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불바다 등 연일 공세…전쟁은 학습효과 아닌 '예측불허'
   
▲ 김효진 남북경제연구소 기획연구실장·박사
북한의 대남비방은 조금도 새롭지 않다. 북한의 대남 비방 메시지에는 크게 두 가지 주장이 담겼다. '반통일 세력'과 '괴뢰도당'. 백두혈통이라는 유일무이한 민족 정통성(?)을 지닌 입장에서 볼 때 남한의 권력은 '반통일 세력'이자 미 제국주의의 앞잡이에 불과하다는 거다.

여기엔 나름의 특징이 있으니 비난과 더불어 교묘한 대남선동을 꼭 끼워 넣는다는 것이다. 고강도 대남협박과 반정부 투쟁선동은 동전의 앞뒤와도 같다. 한번 비난의 강도가 높아지면 '금도(襟度)'를 넘는 건 일쑤다.

김대중-노무현 대통령으로 이어지던 좌파정권 10년 동안엔 일정한 패턴이 있었다. '대남도발→위기조성→화해모드→타협→보상'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대남전략으로 경제적 이득을 취하고, 남한 내 친북세력은 공고히 하며 남북관계에서 주도권을 확보하는 정치적 이익까지 챙기는 일거양득의 전략전술을 성공적으로 구사하였다. 그 후 우파정부가 들어선 이후엔 이런 대남 이익 확보 방정식이 깨지게 된다. 5.24조치는 그 절정이었다. 4차 핵실험으로 인한 대북제재는 사상 최고수준이다.

최근 북한의 대남 비방은 이례적일만큼 구체적이고 무자비하다. 정녕 전쟁을 하자는 것인가? '서울 불바다 발언'이 처음 나온 것은 1994년 3월의 일이었다. 1차 핵 위기가 시작되고 1년이 지나는 시점, 김일성-김영삼 회담 교섭을 위해 남북 특사교환에 관한 판문점 실무접촉 중 북한 대표(당시 박영수 조평통 부국장, 2003년 사망)가 직접 언급했던 사건이었다. 불과 3년 전 3차 핵실험(2013년 2월 12일) 후에는 그 해 3월부터 여름까지 서해 5도와 서울은 물론, 워싱턴까지 불바다로 만들겠다며 협박의 수위를 한없이 높여간 바 있다.

   
▲ 안보불감증. 천안함, 연평도 사태까지 겪으며 역설적이게도 국민이 담대해졌거나 진짜 안보불감증이 만연화됐거나, 이 둘이 혼합된 상태다. 사진은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25일 오전 국립대전현충원에서 열린 제1회 서해수호의 날 기념식에 참석하여 유가족과 대화하고 있다. /사진=청와대 홈페이지

그런데 4차 핵 실험을 마친 2016년 봄, 북한의 대남 협박은 더 이상 높아질 수 없는 최상급에 이르렀다. 단지 경제제재에 대한 반발로 해석하기엔 지나치다 못해 비전략적으로 보일 정도이다. 거꾸로 보면 북한정권의 절박함이 심각하다는 방증일 수 있다.

북한군 최고 사령부 중대성명의 형식으로 청와대를 1차 타깃으로 삼아 박대통령의 제거까지 구체적으로 언급하며 유엔 안보리 공식문건으로 배포했다는 것은 남한뿐 아니라 전세계를 향해 북한의 생존 몸부림을 절박하게 표현한 것이다. 그 이면엔 전쟁도 불사한다는 각오가 이서(裏書)돼 있다.

한반도는 전쟁이라는 극단적 폭력의 이미지가 현실적으로 어른거리는 공간이다. '달라도 너무 다른'  적대적 두 체제가 150km를 경계로 마주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전쟁의 잠재적 가능성이 상시화 돼 있다는 걸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전쟁 자체를 이해하는 일'과 '전쟁을 없애기 위해 가능한 방법을 모색하는 일'은 구분돼야 한다. 동양에 손자병법의 저자, 손자가 있다면 서양에는 전쟁론의 원조, 클라우제비츠가 있다.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전략이라는 동양적 전쟁론에 비해 '전쟁은 정치(정책)의 연장'이라는 것이 클라우제비츠 전쟁론의 핵심이다. 아리스토텔레스마저 '전쟁은 평화를 보전하기 위한 수단 외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했을 만큼 전쟁에 대한 이해는 인류문명사와 궤적을 같이 한다.

북한의 핵개발과 미사일 발사로 고조된 위기가 극적 국면을 거쳐 안정화로 들어설지, 통제할 수 없는 전쟁을 야기하는 국지적 무력충돌로 이어질지는 누구도 쉽게 단언할 수 없다. 물론 서구의 전쟁이론이 한반도의 시공간적 맥락에 어떤 설명력과 적실성이 있을지는 별개의 문제이다. 전쟁의 개연성과 전쟁의 원인을 구별하지 못하면 자칫 섣부른 오판에 이르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오랜 전쟁 연구는 바로 이 점에 주목, 개인과 사회 차원의 요인 뿐 아니라 갈등, 대립관계에 있는 체제의 구조적인 원인을 발견, 전쟁을 국가들 간 관계의 산물로 보는 차원으로까지 나아갔다. 이제 세 번째 서울 불바다론이 등장했다. 또한 가장 구체적이고 위협적이다. 20년전 북한의 노동당 실무 대표급 한마디에 서울은 사재기로 들썩였고 정부는 안심하라며 동요하는 시민들을 안정시키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아이러니한 것은 지금은 서울 시민 누구도 라면 사재기는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20년 전엔 침묵하던 군이 이제는 '원점 타격론'을 넘어 '선제 타격론'까지 들고 나올 만큼 적극적인 언어 대응을 하고 있다. 그 때와 지금은 무엇이, 어떻게 달라진 걸까? 대략 네 가지 요인이 섞여있다고 본다.

