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용구 소설가·정신과전문의
이념의 전선이 판치던 시절, 자신의 두 아들을 죽인 원수를 양아들로 입적해 키우며 진정한 용서의 길이 무엇인지를 일깨워 준 목회자 손양원. 분열과 갈등, 증오로 치닫는 이 시대에 그가 던지는 울림은 감동을 넘어 가슴 묵직한 과제를 던진다. 미디어펜은 소설가이자 정신과 전문의인 신용구 원장의 '소설 손양원:용서'를 연재한다. 소설을 통해 진정한 용서와 화해 그리고 우리사회의 병폐인 갈등과 증오를 치유하는 길을 묻는다. 필자인 신 원장은 용서의 의미를 새삼 일깨워준 손양원 목사님께 감사를 드리고, 독자들 역시 손양원 목사의 인생을 통해 용서의 진정한 의미를 가슴에 한번 되새겨 보았으면 하는 바람을 전했다.  [편집자 주]


   

아버지의 비밀 4-2

1948년 10월 19일

여수 14연대가 제주도민들에 대한 이승만 독재 정권의 진압 지시를 거부하고 떨쳐 일어나 반나절도 안 되어 미제 앞잡이 이승만 독재 정권을 물리쳐 여수와 순천에 드디어 숭고한 사회주의의 깃발을 꽂았다. 이젠 이곳이 미제로부터 완전 해방된 꿈의 낙원이 된 것이다. 

오늘을 얼마나 손꼽아 기다렸던가. 거리에 내걸린 혁명의 아버지 레인과 혁명의 동지 스탈린의 초상화를 보고만 있어도 붉은 피가 솟구쳐 가슴이 벅차다. 시민들도 우리의 행동에 열렬히 환호하고 있다. 인민들이 원하고 있는데 무엇을 못할 것인가?  

이제는 우리 젊은 학도들이 일어나야 한다. 다시없는 절호의 이 시기를 놓치고 않고 사회주의 혁명을 완성시켜야 한다. 친일 매국노, 부르주아, 숭고한 사회주의 정신을 갉아먹는 기생충 예수쟁이를 처단해야 한다.

1948년 10월 21일

오늘은 혁명 사흘째 되는 날이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파랗다. 완전 코발트빛이다. 어느 시인이 애기했던 것처럼 푸른 물감이 하늘에서 뚝뚝 떨어져 온 세상을 파랗게 물들일 것만 같은 날이다. 내 가슴도 파랗게 물들일 것이다.

마치 혁명에 대한 순수한 내 마음의 열정을 대변하는 것 같아 더 없이 기분이 좋다. 날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도 부드럽고 정겹기만 하다. 

민중의 기 붉은 기는 전사의 시체를 싼다
시체가 굳기 전에 혈조(죽음을 각오한 선봉)는
깃발을 물들인다
높이 들어라 붉은 깃발을 그 밑에서 굳게 맹세해
비겁한 자여 갈테면 가라 우리들은 붉은 기를 지키리라
원수와의 혈전에서 붉은 기를 버린 놈이 누구냐
돈과 직위에 꼬임을 받은 더럽고도 비겁한 그 놈들이다

높이 들어라 붉은 깃발을 그 밑에서 굳게 맹세해
비겁한 자여 갈테면 가라 우리들은 붉은 기를 지키리라
붉은 기를 높이 들고 우리는 나가길 맹세해
오너라 감옥아 단두대야 이것이 고별의 노래란다
높이 들어라 붉은 깃발을 그 밑에서 굳게 맹세해
비겁한 자여 갈테면 가라 우리들은 붉은 기를 지키리라

오늘 우리는 위대한 사회주의 운동의 흐름에 역행하는 불순한 무리들을 체포했다. 그들을 포승줄에 굴비처럼 묶어 앞세우고 승전가를 부르듯 우리는 우리의 혁명 의지를 불태우는 적기가(赤旗歌)를 부르며 순천 거리를 행진했다.

시민들의 호응이 나날이 더 뜨거워진다. 대장간 집 딸 순애도 푸줏간 박씨도 내게 손을 흔들었다.

그래, 혁명은 이 가난한 자들을 위한 것이다. 우리는 반드시 혁명을 완수해야 한다. 돈에 몸과 정신이 썩어버린 부르주아를 처단하고 모두가 평등한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그런데 오늘은 정말 참으로 기가 차는 일을 겪었다. 예수병이 들면 제정신을 못 차리고 눈 뜬 봉사가 된다고 하더니 그 말이 딱 맞았다.

여수 애양원에서 일하는 손양원이란 유명한 목사의 아들놈들을 붙들었다. 큰놈은 미국 유학을 준비하고 있는 미국 놈 앞잡이고 둘째 놈도 예수병에 걸린 정신 나간 놈으로 모두 우리 인민의 적들이다. 

