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게임 드라마 영상 연인처럼 결합, 브라질 텔레노벨라 벤치마킹을

   
▲ 심상민 성신여대 교수
축구가 밥 먹여 주나? 모처럼 월드컵 축구광으로 사는 이들을 흠칫 찔리게 만드는 물음 같다. 사실 상파울로 지하철, 버스 파업이나 리우 빈민촌 파벨라 반정부 시위 장면을 생각해보면 아무리 축구광일지라도 축제 무드로만 월드컵을 지새우긴 힘들만 하다. 경제 고통이 얼마나 심했으면 브라질 사람들이 그 좋아하는 축구마저 등 돌리려 했을까? 다행히 대회가 개막되고 연일 함성이 쏟아 나오자 특유의 낙천성을 지닌 브라질리언들답게 “축구는 즐기지만 월드컵은 반대한다”며 격정을 누그러뜨리고 있기는 하다.

이런 빛과 그림자는 사실 월드컵 경제학이라 할 만큼 보편적이고 전 지구적인 쟁점으로 이미 불거져 나온 상태다. 한국도 16강 진출 산법에 미디어산업 전체가 일희일비하는 전형적인 축구성적 고민감 고탄력 국가 중 하나다. 지상파 방송 3사가 다 달라붙어 8강전까지 못 가면 모두 적자 신세라는 협박 마케팅 하나만 봐도 안다. 때문에 아직 월드컵 초반이지만 정말 냉철하게 신선한 결심을 해놓아야 한다. 월드컵에서 살짝 정을 떼거나 아니면 뭔가 창조적 에너지 자원으로 활용을 하거나. 둘 중에 하나를 작정해야 옳다. 이제 축구가 던진 먹고 사는 문제를 풀어보자.
 

답은 이렇다. 축구를 이제부터 <게라마>로 키우는 작업에 착수하는 거다. 게라마는 게임과 드라마 합성이다. 축구라는 스포츠 게임을 드라마라는 콘텐츠로 재창조하는 전략에 눈을 돌려야 한다는 얘기다. 축구는 그 자체로 국민 대중의 밥이 되지 못한다. 시작할 때는 전투라는 로망과 욕망의 판타지가 되지만 성적이 나쁘면 삽시간에 잔인한 과녁이 되고 만다. 격한 스트레스 분출의 재떨이가 되고 천덕꾸러기가 되기도 하면서 정서적으로 패퇴하는 하수도 문화 온상이 되곤 한다.

이런 부작용과 폐단을 극복해낸 나라가 바로 브라질이다. 사람들은 영국이나 독일을 축구 문화선진국이라고 쳐주지만 실제로 축구를 정신적 지주이자 경제 의욕, 사회 활기 구심점이 되는 게라마(게임+드라마)로 길러낸 당사자는 바로 브라질이다.
 

브라질에서 축구는 장르 문화인 텔레노벨라로 우뚝 서 있다. 무더운 브라질 산동네에는 집집마다 냉장고는 없을지라도 TV는 꼭 끼고 산다. 브라질 최대 방송그룹 TV 글로보도 사랑과 복수, 배신과 야망을 그리는 텔레노벨라를 하루 종일 대방출한다. 화려한 스케일을 담기 위해 리우 데 자네이로 인근에 사십만 평쯤 되는 자체 스튜디오를 갖고 있다. 필자가 실제로 가보니 텔레노벨라 제작 시설과 노하우가 할리우드 스튜디오를 능가한다는 풍문이 전혀 과장이 아니었다.

   
▲ 브라질월드컵을 계기로 축구게임과 드라마 영상을 연인처럼 결합시키는 게라마를 스마트콘텐츠로 승화시켜야 한다. 브라질은 축구과 드라마를 연계시키는 게라마라고 하는 창조적 혼성포멧으로 글로벌 경쟁력을 갖췄다. 한국과 알제리전에서 만회골을 넣은 손흥민선수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이미 글로보는 신문과 방송, 스포츠를 망라한 미디어 제국을 구축해 세계 4대 방송사 반열까지 올라 있는 문화권력이 되어 라틴 아메리카 전체 미디어산업을 선도하고 있다. 인도 볼리우드 영화산업과 더불어 브라질과 멕시코의 텔레노벨라 드라마가 미국 할리우드와 겨루는 몇 안 되는 대항마이다. 이 텔레노벨라가 브라질 역사 속에서 축구라는 게임과 결합해 폭발적인 창조콘텐츠인 게라마를 탄생시켰다.
 

우선 축구를 보고 즐기는 행태가 텔레노벨라 시청 습관에서 옮겨 왔다. 텔레노벨라 맛을 아는 브라질 사람들은 축구 시청을 통해서도 살풀이를 한다. 고단한 생활과 억압, 설움을 씻겨내는 의례를 축구라는 미디어 콘텐츠를 매개로 실행한다. 이는 인도 볼리우드 영화가 비루한 삶과 미천한 신분이라는 현실과 일상으로부터 이탈이라는 기능성 약재로 사용되는 것과 비슷하다.

그러니 브라질 사람들이 축구를 시청하는 행위는 미국, 영국 사람들이 프로 스포츠에 빨려드는 것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여가를 즐기고 만끽하는 안온한 영미식 동굴 탐사와 생활 애환을 풀고 씻어야 하는 텔레노벨라 의식이 같을 순 없다. 이와 같이 브라질에서는 흑인 노예 항구 살바도르 카니발과 최대 빈민촌 산동네 리우 파벨라로 상징되는 억압과 고통을 무찌르는 대리 만족과 한 풀이하는 방편으로서 드라마와 게임을 한 데 합친 게라마가 자리 잡았다.
 

