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고기완 한국경제신문 경제교육연구소 연구위원 |
양날개 비판: 중도는 짬뽕이다
중도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민경국 강원대 명예교수는 “짬뽕이다”라고 답했다. 그의 저서 ‘자유주의의 지혜’에 정말 이렇게 나온다. 오래 전 이 대목을 읽다가 입에 머금었던 커피를 뿜은 적이 있다.
중도는 절충주의
결론부터 말하면, 중도는 절충주의다. 이념의 짬뽕이다. 자유주의, 보수주의, 사회주의를 꼭지점으로 한 이념의 삼각형이 있다고 하자. 중도는 아마도 삼각형 내부 중앙에 그릴 수 있는 작은 원일 수 있다. 시각적으로는 자유주의, 보수주의, 사회주의 요소의 장점만 취한 것처럼 보인다. 물론 착시다.
우리는 중도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비루하게 행동하는 것을 자주 목격한다. 민경국 교수는 이렇게 엄중히 꾸짖는다. “중도주의자는 호주머니에 서로 다른 이념을 넣고 다니면서 필요한 때마다 꺼내 쓴다.” 사회주의가 고개를 들면 계획경제와 공짜복지(국가에 의한 강제 선행)를 부르짖고, 자유주의가 지배하면 사회주의의 종말을 운운하는 것이 중도의 속성이다. 그래서 중도는 기회주의와 상대주의일 수 밖에 없다. 지금 대한민국의 이념 상황이 이렇다.
조화와 타협이라는 꽃
중도주의자가 먹히는 이유는 다원주의와 관용의 대변자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다원주의는 서로 다름을 인정하는 선진문화의 덕목이고, 관용은 정치적으로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도 적대시해선 안 된다는 심성이기 때문에 중도야말로 착하다는 것이다. 어느 한 쪽이 완승하기보다 조화와 타협으로 다양성과 상대성을 확보하는 것은 아름답다는 해석은 그럴 듯하다.
하지만 이것은 자유주의의 핵심인 다원주의와 관용을 잘못 사용한 경우에 해당된다. 원래 다원주의와 관용은 자유주의의 핵심이다. 오랜 노력과 투쟁을 통해서 자유주의는 다원주의와 관용을 쟁취해냈다. 우리가 흔히 종교, 사상, 양심, 언론 자유라고 말하는 것도 다원주의와 관용의 표현들이다.
|
|
|
▲ 정치세계에서 중도의 다원주의는 매우 인기영합적이다. 집단과 조직들이 난무하고, 이들은 다양성의 무제한 허용을 요구한다. 이렇게 되면 특정 집단과 조직이 다원주의를 빌미로 기승하게 된다./자료사진=연합뉴스 |
좌파적 다원주의와 관용
자유주의에서 말하는 다원주의와 관용은 중도가 적용하는 그것들과 어떻게 다른가? 중도의 다원주의는 정치적 다원주의다. 정치적 다원주의는 정치적 타협을 통해 자유와 재산권을 침해하는 정책과 입법으로 구현된다. 절충주의의 결론은 자유주주의가 경계하는 반(反)자유주의 노선의 심화다. 정치적 다원주의와 관용은 자주 국가가 강제적으로 시혜하려는 선행(?)으로 나타난다. 대표적인 것이 골목상권 보호, 동네빵집 보호, 재래시장 보호, 대형마트 영업시간 규제, 동반성장, 공짜 복지, 균형발전 같은 것들이다.
이런 다원주의는 좌파들이 좋아한다. 정치세계에서 이런 다원주의는 매우 인기영합적이다. 집단과 조직들이 난무하고, 이들은 다양성의 무제한 허용을 요구한다. 이렇게 되면 특정 집단과 조직이 다원주의를 빌미로 기승하게 된다. 겉으로는 경쟁이 작용하는 듯 하지만 사실 소수의 폭력과 이익집단의 압력이 커져 경제적 번영을 막는 결과로 이어진다.
진짜 다원주의는 사적 다원주의
자유주의에게 이런 정치적 다원주의나 관용은 작동하지 않는다. 민경국 교수는 “자유주의와 양립하는 다원주의는 정치세계가 아니라 사적 세계에서나 가능하다”고 지적한다. 개인들이 서로 다른 생각과 다양한 목적을 추구하게 하는 것이 다원주의이며 관용이라는 의미다. 특정 단체가 다른 단체의 목표를 짓눌러 포기하게 만드는 낭만적 다원주의는 자유의 핵심 가치와 동떨어져 있다.
맨슈어 올슨은 이런 낭만적 다원주의를 크게 비난했다. 정치적 다원주의 아래에서는 소수의 폭정, 경제침체, 편파성, 보호무역주의가 판 칠 것이라고 올슨은 걱정했다. 소비자의 선택이 포기된 재래시장을 강요하는 것은 불관용이다. 원하지 않는 것을 원하도록 강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거듭 강조하지만, 자유세계의 다원주의와 관용은 국가와 정부의 간섭을 최소화 상태에서 개인들이 자유롭게 선택하고 경쟁하고 책임지게 하기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특히 다양성과 관용은 경쟁을 자극한다. 경쟁을 통해 나쁜 것을 골라냈을 때 다양성과 관용의 시각으로 보지 않으면 약육강식, 빈익빈 부익부 같은 시기심이 발호하게 된다. 국가와 정부, 우리 모두는 ‘구조적으로 무지한’ 지식 상태에 있다. 다원주의와 관용은 지식 문제를 가진 우리를 보호한다.
중도는 절충주의요 기회주의다. 자유주의와 사회주의의 적당한 타협과 조합은, 우리가 수 없이 목도했듯이, 경제성장과 문명진화를 갉아 먹는다. 중도는 앞서 얘기했듯이 자유주의가 힘겹게 성취한 다원주의와 관용을 이용한다. 좌파의 다원주의와 관용은 자유의 다원주의와 관용의 적이다. 관용을 죽이려는 관용을 용인하는 것은 관용이 아니다. 다원주의와 관용에서 보았듯이, ‘새는 왼쪽 날개와 오른쪽 날개로 난다’는 따위의 주장은 기회주의자들의 논법이며 짬뽕이다. /고기완 한국경제신문 경제교육연구소 연구위원
|
|
|
▲ 정치적 다원주의는 정치적 타협을 통해 자유와 재산권을 침해하는 정책과 입법으로 구현된다./자료사진=연합뉴스 |
(이 글은 자유경제원 '세상일침' 게시판에서 볼 수 있습니다.)
[고기완]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