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펜=이상일 기자] 한화가 대우조선해양 인수를 추진하면서 산업은행과 양해각서를 맺고 3000억원대 이행보증금을 내걸었다가 계약이 무산돼 보증금 반환을 둘러싸고 7년을 끌어온 법적 공방이 당분간 이어지게 됐다.
대법원은 산업은행이 돌려줄 필요가 없다고 원심이 판단한 내용을 깨고 한화가 낸 보증금 일부를 돌려주라고 판단했다.
대법원 2부(주심 김창석 대법관)는 14일 한화케미칼이 한국산업은행과 한국자산관리공사를 상대로 "과거 지급했던 이행보증금을 돌려달라"며 낸 이행보증금 반환 청구소송 상고심에서 원고 패소로 판결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재판부는 "양해각서에서 이행보증금 몰취 조항을 두게 된 주된 목적이 최종 계약의 체결이라는 채무이행을 확보하려는 데 있었다고 하더라도 3150억원에 이르는 이행보증금 전액을 몰취하는 것은 부당하게 과다하다"라고 판단했다.
이어 "(이행보증금 전액을 몰취해도 된다는) 원심 판단에는 손해배상액의 예정 및 손해배상 예정액 감액에 관한 법리를 오해해 판결에 영향을 미친 잘못이 있다"고 지적했다.
한화는 2008년 산업은행이 보유한 대우조선해양 주식 9639만주를 6조3002억원에 사들이기로 하고 이행보증금 3천150억원을 우선 지급했다.
그해 12월 29일까지 최종계약을 하기로 하고 위반할 경우 이행보증금을 산업은행이 갖는다는 내용의 양해각서도 체결했다.
하지만 서브프라임 사태 등으로 경제 여건이 급변하면서 한화가 최종 계약을 미루다 2009년 6월18일 계약을 체결하지 않겠다고 통지했다. 산업은행은 양해각서에 따라 한화가 지급한 보증금을 돌려주지 않았다.
이에 한화는 "산업은행의 비협조와 대우조선해양 노조의 반대로 대우조선해양을 확인실사 할 수 없었고, 서브프라임 사태로 국내 금융시스템이 마비돼 자금조달이 불가능하게 됐다"며 소송을 냈다.
한화 측은 "대우조선해양 인수 확정 후 확인실사를 하지 못한 상황에서 최종 계약 체결 전에 검토가 필요했던 최소한의 자료도 제공받지 못했다"며 "당시 금융위기로 인해 자금 조달비용이 늘어난 것은 맞지만 조달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고, 자금 문제가 최종 계약 무산의 원인은 아니다"고 주장했다.
1, 2심은 "산업은행이 노조의 확인실사 저지를 해소할 의무 이행을 게을리했다고 볼 수 없고, 단순한 경제상황 변동으로 국내 금융시스템이 마비됐다고 볼 수도 없다"며 한화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지만 대법원이 하급심과 달리 3천억이 넘는 거액의 이행보증금 전액을 산은이 가져가는 것은 과하다고 판단함에 따라 한화는 보증금 일부를 돌려받을 길이 생겼다. 구체적인 반환 범위와 액수는 고법 심리를 통해 결정될 전망이다.
이번 판결로 산은은 당혹스러워하는 한편 일부를 돌려받을 수 있게 된 한화는 판결을 반기고 있다.
이 사건의 발단은 산업은행이 대우조선해양을 매각하기로 한 200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출자전환을 거쳐 대우조선의 최대주주가 된 산업은행은 경영이 정상화된 대우조선의 주가가 6만5000원까지 오르자 공적자금 회수를 극대화할 기회로 보고 공개경쟁입찰로 매각에 나섰다.
"매각대금을 적기에 회수하고, 회사의 장기 발전에 기여할 책임 있는 경영 주체에 경영권을 이전하겠다"는 게 명분이었다.
그해 10월 한화와 포스코, GS, 현대중공업이 참여해 4파전 구도로 치러진 매각 입찰에서 한화는 우선협상대상자로 지목됐다.
6조3002억 원이라는 가장 높은 인수가를 제시한 게 결정적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한화는 대우조선을 그룹의 신성장동력으로 삼겠다며 인수전에 뛰어들었다.
11월 산은과 한화 측은 연말까지 최종 매매계약을 맺고 이듬해 3월 전 잔금을 납부한다는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하지만 때마침 닥친 글로벌 금융위기의 거센 파고로 자금 조달이 어려움을 겪고, 대우조선 노조의 거제 옥포조선소에 대한 확인 실사 거부로 실사가 이뤄지지 못하면서 이듬해 1월 대우조선 매각은 결국 무산됐다.
당초 전년 연말까지였던 본계약 시한이 이미 한 달 연기된 다음이었다. 이 과정에서 한화는 본계약 체결 연기, 분할 납부 등으로 사실상 대금 납부를 연기해달라고 여러 번 요구했다.
매각이 무산되면서 산은은 한화가 MOU 체결 때 납부한 이행보증금 3천150억 원을 돌려주지 않았다.
한화는 2009년 6월 법원에 이행보증금을 돌려달라는 조정 신청을 냈다. 예측할 수 없는 전대미문의 금융위기가 닥친 데다 인수의 필수 절차인 실사를 대우조선 노조의 저지로 하지 못해 인수가 중단된 만큼 일부를 돌려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조정 심리에서 산은과 한화가 합의점을 찾지 못하면서 이 사안은 결국 민사소송으로 넘어갔고, 1심(2011년)과 2심(2012년) 법원은 모두 원고(한화) 패소란 판결을 내렸다.
통상 법률심이 이뤄지는 대법원에서도 비슷한 결론이 날 것으로 예상했지만 이날 대법원은 "3150억 원에 이르는 이행보증금 전액을 몰취하는 것은 부당하게 과다하다"며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고법의 심리 결과에 따라 한화가 이행보증금을 돌려받을 길이 열린 것이다.
대법원의 이런 판단에는 최근 대우조선이 천문학적 규모의 분식회계를 해왔다는 사실이 드러난 점도 일부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지난해에만 5조원이 넘는 적자를 기록한 대우조선에 대한 감사원 감사 결과 2013∼2014년에 영업이익 기준으로 1조5342억원의 분식회계 정황이 포착됐다.
여기에 검찰 부패범죄특별수사단이 나서면서 대우조선의 분식회계 의혹에 대한 수사는 점점 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고 있다.
검찰은 2006∼2012년 재임한 남상태 전 사장 시절에도 대학동창 등에게 일감을 몰아주고 이득을 취하는 등 경영 비리가 있었을 것으로 보고 수사를 진행하고 있다.
이 수사에서 혐의가 입증된다면 2008년 인수전에 대한 판단도 달라질 수 있다. 한화 주장대로 실사를 제대로 했다면 분식회계가 확인되며 매각이 무산됐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결국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내진 소송전의 최종 판단은 검찰의 수사 결과에 따라 달라질 것으로 보인다.
[미디어펜=이상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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