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는 지식이 넘치는 사회이지만, 역설적으로 가치관의 혼돈을 겪고 있는 '지혜의 가뭄' 시대이기도 합니다. 우리 사회가 복잡화 전문화될수록 시공을 초월한 보편타당한 지혜가 더욱 절실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고전에는 역사에 명멸했던 위대한 지성들의 삶의 애환과 번민, 오류와 진보, 철학적 사유가 고스란히 녹아있습니다. 고전은 세상을 보는 우리의 시각을 더 넓고 깊게 만들어 사회의 갈등을 치유하고, 지혜의 가뭄을 해소하여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와 '미디어펜'은 고전 읽는 문화시민이 넘치는 품격 있는 사회를 만드는 밀알이 될 <행복한 고전읽기>를 연재하고자 합니다. [편집자 주] 

박경귀의 행복한 고전읽기(138)-영혼불멸을 부정한 아리스토텔레스
아리스토텔레스(BC 384~322) 『영혼에 관하여

   
▲ 박경귀 국민대통합위원회 국민통합기획단장
그리스의 사상인 헬레니즘(Hellenism)과 그리스도 사상인 헤브라이즘(Hebraism)은 서양 문명을 움직여 온 수레의 두 바퀴와 같다. 서구인들의 정신세계에서 이 둘을 빼어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이 두 사상을 연결시켜 준 철학 가운데 뚜렷한 것 하나를 꼽자면 영혼에 대한 담론일 것이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궁구한 인간 영혼에 대한 이해와 사유 체계는 기독교 사상에 상당 부분 수용되었다. 그리스 철학자들이 인식한 인간과 신, 그리고 영혼의 관계는 일견 유일신의 존재를 전제로 한 기독교 사상과 그 출발점이 상치되는 듯하다. 하지만 영혼의 의미와 속성, 존재 유무를 이해하는 과정에서 기독교 사상가들은 그리스 철학자들의 사유 방식에서 많은 자극과 착상을 빌려 기독교 사상 체계를 정립할 수 있었다.

플라톤의 영혼관은 영혼불멸을 믿은 소크라테스의 철학을 계승했다. 사형 선고를 받고 죽을 날을 기다리고 있던 소크라테스는 플라톤이 지은 대화편 《파이돈》에서 영혼의 불멸을 믿는 자신의 철학을 역설했다. 그는 세상의 어떤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진리를 궁구하였기에 죽음 앞에서도 한 점 두려움을 갖지 않고 초연할 수 있었다. 소크라테스는 세상 사람들에게 영혼의 영원한 삶을 위해 선과 지혜를 추구할 것을 설파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소크라테스와는 달랐다. 그는 단순히 영혼의 불멸성에 주목하기보다, 영혼의 의미와 속성, 영혼의 능력과 기능, 그리고 존재의 양태를 종교적 당위성의 관점이 아니라 실증적 학술의 잣대로 치밀하게 궁구했다. 《영혼에 관하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혼에 대한 숙고의 산물이다. 그는 인간과 영혼의 문제를 최초로 실증적으로 규명하고자 했다.  

영혼에 대한 논의는 현대 사회에서도 끊임없이 논란이 되고 있는 사안이다. 심리철학의 문제이기도 하고, 행위철학의 화두이기도 하다. 그 최초의 실마리를 아리스토텔레스는 종교와 무관한 생명 일반에 관한 탐구의 과정에서 찾았다. 그는 생명체가 갖고 있는 능력의 종류와 속성을 하나하나 규명하는 가운데 영혼을 발굴해냈다.  

영혼이란 무엇인가? 영혼은 존재하는가? 존재한다면 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존재할까? 인간은 그 영혼을 인지할 수 있을까?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지금 우리가 쉼 없이 논의하고 있는 이런 일차적 의문들을 제기하고 스스로 해답 찾기에 나섰다. 그가 밝혀낸 내용들이 어떤 것인지 그이 주장을 따라가 보자.  

