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치 확립과 규제개혁이 서로 다르지 않은 이유- 좋은 규제는 선폐(善閉)하고 선결(善結)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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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인학 한국경제연구원 선임연구위원 |
‘새로운 대한민국을 위한 패러다임은 물질과 탐욕이 아닌 공정과 법치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
대한민국이 가야할 방향에 대해 안대희 전 대법관이 국무총리 후보자로 내정되면서 언급한 내용이다. 물질과 탐욕을 공정과 법치에 대치되는 병폐로 지적한 것이 적절한가는 논란의 여지가 많다. 그러나 지금 시점에 법치를 강조한 것은 매우 적절하고 올바른 방향이라 공감이 간다.
온 국민의 자긍심을 무너뜨리고 우울증에 빠트린 세월호 참사도 따지고 보면 법과 원칙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 일이었다. 세월호 참사는 법치의 실패를 상징한다. 그러나 우리 사회 전반을 돌아보면, 이마저도 거대한 빙산(氷山)의 일각에 불과할 뿐이다. 법과 원칙을 가벼이 여기고 잘 지키지 않는 관행은 사회 전 부문에 널리 퍼져 있다. 2013년도 세계은행이 실시한 조사에서 우리나라 법 준수의식은 OECD 34개국 중 26위로 하위권에 속해 있다는 사실이 이를 방증한다.
법치 훼손은 필연적으로 부정·비리를 수반한다. 법을 집행하는 자(규제자)와 적용받는 자(피규제자) 사이에 유착 거래가 일어나고, 원칙대로 법을 지키는 국민이 손해를 보는 불합리와 모순이 발생한다. 2013년도 국제투명성 기구가 조사한 결과에서 우리나라 부패인식지수는 OECD 34개국 중 27위로서 역시 하위권에 머물고 있는 까닭도 이 때문이다.
법치 훼손과 부정· 비리가 만연하면 국민의 불만과 불편만 가중되는 게 아니다. 이는 대한민국 경제의 성장잠재력을 갉아먹는 암적인 존재로 작용한다. 법이 잘 지켜지지 않는 사회에서는 시장거래와 계약 관계에서 서로를 신뢰하기 어렵고 만약의 경우에도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있을까 의구심이 일면서 제3자와의 거래와 계약을 꺼리기 된다. 즉, 거래비용이 증가하면서 시장교환과 경제활동이 위축되는 것이다. 따라서 법치 확립은 대한민국이 문화적으로 한 단계 더 성숙해질 뿐만 아니라 경제적 측면에서 대한민국의 성장잠재력을 끌어올리기 위해서도 반드시 달성해야 하는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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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근혜대통령이 공공기관 정상화를 위한 워크숍에서 공기업개혁과 구조조정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법치확립도 중요하지만, 지킬 수 있는 법을 만들어야 한다. 법령을 대폭 정비하면서 법치를 확립해야 한다. 법치와 규제개혁은 동시에 추진돼야 한다. |
문제는 어떻게 하면 법치를 확립할 수 있는지에 대한 방법론일 것이다. 현행의 주어진 법체계 하에서 사정(司正)의 칼바람을 일으키는 것은 미봉책이지, 근본 처방이 될 수 없다. 먼저 왜 법과 원칙을 잘 안 지키는지 또는 못 지키는지 짚어봐야 한다. 이에 관련하여 필자는 몇 해 전에 대기업에서 준법업무를 담당하는 임직원을 대상으로 법 준수 관련 애로사항이 무엇인지 설문조사를 한 적이 있다.
그 결과 규제법령이 너무 과다하다(응답자의 73%), 법령의 내용이 복잡하고 모호하다(응답자의 69~73%), 법령 해석 및 집행이 자의적이다(응답자의 64%)는 응답이 준법경영을 어렵게 하는 요인으로 지목되었다. 대기업에서 준법 업무를 전문적으로 담당하는 임직원이 이 정도이니 준법지원인을 따로 둘 수 없는 중소기업과 일반 국민은 오죽하겠는가?
따라서 법의 지배를 확립하려면 현행의 준수하기 어려운 규제법령을 정비해야 한다. 지킬 수 없거나 집행이 담보되지 않는 법령은 과감히 폐지하고, 필요한 규제법령은 이중 삼중으로 얽어 놓을 게 아니라 목적에 맞게 명확하고 간명하게 고쳐야 한다. 국민이 법을 제대로 알고 지킬 수 있도록 법률 체계와 법령을 정비하면서 법 집행력을 보강해야 법치의 기틀을 바로 세울 수 있다. 이처럼 규제개혁과 법치 확립은 동전의 앞·뒷면처럼 서로 불가분의 관계가 있음을 이해하고, 이를 바탕으로 법의 지배를 논의해야 한다는 게 필자의 소신이다.
화제를 바꾸어 보자. 아주 먼 옛날에도 이런 고민이 있었던지, 노자(老子)의 도덕경 내용에 이런 표현이 있다. ‘문을 잘 닫으면 빗장이 없어도 열지 못하고(善閉無關楗而不可開), 매듭을 잘 매면 두 번 세 번 졸라매지 않아도 풀지 못한다(善結無繩約而不可解).’개인적으로 필자는 노자의 이 표현을 규제법령이 선폐(善閉), 선결(善結)의 요건을 갖추면 국가가 무리하지 않아도 국민들이 해당 법령을 잘 준수한다는 의미로 해석하고 싶다. 그리고 앞으로 법령을 새로 만들거나 고치는 과정에서 노자의 善閉·善結 철학이 자주 언급되고 반영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황인학 한국경제연구원 선임 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