핏발세움 계급투쟁으로 고독 소외감 이길 수 없어, 공산주의도 환상

전우현의 민족과 자유의 새지평(3) 소외를 이기는 법: 대립할 것인가, 사랑할 것인가? 

민족주의는 우리 근현대사를 이끌어온 핵심 키워드이다. 일제의 36년간 식민지지배와 해방, 그리고 6.25북한의 남침, 남북분단 상황 등...민족주의와 민족이란 개념은 항상 보수와 진보, 우파와 좌파의 이념갈등에서 가장 첨예하게 부딪치게 만드는 핵심용어이다.  자유와 자유주의도 마찬가지다. 프랑스 대혁명이후 본격 발현된 자유주의는 서구의 근현대사를 추동한 핵심 키워드였다. 자유는 천부인권, 사유재산보호와 함께 서구의 시장경제와 자본주의 발달을 이끌었다. 반면 공산주의는 급진적 민족주의, 전체주의, 사유재산권 부정 등으로 인류사에서 끔찍한 재앙을 초래했다.  전우현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가 한국에서 나타나는 민족주의와 자유주의 이데올로기를 분석하는 시리즈를 연재한다. [편집자주] 

   
▲ 전우현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이라크 전이 격화되고 있다. 배럴당 두바이유(油) 가격이 이미 110달러를 넘어 가계와 기업의 회생이 어려워질 것이라고 전망하는 기사가 나왔다. 국제 비영리 싱크탱크 경제평화연구소(IEP)는 세계 162개국을 상대로 범죄, 군사, 사회 관련 지표를 평가해 평화로운 정도를 순위로 발표하는데 올해 우리나라는 52위라고 한다.

주목을 끄는 것은 갈등에 따른 사망자 수가 유독 많다는 대목이다. 며칠 전 오래간만에 만난 고교동창생이 작년에 죽을 뻔한 수술을 했단다. 친구들 아무도 모르고 외로이 생사를 오간 것이다.

이럴 때 삶이 메말라간다. 지갑은 팍팍하고 귀가길 전철칸 옆 사람에게 눈을 흡뜨기 쉽다. 세상 온통 나 혼자라는 소외감을 느끼는 탓이다. 가족, 친척들과 농사를 함께 지으며 느꼈던 일체감, 친밀성이 공장과 회사, 도시의 아파트에서는 사무적인 관계로 바뀌었다. 그래서 대립‧반목하는 일이 많아졌다. 또, 전근대사회와 달리 현대사회에서는 도태되지 않으려면 열심히 해야만 한다.

그러다보면 자아의 주인됨을 잃은 듯 상실감이 찾아든다. 소외, 갈등이라는 아노미가 생겼다. 이를 앓은지 이미 오래다. 자, 이제 어디로 갈까? 광화문에 나가서 다 정부가 해결하라고 외쳐볼까? 그렇게라도 하여 소외, 실업문제가 해결된다면 못할 것도 없다. 그런데 사실은 정부도 해줄 수 있는 게 별로 없다.

우리 한국사회를 앞서서 이끌어왔고 앞으로도 이끌어야 할 지식인들조차 소외의식과 허무에서 자유롭지 않다. 지식인은 높은 이상과 기대감을 갖고 있지만 한국사회의 현실은 언제나 그것을 채우기에 턱없이 부족하다. 지식인들의 소외의식은 직무에 대한 불만, 노동에 비해 모자라는 보상, 자기표현 기회의 부족에서도 나온다.

한국의 지식인들이 기존사회에 대해 거부하거나 냉소적으로 대하는 것은 여기에 기인하는 바도 크다. 지식인의 괴리감은 노동자, 농민, 회사원, 군인, 학생들에 비해 오히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다. 정말 큰 문제다. 지식인 스스로 갈등, 대립의 축으로 되기 때문이다. 많은 학생들, 대중들에게도 나쁜 영향을 주고 만다.

소외감에 내 이웃을 미워하고 시기하며 대립하는 마음이 생길 수 있다. 그러나, 상호이해와 협력 없이는 숙제를 풀 수 없다. 가난할수록, 몸 아플수록 형제끼리 반목하기보다 화해하고 협력해야 한다. 그 바탕은 사랑이다. 국내의 상처가 클수록, 국외에서 중국, 일본, 북한이 주는 상처가 깊을수록 우리끼리는 상처를 보듬고 치유해주어야 한다. 공통분모를 찾자. 아무리 바빠도, 살기 어려워도 이웃에게 눈을 흡뜨지 말고 상대방을 존중하며 예의를 갖추자. 우리 한민족이 부자(富者), 빈자(貧者) 가릴 것 없이 사랑의 시멘트로 묶일 때 재난, 침략, 모욕에 맞설 용기가 난다.

지금 어렵지만 정신적으로 뭉치면 물질적 풍요를 기약할 수 있다. 1%의 부자 때문에 99%가 가난하고 고통받는다는 식의 대립구도, 이분법(二分法)은 옳지 않다. 정말 졸부(猝富)들은 정신차려야 한다. 그러나, 부자를 왕따시킨다고 우리 100%가 행복해질까? 1%의 돈을 강제로 빼앗아(이는 불가능한 것이지만) 99%에게 나눠준다고 하여도 이런 방법으로 가난과 실업을 이길 수는 없다. 99% 중에서 다시 1%와 99%의 편가르기가 나타날 게 틀림없는 해법(解法)이다.