하지만 나이가 나와 비슷하고 마음씨가 나쁜 것 같지 않고 얼굴도 착해 보여 전향만 하면 살려 주고 싶었다. 사실 전향이라고 할 것도 없다. 그저 우리 사회주의를 비난하는 이상한 헛소리만 않으면 살려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놈들이 하는 말이 정말 황당하다. 우리 조선이 왜놈의 식민지가 된 것이 하늘의 뜻이라니! 무슨 그런 개 같은 소리를 하는가? 이스라엘도 이집트의 지배를 받았다면서, 이 또한 하느님의 뜻이라니? 

아니 이런 육시랄 놈들이 어디 있단 말인가? 병이 들어도 단단히 든 놈들이다. 구제불능의 인간들이다. 예수나 하느님이란 작자가 정말 이 나라를 사랑한다면, 또 엄청난 신통력을 갖고 있다면 당달봉사가 아닌 다음에야 어찌 이 나라가 일본의 식민지가 되는 것을 그냥 두고 보았단 말인가? 미친놈들 이다. 정말 미친놈들이다.

그래서 죽도록 팼다. 죽이려고 했던 건 아니지만, 죽어 버렸다. 그래도 후회는 않는다. 우리나라의 앞날을 망쳐 놓을 이 자들을 살려 두었다가 훗날 우리 민족의 원수가 될 바에는 차라리 재앙을 부르기 전에 불행의 싹은 먼저 잘라 버리는 게 좋다 싶기도 했다. 

번개를 맞은 듯 나도 모르게 온 몸이 사사나무 떨듯 떨렸고, 온몸에 소름이 돋았고 모골도 송연했다.

'아버지가 사람을 죽였다, 그것도 때려서......'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비처럼 줄줄 흘렀다. 후줄근해진 속옷에서는 뱀이 내 몸을 핥듯  땀이 스멀거리며 배어 나와 내 몸을 적시었다.

   
▲ 영화 '고지전' 스틸.

아버지는 혁명에 눈이 멀어 있었고 혁명에 눈이 먼 청춘은 사람의 목숨을 발부리에 부딪치는 작은 돌멩이나 이름 없는 들풀보다 더 천하게 여기고 있었다.

나는 상상이 되지 않았다. 모든 추억과 경험을 동원하여 씨줄과 날줄로 삼고 또 다른 아버지의 모습을 그려보아도 아무런 그림이 그려지지 않았다.    

나는 속으로 땀을 뻘뻘 흘리며 옹골차게 그 젊은 청년과 내가 기억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잇고자 했다. 그러나 이 둘 사이엔 터럭 같은 공통분모도 존재하지 않았다.

내 눈에 비친 아버지의 청춘시절은 이질적이다 못해 여느 괴기 영화에서나 나옴직한 괴물과 다르지 않았다. 이것은 내가 알고 있는 아버지에 대한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살아 있는 생명은 무엇이든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젊은 날 내 아버지 박태수는 인간백정이었다.

'혁명이 인생의 금과옥조라 해도 어떻게 인간의 목숨을 파리 목숨처럼 여길 수 있다는 말인가?'
  
나는 아연실색 사색이 되었고, 엄마는 걱정이 되어 근심스런 눈으로 날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데 어머니의 눈이 이날따라 유난히 더 슬퍼 보였다. 그 순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엄마와 나 두 사람의 눈엔 저절로 눈물이 가득 고여 들었다.

이 눈물은 두 사람의 마음이 같다는 사실을 서로에게 알려주고 있었다. 그래서 아버지 일로 가슴이 아팠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공범으로서의 연대감이 힘을 발휘해 그렇게 쓸쓸하지는 않았다.

"경호야, 괜찮니?"
"......."

나는 괘념치 말라는 무언의 눈빛을 어머니에게 보내고는 젊은 목사에게 눈길을 돌렸다. 

무언가 짚이는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들을 저 세상으로 보낸 손 목사와 내 앞에 있는 젊은 손 목사가 어떤 연관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이다. 성도 같았다. 그래서 그가 손 목사의 아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 특별한 인연이 있지 않고서야 어찌 자식조차 까맣게 모르고 있는 육친의 엄청난 비밀이 담긴 일기장을 생면부지의 그가 소유할 까닭이 있겠는가. 그는 우리 두 사람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눈을 감은 채로 성경을 받쳐 들고는 기도를 계속 했다.

나는 그의 정체가 몹시 궁금해 그에게 묻고 싶었다. 하지만 그의 기도를 방해하고 싶지 않아 목구멍까지 차오른 내 마음을  짓눌렀다. 굳이 알고 싶다면 어머니에게 물어도 될 일이지만, 본인에게 직접 듣는 것이 도리라 생각해 내 궁금증을 잠시 미뤄두고 다시 아버지의 일기에 마음을 집중했다. 

군 내부의 좌익이 일으킨 여순 반란 사건으로 전라도 일대가 아비규환에 빠져 극도의 혼란상을 겪고 있던 이 와중에도 아버지는 꼬박꼬박 하루도 빼놓지 않고 일기를 썼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여순 사태 발발 3일째 되던 날로부터 사흘 정도 분량의 일기가 빠져 있었다.   

