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월성 해자에서 출토한 나무 방패. 왼쪽은 손잡이가 없고 오른쪽은 손잡이가 있다. [사진=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미디어펜=윤광원 기자] 신라 경주 월성(月城·사적 제16호) 해자에서 1600년 전 무렵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나무 방패 2점이 발굴됐다.

월성을 발굴조사 중인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성벽에서 제물로 묻은 인골이 나와 화제를 모은 서쪽 A지구와 이에 동쪽으로 인접한 B지구 북쪽 1호 수혈 해자 최하부층에서, 실물이 거의 남지 않은 고대 나무 방패 2점을 찾아냈다고 2일 밝혔다.

방패 제작 시기는 모두 서기 340년부터 410년대 사이로 분석됐는데, 5세기 신라 방패는 경북 경산 임당동에서 출토된 적이 있으나, 월성 유물이 더 온전한 형태를 갖췄다.

한 점에는 손잡이가 달렸는데, 손잡이가 있는 고대 방패가 발견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이 방패 크기는 가로 14.4㎝·세로 73㎝이고, 두께는 1㎝이며, 손잡이가 없는 방패는 이보다 조금 더 커서 가로 26.3㎝·세로 95.9㎝·두께 1.2㎝다.

재질은 잣나무류이며, 손잡이는 느티나무로 파악됐고, 방패 겉면에는 날카로운 도구로 동심원과 띠 같은 기하학적 무늬를 새기고 붉은색과 검은색으로 칠을 했다.

이종훈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장은 "고대 방패는 고구려 안악3호분 벽화에 나오는데, 손잡이가 없는 방패는 의장용일 수도 있다"면서 방패에 그린 그림은 벽사가 목적이라는 견해가 있다고 말했다.

이 소장은 "일본에서는 고대 방패가 다수 출토됐는데, 실로 엮기 위한 구멍과 기하학적 문양이 월성 방패와 비슷하다"며 "한일 문화 교류사를 연구하는 데 도움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또 월성 수혈해자 최하층에서는 나무 방패와 제작 시기가 거의 동일하게 보이는 목제 배 모형도 출토됐다.

의례용으로 보이는 이 배 모형은 길이가 약 40㎝로, 국내에서 확인된 동종 유물 중에서 가장 오래됐고, 실제 배처럼 선수와 선미를 정교하게 표현했는데, 단순한 통나무배에서 복잡한 구조선(構造船)으로 나아가는 중간 단계인 '준구조선' 형태로, 불에 그슬리거나 탄 흔적이 확인됐다.

재질은 약 5년생 잣나무류이며, 제작 시기는 방사성탄소연대 측정 결과 4세기 중반에서 5세기 초반 사이로, 목선 중에는 이보다 시기가 이른 유물들이 있지만, 조각으로 발견돼 완전한 형태를 유추하기 쉽지 않은 상황이다.

이 소장은 "배 가운데에 불을 놓은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등불을 올린 뒤 물 위에 띄운 듯하다"며 "정확히 모르겠으나, 신라 왕실을 위한 의례용 유물일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카누처럼 길쭉한 배 모형의 폭과 길이 비율이 1:9로, 실제 배 형태와 흡사하다는 사실도 강조했다.

광주 신창동 유적이나 부여 쌍북리 유적에서 나온 고대 목제 배 그릇은 폭과 길이 비율이 1:3이며, 배 모양 토기는 장식적 요소가 매우 강한 편으로, 배 모형은 일본에서 500여 점이 나왔고 연구도 활발한데, 월성 배 모형과 비슷한 유물로 시즈오카현 야마노하나 유적에서 출토된 5세기 유물이 있다.

월성 해자에서는 신라 사회의 일면을 보여주는 목간들도 발견됐다.

한 목간은 삼면에 글자를 적었는데, 국보인 '단양 신라 적성비'에 등장하는 지방관 명칭인 당주(幢主)를 명기한 두 번째 사례다.

내용은 당주가 음력 1월 17일 곡물과 관련된 사건을 보고하거나 들은 것으로, '벼 세 석, 조 한 석, 피 세 석, 콩 여덟 석'(稻參石粟壹石稗參石大豆捌石)이라는 곡물과 수량이 적혀있다.

연구소는 월성 해자의 본래 모습과 신라인들의 식생활을 유추할 수 있는 단서도 확보했다.

월성의 해자는 반달 형태인 월성 북쪽에 길게 띠 형태로 조성했는데, 4∼7세기에 사용한 구덩이 같은 수혈해자에서 통일 이후 돌을 쌓아 만든 정교한 석축(石築)해자로 변경됐고, 수혈해자는 흙이 유실되지 않도록 북쪽에 나무기둥과 판재를 이용해 목제 구조물을 세운 것으로 확인됐다.

연구소는 2∼3세기 분묘 유적에서 많이 출토되는 수정 원석, 1호 해자 북동쪽 3호 해자에서는 석축해자 축조 혹은 의례 과정에서 한꺼번에 폐기한 것으로 보이는 철부(鐵斧·쇠도끼) 36점도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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