇일까?"  /박경귀 대통령소속 국민대통합위원회 국민통합기획단장·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 ☞ 추천도서: 『그리스인 조르바』,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이윤기 옮김, 열린책들(2013, 31쇄), 480쪽.
[박경귀]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