이 책은 모두 3권으로 이루어졌다. 제1권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영혼 탐구의 목적과 방법, 그리고 그동안 여러 철학자들이 제기했던 문제들을 재검토한다. 제2권에서는 영혼에 대한 정의와 영혼의 구체적 능력과 기능들을 식별하고 그 능력의 상호 관계를 규명한다. 제3권에서는 영혼의 능력으로 여겨지는 동물의 근본적인 감각과 사고, 지성의 관계를 탐색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인간 영혼에 대한 탐구는 자연 생명체의 속성에 대한 탐구의 연장선상에 있다. 특별한 존재로 여겨지는 인간 역시 자연계의 생명체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의 접근방법은 보편적인 생명의 본질을 규명하는 가운데 인간에 속하는 특수한 사례를 준별하고자 하는 방식이다. 만약 인간 영혼 자체에 대해서만 탐구할 경우 동물의 유(類)와 종(種)에서 보편적으로 보일 수 있는 것들을 간과함으로써 영혼의 속성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영혼에 대한 연구를 통해 자연을 이해하는 데 크게 기여할 것으로 여겼다. 영혼은 생명체에 잠재해 있는가, 아니면 현실적으로 존재하는가, 이를 선험적으로 알기는 어렵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영혼은 보이는 신체 이외의 무엇임에는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해서 신체 없이 영혼이 존재할 수도 없다고 보았다. 이에 따라 아리스토텔레스는 영혼 탐구의 출발점을 영혼에 본성적으로 속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것들을 드러내 보이는 것으로 삼았다. 그 속성을 드러냄으로써 영혼의 실체가 무엇인지 파악하고자 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먼저 영혼의 본성에 대한 전통적 견해들을 살폈다. 데모크리토스는 영혼을 불 또는 뜨거운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영혼과 지성을 동일시했다. 아낙사고라스는 영혼을 운동의 원인이라고 말했다. 이런 까닭에 모든 생물들은 영혼을 갖는다고 보았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영혼이 제일원리이며 영혼의 발산으로부터 모든 것들이 구성된다고 여겼다. 크리티아스는 영혼을 피라고 주장하며 감각이 영혼에 가장 고유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 어떤 이들은 영혼을 공기 속의 작은 먼지들과 동일시하기도 했다. 영혼이 작은 먼지들을 움직이는 것이기도 하고, 스스로 끊임없이 움직인다는 생각을 가졌다. 영혼을 가진 것은 곧 운동한다고 여긴 이들은 영혼을 존재자를 알거나 또는 감각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들 여러 사람들이 규정한 영혼은 운동, 감각, 비물질성의 세 가지 속성을 공통적으로 갖고 있다. 또 영혼은 단일한 원소 또는 다수의 원소들로 구성되었다고 본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많은 이들이 제기했던 이러한 영혼의 속성 가운데 대표적인 특질을 하나하나 검토해 나간다.  

영혼의 운동성에 대한 검토를 살펴보자.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뭇 자연학자들이 주장한 영혼의 운동성에 동의한다. 그 역시 장소운동, 질적 변화, 양적 감소, 양적 증가의 네 가지 형태의 영혼의 운동을 상정한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영혼의 운동은 우연적인 것이 아니라 본성적인 것으로 보며, 이 경우 공간성을 갖는다고 보았다.  