   
▲ 세 번째 맞이하는 서울 불바다, 아니 청와대 타격론은 지금껏 자행돼 온 어떤 대남 위협보다 가장 위협적이고 임박한 듯 비친다. 전쟁의 개연성과 전쟁의 원인을 구별하지 못하면 자칫 섣부른 오판에 이르기 십상이다. /사진=연합뉴스

첫째, 절박함. 천안함과 연평도에서 무대응했던 국군으로선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다는 절박감과 현실화된 핵 위협이 강경발언의 배경이 된다. 선제 타격론이란, 달리 말하면 상대를 초토화시키겠다는 분노의 결연한 표현인 동시에 우리도 더 이상은 참을 수 없고, 그렇게 되면 '판'이 커질 테니 제발 가만히 있으라는 간절함의 다른 표현인지 모른다.

북한도 마찬가지다. 20년 전엔 노동당 간부의 한마디만으로도 서울시민이 동요했으나 이젠 북한군 최고지휘부와 김정은 본인이 나서도 심리적으로 별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있으니 '약발'이 사라진 것에 당황스러울 법도 하다.

둘째, 안보불감증. 천안함, 연평도 사태까지 겪으며 역설적이게도 국민이 담대해졌거나 진짜 안보불감증이 만연화됐거나, 이 둘이 혼합된 상태다. 전쟁 나면 북한은 진짜 망할 텐데, 자기가 죽으려고 전쟁을 일으킬 바보가 있겠는가란 인식이 보편화됐다. 안보문제가 소수 전문가들의 영역이 아니라 축구경기처럼 모든 사람에게 익숙한 주제가 돼버린 탓이다.

셋째, 반쯤은 무기력한 체념. 현 상황은 한국이 뭔가를 해서 직접적인 어떤 변화를 이끌어 낼만한 구조가 애초부터 아니라는 인식이 저변에 깔렸다. 개성공단 중단 등 강력한 조치는 적극적으로 뭔가를 표명할 수 있는 마지막 카드였고 그걸 이제 써버린 상태다. 그간의 축적된 경험치에서 비롯된 체념은 안보불감증이란 대중적 멘탈리티와 밀착돼 있다. 선택적 친화력이 있는 두 개념의 결합이 비이성적인 담대함과 무심함을 가속시킨 근본원인으로 작동한다.

넷째, 성숙된 시민의식. 안보불감증과 체념만 있는 게 아니라 20년 전과는 판이한 성숙해진 시민의식이 이면에서 같이 자라났다. 성숙한 시민의식이란 다름아닌 현실에 대한 냉정한 이해와 진단이 가능해졌다는 의미이다. 이는 현대전이 전장에서 부딪히는 보병전이 아니라 첨단 기술력에 의한 장비싸움이란 걸 간파한 결과다. 미국이 주도한 숱한 전쟁보도를 통한 학습이 한 몫 했음 직 하다. 동시에 미사일을 피해 숨을만한 곳이 남한에는 없다는 이해는 체념으로 이어진다.

북한의 핵과 탄도미사일이 현실화됐다는 것은 더 이상 재래식 무기의 총량이 전투력의 크기를 보여주는 척도의 기능을 상실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핵에는 핵으로 맞서야 상대가 핵을 사용하지 못한다는 것이 핵 억지론의 근본철학이다. 미-소 대립기 '냉전'은 바로 억지에 의해 조성된 핵전쟁 부재의 의도하지 못한 평화였다.

'그(북한)는 말썽꾸러기이다(He is a troublemaker)'라는 것과 '그(북한)가 말썽을 부린다(He makes a trouble)'는 것의 차이는 개념적으로 구별돼야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냉정한 판단을 유지할 수 있다. 세 번째 맞이하는 서울 불바다, 아니 청와대 타격론은 지금껏 자행돼 온 어떤 대남 위협보다 가장 위협적이고 임박한 듯 비친다. 북한이 이 국면에서 그런 도박을 감행하리라고는 상식적으로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지만 말이다.

그러나 만의 하나, 유사한 실제 위협 도발이 촉발됐을 때 과연 한국은 선제타격은 고사하고 무력 대응할 결연하고 분명한 의지는 있을까? 이 점을 먼저 북한과 국민에게 충분히 납득시켜야 대남 도발의 개연성을 조금이라도 줄이는 일이 될 터이다.

다양한 한미연합 훈련으로 이 점을 각인시키고자 애쓰는 것일까? 그런데 적어도 대북 효과는 가시적으로 관찰할 수 없으니 군 지도부의 고민은 계속 될 거 같다.  /김효진 남북경제연구소 기획연구실장·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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