핏발세운 미움, 계급투쟁으로 고독, 소외감을 이길 수 없고 모두의 풍요를 구할 수 없다. 이미 100년간 실험한 바이다. 공산주의 혁명이 치료제가 되어줄 것이라는 환상은 틀려도 한참 틀렸다. 한민족의 분열과 6.25 동족파멸 전쟁만 불러오고 지금도 갈등의 뿌리로 작용한다. 부자와 권세가도 이웃에 대한 사랑, 배려없이 외로움, 불행감에서 벗어날 수 없음은 마찬가지다.

외로움(소외감)을 이기는 명약은 사랑이다. 건강한 성인으로서 삶의 두 가지 중심축은 일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니 사랑은 순간적인 열정만도 아니요 일순간에 깨달아지는 것도 아니다. 많은 경험을 통해 성장한다. 나와 이해관계가 없는 이웃, 나와 다른 한 인간을 사랑한다는 것 자체가 윤리적이다. 이러한 윤리성, 도덕성은 분열, 대립보다는 화합, 단결을 가져온다. 또, 사랑이 수반하는 열망은 이웃에게 마음을 열고 그 이웃의 마음도 열게 한다.

우리가 사랑에 의해 이웃에게 마음을 연다고 할 때 그 이웃의 모든 것을 무조건 칭찬하는 것은 아니다. 이웃이 잘못된 경우에는 그를 냉엄하게 비판해야 한다. ‘올바른 나, 올바른 너’를 향해 나아가고 내게 부족한 비타민, 네게 모자라는 단백질을 함께 구하자는 것이지 타락한 이웃에게 굴복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웃에 대한 사랑을 어느 누구의 강요에 의해 하지 않는다. 자발적으로 이 사랑을 나눔으로써 진정한 자유와 평등, 안전, 행복을 느낀다. 우리 한국 사회의 구성원들이 행복의 원천을 돈과 권력에서만 구하지 말고 이러한 사랑에서 구하면 좋겠다.

가장 많이 사랑하는 것이 가장 행복하게 되는 지름길임을 서로 알려주면 좋겠다. 사람은 무한한 선(善)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지만, 올바로 생각하지 않으면 악(惡)도 행하고 만다. 우리의 영혼이 이웃을 사랑하게 되면 바로 ‘선함’을 갖추는 것이다. 여기에서 벗어나면 냉정한 사람, 선(善)을 외면하는 사람이 되고 만다. 신을 믿든 그렇지 않든간에 사랑은 진리(眞理)와 이상(理想)으로 가까이 가는 열쇠이다.

그런데 이 사랑은 즉흥적이거나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이성적이고 지속적이어야 한다.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자신의 일을 통해, 그 성과 속에서 민족공동체를 번영하게 한다는 결의를 바탕으로 해야 한다. 탑을 쌓듯이 하나 하나 올려가는 것, 견고하여 오래가고 믿음직한 것이어야 한다. 실패나 실수 속에서 자책하는 사람을 따뜻하게 감싸주고 언제든지 패자부활전을 벌일 수 있게 해주는 사랑이어야 한다.

각자 모래알처럼 존재하는 개인들이 사랑의 윤활유를 매개로 “더불어 살아가는” 인격체로 재탄생한다. 우리가 이런 사랑을 할 때 국민통합‧민족통합이 이루어진다. 서로 사랑하고 사랑받는 모임체를 만들고자 노력할 때 지식인들은 그 선두에 서야 한다.

사랑이 어떤 힘을 가지는지에 대해서 깊이 연구한 것은 주로 종교나 철학이었다. 그러나, 우리 한민족은 종교나 어려운 학문을 빌지 않아도 가까운 이웃, 민족 모임체에 대한 사랑이 필요함을 느끼고도 남는다. 5천년에 걸친 수난과 한(恨)을 함께 했기 때문이다. 공동체 의식은 바로 여기에 뿌리를 둔다. 우리 국민을 통합하려면 이해와 사랑이 꼭 필요하다. 민족으로 이루어진 공동체의 일체감을 말할 때에도 사랑이 필수적이다. 사랑으로 우리가 맺어질 때 전국민과 한민족은 단결할 수 있다. 사소한 이해관계의 다툼이 있더라도 소통, 협력할 수 있다.

소외를 이기기 위해서는 대립보다 사랑이 낫다. 일가친척, 마을의 이웃에게 무관심하지 않고 배려하는 사람은 도덕적인 사람이다. 그러나, 더 널리 민족을 사랑하는 사람은 더 도덕적인 사람이다. 서로의 차이를 이해하고 사랑하는 바탕 위에서 한민족 단위로 힘을 모아야만 한다. 그 힘으로 외세에 대비하자. “국제 문제(外患) 해결없이 국내 문제(內憂) 해결없다.” 이것이 2014년 지금에도 민족주의적 사랑이 필요한 이유다. /전우현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