'본성적' 운동이란 의미는 강제적으로 움직여질 수 있다는 뜻일 것이다. 다시 말해 영혼이 신체를 움직일 수 있다는 뜻이며, 이는 영혼도 신체의 전체 또는 부분들에 따라 운동할 것이란 의미다. 그런데 영혼과 신체는 섞일 수 없다. 서로 영향을 주고받을 뿐이다. 반면에 우연적인 경우에는 이러한 상호관계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영혼이 본성적인 운동을 하기 위해서는 기술이 도구를 필요로 하듯, 반드시 신체를 필요로 한다고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영혼은 인식, 감각, 의견 형성이며, 갈망과 희망을 포함한 욕구 일반이라고 말한다. 이 영혼의 운동에 의해 생물의 장소운동이 발생하고, 성장, 성숙, 그리고 쇠퇴가 야기된다. 이러한 영혼은 신체 그 자체가 아님은 분명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영혼이 신체를 떠나면 신체는 해체되고 부패하게 된다고 단언한다. 영혼은 생물 내부의 공기의 일부분에는 존재하지만, 다른 부분에는 존재하지 않으리라는 것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영혼은 반드시 '생명을 잠재적으로 가지는 자연적 신체'의 형상이라는 의미에서의 실체여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영혼은 이런 신체의 현실태일 것이다. 그렇다면 영혼과 신체는 하나인가라는 질문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영혼은 "기관들을 가지는 자연적 신체의 제일 현실태"라고 정의한다. 만약 눈을 생물이라고 가정해보자. 눈의 영혼은 시각일 것이다. '봄'은 눈의 현실태인 것이다. 이 때 눈은 시각의 질료이며, 만약 눈에 시각이 전혀 남아 있지 않다면, 그 눈은 더 이상 눈이 아닐 것이다. 이렇듯 "최소한 한 부분에 대해 적용되는 것은 반드시 생물의 신체 전반에 관해 적용되어야 한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생명체의 구분은 '영혼을 갖는 것'과 '영혼을 갖지 않는 것'의 구별에서 출발점을 삼는다. 감각, 장소운동 또는 정지, 그리고 영양섭취, 쇠퇴와 성장과 같은 운동을 하는 것은 살아있는 '생명'이다. 이 생명체 가운데 영양섭취능력, 감각능력, 사고능력, 운동능력을 가진 것은 동물이다. 이 가운데 인간만이 추론적 사고능력과 지성을 갖는다. 물론 아주 소수의 동물만이 계산과 추론적 사고의 초보적 수준의 능력을 갖는다.  

영혼은 이런 능력을 통해 '우리로 하여금 살게 하고 감각하게 하는 것'이고, '우리로 하여금 인식하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영혼은 형식 또는 형상이며, 질료나 주체가 아니다." 영혼은 신체 없이 존재할 수 없으며, 또한 그 자체가 신체의 일종도 아니라는 것이다. 영혼은 어떤 것으로 실현될 질료 안에 존재하는 잠재태일 뿐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한다. "영혼은 살아 있는 신체의 원인이며 원리이다." 생명체의 성장과 질적 변화도 영혼을 통한 것이다. 영양섭취와 생식과 같은 영혼의 능력이 생물의 성장과 변화를 가져온다. 또 영혼은 스스로를 보존하는 능력을 가지며, 각종 감각능력이 감각대상들로 인해 영향을 받을 때 실질적인 작용을 한다.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목소리는 모두 영혼의 작용이다. 즉 감각대상들을 감각기능을 통해 식별하게 하는 것은 신체의 현실태인 것이다. 감각의 대상들이 신체에 영향을 줄 때, 잠재태로 있던 영혼이 지각함으로써 현실화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불에 손을 데었다. 그 때 뜨거움을 지각한 주체는 무엇일까? 손의 살가죽일까? 아니면 살가죽 속의 살점일까? 둘 다 아니다. 살가죽이나 살점 그 자체는 특정한 원소로 구성된 물질이다. 그 물질이 뜨거움을 인식할 수 없다. 살가죽과 살점이 감각기관이 아님은 분명하다. 불의 열기를 지각한 것은 신체 속에 내재한 영혼이다. 감각의 식별 주체는 영혼인 것이다. 이렇듯 영혼은 감각대상인 외부의 존재자들을 식별하고 인식한다. 이때 지각되는 고유대상들에 대한 감각은 항상 참되다.

그렇다면 사고도 감각과 마찬가지의 원리로 작동되는 것일까? 감각은 모든 동물들이 공유하지만, 이해와 추론적 사고는 이성을 가진 인간에게만 고유한 능력이다. 감각과 달리 이해와 추론적 사고는 거짓된 것을 수용할 때도 있다. 지식과 의견, 이해가 거짓되거나 참된 것은 필연적이다. 이런 것들은 감각과 달리 상상과 상상이 만들어 낸 심상(心象), 그리고 신념에서 발생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감각은 참된 반면에 상상은 대부분 거짓이기 때문이다.  

