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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시아의 물개' 조오련씨가 지난 2009년 8월4일 오전 전남 해남군 계곡면 법곡리 자택 현관에서 심장마비로 쓰러져 해남종합병원으로 옮겨져 심폐소생술을 받았으나 끝내 사망했다. 사진은 지난 1월 제주도 서귀포시에서 열린 겨울바다 펭귄수영대회에 참가할 당시의 모습./연합뉴스 |
[미디어펜=김재현 기자] 1980년 8월 11일 오후 조오련이 대한해협의 거친 파도를 가르며 일본 대마도 북서지역에 위치한 등대에 안착했다.
부산 다대포 방파제를 떠난 지 13시간16분만의 일이다. 당시 조오련의 나이는 29세였다. 조오련은 아시아 수영계의 슈퍼스타였다.
그는 1969년 전국체전 서울예선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알린 후 선수생활 동앝 한국 신기록을 50회나 깨뜨렸다. 1970년 방콕 아시안 게임에서는 자유형 400m와 1500m 경기에서 아시아 신기록을 세웠다. 그 기록이 수영에서 한국에 첫 금메달이었다.
조오련은 선수생활을 마감후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 대한해협 횡단 이후 1982년 도버 해협, 2003년 한강 600리 완주했다. 2005년 8월12에는 18시간을 헤엄쳐 조오련과 해군 UDT 출신의 장남 성웅씨, 국가대표 수영 선수가 된 차난 성모씨가 번갈아 바닷길을 건너 독도 상륙에 성공했다.
또 다른 도전을 준비했던 조오련은 2008년 8월 해남의 자택에서 심장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대한해협 횡단 30주년을 기념해 2차 횡단을 위한 연습하던 차라 안타까움을 더 했다. 한국일보에서 발췌된 기사 중 일부다.
시간은 흘러 2016년 8월11일 박태환이 리우올림픽을 등지고 쓸쓸히 귀국길에 올랐다. 박태환은 전날 열린 2016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남자 자유형 100m 예선에서 49초24을 기록하며 준결승 진출에 실패했다. 박태환은 남아있는 1500m 자유형을 포기한채 눈물을 머금고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담았다.
이번 리우올림픽에서 박태환의 결과는 어느정도 예견됐다.
박태환은 한국 수영의 자존심이었다. 그는 조오련 이후 수영 불모지인 한국에서 세계적인 기록을 세우면서 세계적인 스타로 부상했다. 4회 연속 올림픽 출전이라는 수영에서 전대미문의 기록을 세웠고 금메달까지 획득한 그에게 이번 올림픽은 수모만 안겨줬다.
박태환은 2014년 도핑테스트에서 금지 약물인 네피도가 검출돼 세계수영연맹(FINA)에서 18개월간 자격정지 처분을 받았다.
그에게 국제수영연맹(FINA)는 18개월 선수자격 정지라는 중징계를 내렸다. 이후 국가대표 선발 규정을 놓고 대한체육회와 진실 논란까지 확대되면서 올림픽 준비를 착실히 하지 못했다. 4년을 준비해도 모자랄 시간에 말이다.
씁쓸한 한국 수영 황제는 자신의 한계를 절실히 느꼈고 이대로는 물러날 수 없다는 욕심이 생겼을 것이다. 박태환에겐 약쟁이보다 한국에 메달을 안겨준 대한민국 국가대표의 명예회복이 절실했을 것이다.
그가 리우올림픽을 떠나면서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조심스럽게 자신의 미래를 밝혔다.
"이렇게 끝내고 싶지 않다. 좋은 모습을 보이고 웃으며 떠나고 싶다"
8월11일 오늘은 한국의 수영영웅 조오련이 대한해협 횡단에 성공한 36년째 되는 날이다. 조오련의 불굴의 도전 그리고 박태환의 현재가 절묘하게 오버랩된다.
조오련에게는 대한민국이라는 조국이 있었고 태극마크라는 자부심이 빛났다. 대한남아의 용기와 기상이 있었다.
박태환에겐 무엇이 남았을까. 국민들의 리우올림픽에서 보여준 그의 저조한 활약상에도 박수를 보냈다. 그래도 올림픽 4회 출전 동안 그가 보여준 활약과 금메달에 우리는 웃고 또 웃었다. 도핑 사태 이전 박태환은 우리의 수영 영웅이자 한국을 하나로 만드는 뜨거운 애국심이었다.
이제 그는 다시 일어서려 한다. 조오련의 용기와 이상을 본받아 새롭게 업그레이드가 된 박태환을 기대해본다. 만일 도쿄올림픽을 도전하겠다는 마음을 확고히 굳었다면 그의 도전정신에 박수를 보낸다.
[미디어펜=김재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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