바로 이 점을 한국도 정확하게 읽을 줄 알아야 한다. 거의 영구적으로 축구 세계 1위, 드라마 텔레노벨라 세계 1위를 지키고 있는 브라질 숨은 파워 원인을 캐내야 한다. 특히 축구가 스포츠 게임만으로 1위가 되고 텔레노벨라는 또 방송 콘텐츠 분야에서 독자적으로 세계를 리드하는 모양새가 아니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축구 게임과 텔레노벨라 드라마를 합친 게라마라고 하는 창조적 혼성 포맷을 무기로 내세워 세계를 제패했음이다.

중남미 가톨릭을 말할 때 빠질 수 없는 견해인 혼성주의(syncretism : 가톨릭과 중남미 전통신앙 혼성)가 흐르는 기막힌 미디어 문화산업 배합이 축구와 드라마를 합친 게라마에서도 꽃피웠다. 역사적 변천에서도 나타난다. 브라질 명품 축구는 삼바와 카포에이라 기술의 진보라고 한다. 손 묶인 노예였기에 발차기로 호신하고 카니발 축제 현란한 발 스텝으로 날개 짓하던 애달픈 잔혹사가 축구 실력을 잉태했다.

아울러 텔레노벨라로 대리 만족하고 비판하고 징벌하고 외치는 문화발산 문화융성이 축구경기 시청을 그대로 떠안아 엄청난 빅뱅을 일으켰다. 아침 드라마, 심야 극장 보듯이 축구 중계, 축구 뉴스에 몰입하니 브라질 사람들은 프로 축구 시장은 물론 스포테인먼트(스포츠+엔터테인먼트) 산업도 평정할 수 있었다.

이러한 게라마 위력을 보면서 한국형 비즈니스 모델을 그려 본다. 2002년 월드컵 4강이 꿈결같이 다가왔던 그 때가 절호의 찬스였는데 우리는 실기했다. K 리그부터 살리고 미디어 중계도 대폭 선진화했어야 했는데 무슨 냄비처럼 죄다 끓다 말았다. 히딩크 리더십도 유행가처럼 번졌었는데 이내 잊어버리고 파벌주의, 주먹구구 악습 그대로다. 게라마라는 개념을 이해했었다면 적어도 온라인 게임 종주국으로서 대작 게임 <FIFA>를 능가하는 킬러 콘텐츠가 한국 땅에서 벌써 생겨났을 게다. 세계 최대 게임업체 EA가 만든 FIFA가 게임산업을 반도체를 넘어 초대형 캐시박스로 커 가는데 결정적 기여를 해낸 것처럼 한국도 한 몫 할 수 있었다.
 

한국 방송영상산업도 2002 월드컵 열기를 게라마로 이어갔어야 했다. 숱한 역작들이 즐비한 한류 드마라들을 텔레노벨라 같은 멋진 브랜드로 묶는 상품화 전략도 보였어야 했다. 붉은 악마 열정과 에너지가 이후 프로야구와 K POP, 한국영화로 일부 흘러갔지만 유독 TV 드라마는 전 국민을 사로잡는 가치와 매력을 보여주지 못하고 흐트러졌다. 일부 중국과 동남아에서 드라마 한류 팬덤이 강대해졌지만 텔레노벨라와 같이 한국산 드라마를 한 줄로 요약할 수 있는 국민드라마, 국민콘텐츠는 2005년 <대장금> 이후 멸종된 채다.
 

때문에 2014 월드컵을 원 포인트 이벤트로 접지 말기를 바란다. 브라질 사람들이 신음해가며 세계인을 즐겁게 해주는 게라마, 즉 <축구+텔레노벨라>라는 황금 콘텐츠를 배워 익혀야 한다. 이런 창조적 몸짓은 단순히 축구를 소재로 한 드라마 제작 따위가 아니다. 드라마 영상을 게임화하는 시도부터 축구, 야구를 풍성한 스포테인먼트산업으로 발전시키고 궁극적으로는 아시아인, 세계시민 영혼을 매혹시키는 한류 중독까지 기획해놓는 과업이다.
 

한국은 e-스포츠나 모바일 게임에서 세계를 리드하는 히든 챔피언이기도 하다. 이런 게임산업 개발 능력을 막장 코드와 투자 부진, 저작권 무시, 불공정 계약에 찌든 한국 드라마산업에 침투시켜야 한다. 게임도 드라마 PD들 세련미, 만듦새 노하우를 적극 받아들여 장차 흡수 병합을 노리고 판교에 상륙한 중국 추격을 뿌리쳐야 한다. 이런 접합과 혼성 상호침투가 곧 게라마(게임+드라마) 라는 성공 법칙이 되어 미디어 산업을 지배할 수 있게 해준다.
 

스포츠와 미디어가 연인처럼 만나는 게라마 포맷 전략이라는 새 시도를 구상해보았다. 2002년 열기를 산업 발전에 생산적으로 돌리지 못했던 아린 경험을 상기하여 이번 월드컵 격정만은 꼭 미래창조로 승화시켰으면 한다. 축구 즐기듯 드라마 보고, 드라마 폐인 되듯 스포츠 게임 탐닉하는 스마트 콘텐츠 게라마 창조하기라면 한국사람 따라올 이 그 누가 있겠는가?  /심상민 성신여대 교수, 미디어펜 객원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