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관론은 유행처럼 퍼지기 마련이다. 18세기엔 멜서스의 '인구론’이, 19세기에는 '러다이트 운동’이 있었다. 모든 것이 사회의 소유물이 되어야 한다던 사회주의의 망령 역시 20세기에 독버섯처럼 퍼져갔다. 마르크스의 작품이었다.
비관론자들에겐 안타까운 말이지만, 세상은 그들이 생각한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2016년 현재, 60억 넘는 인구가 지구상에 존재하며 멜서스가 틀렸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기계가 인간의 일자리를 빼앗는다며 일어난 '러다이트 운동' 역시 우스운 일이 되어버렸다. 오히려 기계로 인한 생산성 향상과 부가가치 산업의 발달, 인류의 후생 증가로 세상은 점점 더 좋아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공산주의와 사회주의 국가들이 붕괴됐다. 이제 더 이상 그들의 이념이 설 자리가 없게 됐다. (북한 빼고)
<기사개요>
● 매체 : 경향신문
● 기사명 : [정희진의 낯선 사이] 어떤 2조원
● 등록일자 : 2016년 10월 23일 (일)
그러나 21세기에도 존재하는 비관론
여전히 비관론이 존재한다. 경향신문에 실린 이 칼럼에는 요즘 유행하는 비관론이 전부 다 담겨있다. 아래 구절을 살펴보자.
“발전주의에서 살아남을 방도를 모색할 때다. 발전지상주의는 경제 강국이 아니라 종말론적 신앙이다. 생산과 소비를 무한정 늘리고, 시장 교환 체제를 확대하고, 자연을 얼마나 더 뒤지고 파헤칠 것인가. 스마트폰은 스마트하지 않다.”
글쓴이가 나열한 것이 '종말론적 신앙’인 것 같다. 글쓴이는 칼럼을 통해 인문학의 소실, 개인주의 확대로 인한 공동체 정신의 소멸, 시장의 확대와 공공서비스의 위축, 사익이 커지고 공익이 줄어드는 현상, 환경파괴로 세상은 이상해진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것들이 왜 문제가 된다는 건지 이해할 수 없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이 비관의 중심에는 '기술발전’이 있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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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를 마르크스를 중심으로 하는 사회주의 이념은 시장을 창조적 자본가나 기업가에게 유리하고 복제자인 노동자에게 불리한 기울어진 운동장으로 본다. 마르크스의 자본에 의한 노동 착취 이론이 바로 이런 경제 세계관을 반영한다. 기업과 자본가를 청산하는 것이 시장을 공평하게 바로잡는 길이라고 본다. |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국 이후, AI에 대한 글들이 홍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역시나 AI가 인간을 위협한다는 종말론적 메시지였다. AI는 아직 발전 단계에 불과하다. 이것에 대한 평가는 제대로 발전된 후에 해도 늦지 않다. (물론 비관론자들의 뜻처럼 그다지 비관적이지는 않겠지만.) 자본주의와 기술발전은 인류를 위험에서 구해내고 더욱 더 좋은 세상을 만들었다. 위험한 일들은 기계가 대신 했고, 덕분에 인간은 위험한 일을 안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21세기 비관론자들은 외눈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그들의 일자리가 사라졌다고 말할 뿐, 위험한 일을 하지 않게 됐다고 말하지 않는다. 빈부격차가 심해졌다고 주장하지만, 저소득층의 소득과 후생이 증가됐다는 사실은 말하지 않는다. 기술발전이 환경을 파괴한다고 유난 떨며, 기술발전이 자연재해를 막은 사례는 외면한다. GMO를 욕하지만, GMO 식물들이 인류를 배부르게 해준 것을 모르는 체 한다.
비관하지 말자
공공서비스의 위축은 민간서비스의 확대를 가져올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 생긴 공백은 자유시장이 채울 것이다. 그렇게 되면 경제적 자유가 높아진다. 민간서비스는 공공서비스 보다 많은 선택권과 높은 품질의 서비스를 창출한다. 결과적으로 모든 것이 긍정적으로 변할 것이다. 글쓴이가 그렇게도 경계하는 '발전'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글쓴이는 '어떤 2조원’을 제목에 언급하며 “학생들의 친환경 급식, 농가 부채 탕감, 가난한 암환자를 위한 치료비, 아르바이트 시급 1만원 책정, 시간강사 월급제, 택시기사 사납금제 폐지, 가정폭력 피해여성 쉼터, 성산업에 종사하는 여성을 위한 의료 복지, 장애아동을 혼자 감당하는 엄마를 위한 사업”에 쓰고 싶다고 썼다.
어림없는 소리다. 세상의 문제점들은 시장에서 해결되고 교환되어야 한다. 억지로 설계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공적자금의 투입은 일시적으로 문제를 해결 할 수 있을지 모르나, 지속적이고 영구적인 해결책은 아니기 때문이다. 생산성의 향상이 소득을 늘리고 복지를 위한 재원을 마련할 유일한 방법이며 가장 도덕적인 방법이다. 글쓴이가 싫어하는 '성장'과 '발전'만이 생산성의 향상을 이룰 수 있다. 이 세상이 무서워지는 이유는 인문학의 소멸이 아니라 기술발전의 소멸과 자유의 소멸, 그리고 시장의 소멸이다. 이 소멸들은 진화가 아닌 퇴보를 불러올 것이다.
세상이 비관론에 휘둘려도 현장에서 묵묵히 자기 일을 하는 사람들과 낙관론자들에 의해 긍정적으로 변화해왔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매트 리들리의 책 제목처럼 나 역시 '이성적 낙관주의자’다. 나는 자유와 자본주의 그리고 기술발전이 인간을 위험에서 구하고 이롭게 한다고 믿는다. 비관론적 결말은 오지 않는다. 아니, 와서도 안 될 것이다. /이건희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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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의 문제점들은 시장에서 해결되고 교환되어야 한다. 억지로 설계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공적자금의 투입은 일시적으로 문제를 해결 할 수 있을지 모르나, 지속적이고 영구적인 해결책은 아니다./사진=연합뉴스 |
(이 글은 자유경제원 자유북소리 '언론고발' 게시판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건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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