추론적 사고와 이해에서 오류의 가능성을 늘 안고 있다면 분명 우리의 영혼은 취약하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의 사고가 어떻게 발생하는가에 대해 탐구해야 한다고 강조한 이유다. 이는 인간이 지성을 획득하기 위한 필수적 선결과제다. 우선 지성의 작동체계를 추적해 보자. 감각능력은 감각대상들의 영향을 받지만, 추론적 사고능력은 사고대상에게서 직접적인 영향을 받지 않는다. 감각은 감각대상들의 자극으로부터 작동되지만, 사고능력은 자기 스스로 생각하게 된다. 즉 "지성은 어떤 의미에서 잠재적인 사고대상들이지만, 사고하기 전에는 어떤 현실태로서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인간 영혼의 꽃은 지성이다. 지성은 그 자체가 사고대상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영혼 안에는 모든 것들을 산출하는 다른 어떤 원인과 영향을 주는 능력이 있는데, 지성이 바로 그런 능력을 갖는다고 말한다. 특히 "실제로 작용하는 실체로서의 지성은 분리될 수 있으며, 영향 받지 않으며, 섞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지성은 어떤 때는 사고하고, 어떤 때는 사고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지속적으로 사고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성을 촉발시키는 것은 무엇일까? 감각이 아닌 희망, 욕망, 갈망과 같은 욕구가 지성의 작동을 자극한다. 이런 욕구는 생식능력, 영양섭취능력을 유발하는 원동자(原動者)이며, 욕구의 대상은 실천적 지성의 출발점이 된다. 욕구와 실천적 사고가 장소운동을 유발하는 것이다. 식물과 달리 동물들은 이 욕구능력을 가지는 한 스스로 움직일 수 있다.  

동물들도 욕구에 따라 이것을 할 것인가 또는 저것을 할 것인가 결정하는 계산 능력을 가진다. 그렇지만 동물은 어떤 상황에 대한 의견을 갖지는 않는다. 추론으로부터 나온 상상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저 욕구에 반응하는 계산적 선택을 할 뿐이다. 그런데 인간은 다수의 심상들을 하나로 만드는 능력을 갖는다. 이를 위해 숙고능력이 요구된다. 인간은 숙고능력을 통해 하나의 욕구를 다른 욕구로 넘어설 수 있게 된다. 나아가 인간은 이런 숙고의 능력을 통해 선을 추구할 수 있는 것이다.

영혼의 영역에서 감각과 반응의 문제는 현대 과학에서는 감각 신경 세포(sensory neuron)로부터 두뇌 신경 세포를 거쳐 운동 신경 세포(motor neuron)로 전달되는 과정으로 설명된다. 하지만 고대에는 이러한 신경 해부학적 지식은 부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리스토텔레스가 설명하는 감각과 지성은 신경과학적으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감각을 신경의 작용으로 본다면 육체에 산포되어 있는 신경은 육체의 소멸과 함께 소멸되고 마는 것이 아닌가. 감각을 제외한 지성 역시 두뇌의 작용으로 본다면 육체의 소멸과 운명을 같이 할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영혼은 불멸한다는 관념을 부정되고 만다. 종교적 관점에서의 영혼과 과학적 관점에서의 감각과 지성이 충돌하는 지점이다. 이 대목의 진위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고민이었거니와 우리가 앞으로 풀어야할 과제다. 

아무튼 아리스토텔레스는 영혼의 속성을 궁구했다. 그는 스승인 플라톤과 소크라테스의 영혼불멸설을 추종하지 않았다. 물론 직접적으로 이를 비판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의 저작『영혼에 관하여』는 어떤 신체도 감각이 없이는 영혼을 갖지 않으며, 영혼이 내재할 수 있는 신체가 없이는 영혼 또한 더 이상 존재할 수 없음을 규명하고 있다. 경험주의 철학자였던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도 현세에서의 삶의 태도와 철학에 대해 강론했을 뿐 내세의 삶을 기약하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영혼에 대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의견의 불일치는 우리를 더욱 혼란스럽게 한다. 영혼은 신체를 떠나서도 불멸하는 것일까? 만약 불멸한다면 신체를 떠난 영혼의 거처는 어디일까? 신체를 떠난 영혼은 감각을 갖고 있을까? 인류가 유한한 생명체인 자신의 운명을 인식한 때부터 이 의문은 계속될 것 같다. /박경귀 대통령소속 국민대통합위원회 국민통합기획단장·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 ☞ 추천도서: 『영혼에 관하여』, 아리스토텔레스 지음, 유원기 옮김, 궁리(2012), 28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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