여순반란 사건이 일어난 직후 이 사건은 국군의 대대적인 작전으로 신속하게 진압이 되었다. 아버지가 젊은 혈기를 못 이기고 이 사태에 가담했던 것으로 보아 아마도 이즈음에 아버지의 신상에도 어떤 변화가 있었던 것인 아닐까 생각했는데, 아래의 기록은 역시 내 추측과 다르지 않게  아버지의 신변에 이상이 있었던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10월 25일

자식을, 그것도 하나도 아니고 둘이나 죽인 나를, 원수나 다름이 없을 텐데........날 용서하신 건 물론이고 사지에 빠진 나를 구해 주셨으니, 대체 이 일을 어찌 해야 좋을까? 박태수가 어찌 목사님의 얼굴을 볼 수 있을까? 이 은혜를 또 대체 어찌해야 갚을 수 있을까....... 

자식을 죽인 원수를 용서한 목사, 아버지의 일기 속에 녹아 있는 삼십년 전 이야기, 나는 온몸으로 전율을 느끼며 일기를 덮었다. 이때 누군가 야간 통행금지를 위반했는지 경찰의 호각 소리가 시끄럽게 울렸고, 옆집의 누렁이도 덩달아 사납게 울어 제쳤다.

고개를 들었을 때 기도를 마쳤는지 그가 나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이미 시각은 자정을 훌쩍 넘고 있었지만 새벽 별 같이 빛나는 그의 눈에는 피로의 빛이라곤 눈곱만치도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는 참 사연이 많았던 분이에요, 묻고 싶은 게 많을 텐데......."
"그보다 먼저 묻고 싶은 게 있어요."
"......"

그가 선한 눈을 반짝이며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목사님, 손목사님 아드님이 아니신가요?"
"맞아요, 아마도 경호 학생이 제일 궁금해 할 것이라 생각했어요, 하지만 난 아버지 얼굴도 몰라요, 유복자로 태어났거던요! 유복자가 어떤 사람인지 알죠? 아버지는 내가 태어나기 하루 전날 인민군 총에 맞아 돌아가셨대요."

언제나 맑고 곱게만 보였던 그의 눈에 어딘지 모르게 쓸쓸한 빛이 스치고 있었다. 

"아버님이 보고 싶은가 봐요?"
"목사도 사람인데, 자식으로서 이만큼 성장해 사람 구실을 하고 있으니 당연히 아버지에게 생긴 얼굴은 한번 보여 드리고 싶지요, 그런데 그게 내 맘대로 되나요? 안 계시니......, 아쉽지요, 허허! 그래도 아버지는 주님을 잘 믿으셨으니 천국에서 지금 제일 호강하면서 살고 계실 겁니다."

그는 신앙심이 깊은 목사답게 아버지에 대해 갖고 있던 유복자의 회한을 금방 떨쳐내고는 호기롭게 웃었다.

"저도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목사님."

여태껏 무릎을 고추 세운 채 새색시 마냥 숨을 죽이고 있던 어머니가 오랜만에 입을 열었다.

"사실, 저도 얼마 전에 목사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이 사람을 참 오해를 많이 했어요, 철이 없다고 생각했고, 미친 사람처럼 왜 그렇게 사람들에게 퍼주지를 못해 안달을 하나 미워도 하고 원망도 많이 했어요." 

아버지가 자신의 일을 감쪽같이 숨기고 있었던 탓에 어머니 역시 아버지에게 있었던 끔찍했던 과거 일은 꿈에도 몰랐고, 임종을 앞두고 아버지가 자신의 문제를 정리하려 손목사의 아들인 젊은 손 목사를 부른 다음에야 알게 되었다고 했다.

또 젊은 손 목사는 아버지의 지나친 결벽증 때문에 내가 신학대학 진학하는 걸 아버지가 허락하기 쉽지 않았다는 것도 친절하게 일러주었다. 모든 수수께끼가 순식간에 풀리며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 들었다.   

"참 외로웠을 거예요, 혼자 그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았으니......."   

돈 때문에 평생 남편을 구박하며 살았던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던지 어머니는 아버지에 대한 미안함에 눈물을 훔치다가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민망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머리를 조아려 그에게 얼른 사과를 했다.

"아이고, 목사님, 선친께서 우리 집 양반 살려 주신 은혜도 몰라보고 잠깐 정신이 딴 데 팔려서 헛소리만 해댔으니, 주책이 따로 없습니다. 선친께서 저희 아이 아버지를 구해주지 않았다면 어찌 지금 이런 자리가 있을 것이며, 경호가 이 세상에 날 수 있었겠습니까? 정말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형수님,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비록 나쁜 인연으로 만났지만 우리는 이미 한 집안이 된지 오래입니다, 돌아가신 아버님이 형님을 아들로 삼으시면서 부터, 두 집안은 하나가 된 것입니다." 

나는 젊은 손목사의 말에 너무 놀라서 벌어진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자식을 죽인 원수를 용서하다 못해, 그를 자신의 아들로 삼았다니? 대체 이게 가능한  일인가? 그리고 또 그는 대체 어떤 인물인가? 나는 그의 얘기가 들어 있다는 목사의 말에 사랑의 원자탄이란 책을 펼쳐 들었다. <계속> /신용구 소설가·정신과전문의
[신용구]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