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 사실전달, 정의실현 아냐, 포털 기사선택 배치로 여론조작 문제

   
▲ 홍성기 아주대 교수
홍성기 아주대 기초교육대학 교수는 29일 "언론사들의 극심한 특종경쟁, 선정경쟁, 취재경쟁이 개인과 단체에 대한 명예훼손과 인격살인은 양산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홍성기 교수는 이날 자유경제원(원장 현진권)이 주최한 <언론권력의 왜곡 선전선동, 해법은 무엇인가>라는 정책토론회에서 패널로 참석해 이같이 강조했다.

홍성기 교수는 이어  " 언론과 개인 간의 불평등한 대화상황에서 선정적 기사를 만들기 위한 사실 왜곡과 과장이 일어날 개연성은 과거보다 훨씬 커졌다"고 말했다. 홍교수는 이어 "거대 포탈과 SNS를 통해 사실 왜곡으로 인한 폐해는 더욱 심해지고 있다"면서 "언론의 가장 큰 사명은 사실전달이지, 사회정의 실현은 아니다"고 강조했다.

문제는 언론권력의 대중조작과 감정적 보도가 국민여론을 심각하게 왜곡하고, 정책에도 심각한 부작용을 가져온다는 점이다. 개인이나 특정 집단에 대해 비난이 쏟아질 경우,  언론인의 ‘경쟁적 정의감’과 결부돼 격한 보도경쟁이 벌어진다는 것이다.

진보와 좌파의 감정적 보도에 의한 여론왜곡은 이명박정부와 박근혜정부 등 보수정권을 뒤흔들었다. 홍성기 교수는 "이명박 정부 시절 광우병 촛불시위의 경우 대재난에 가까운 혼란이었고, 세월호 참사의 경우에는 대통령의 ‘해경해체’ 및 ‘국가개조’라는 즉흥적이고 무책임한 결정, 문창극 전 총리 후보의 경우 강요된 사퇴로 이어졌다"고 진단했다.

홍성기교수가 이날 패널로 참석해 발표한 <언론의 자유의 본질>이란 토론문을 전재한다. [편집자주]

언론의 자유와 공익의 딜레마

사상의 자유는 시민적 자유의 핵심이자 토대이며 자유주의 정치체제의 본질적 요소이다. 언론의 자유는 표현의 자유에 속하고, 표현의 자유는 사상의 자유와 분리불가능하다. 그것은 머릿속의 사상이 표현을 목적으로 한다는 점에서 만이 아니다. 표현되지 않으면 사상은 구체성을 확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특히 일정 연령 이상 모든 사회구성원의 정치참여를 전제로 하는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는 바로 ‘자유로운 의사 형성’을 위하여 언론의 자유는 가장 기초적인 사회 인프라에 속한다. 따라서 모든 언론과 언론인의 사실 보도, 의사 표현, 해설, 비판은 매우 소중하게 보호되어야 할 자유이며, 같은 맥락에서 언론인들 역시 국가나 여타 사회적 권력으로부터 언론의 독립성을 강하게 주장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언론의 보도와 의견 표명이 공인을 대상으로 할 때는 ‘언론이 보도의 내용이 사실이라고 믿을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을 경우’ 설사 추후에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지더라도 명예훼손과 같은 형사소추로부터 면책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물론 언론의 의견 표명 역시 이런 맥락에서 이루어졌을 경우, 설사 공인의 명예가 실추되더라도 공익을 위한 언론 본연의 임무를 고려할 때 면책이 될 수 있다고 본다.

특히 언론의 의견 표명에는 ‘나쁜 의견’이란 없고 ‘사상의 시장’에서 소비자인 독자나 시청자가 스스로 판단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보는 경향이 있다. 즉 보도 내용의 사실성 확인을 지나치게 강하게 요구할 경우 언론의 자유가 위축될 수 있으며, 그것은 공익에 반한다는 것이 대략 언론의 자유의 한계 설정에 대한 언론인과 법률가들의 입장이다. 조금 쉽게 요약하면, 언론은 무엇이든 마음대로 이야기할 권리가 있고, 소비자는 여기서 마음에 드는 것을 골라서 받아들일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언론의 자유가 실현되는 사회의 모습이다.

그러나 언론이 비의도적으로, 어쩌면 의도적으로, 사실이 아닌 보도를 통해 개인이나 단체의 명예를 심하게 훼손하는 경우가 ‘공익추구’, ‘언론 본연의 임무’라는 이름 하에서 자주 일어날 경우, 나아가 그러한 사실 왜곡으로 인해 대중의 의사 형성과정을 심각하게 왜곡하여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투표행위나 공복(公僕)의 임명, 혹은 개인의 행복권에 심대한 악영향을 끼칠 경우, 언론이 이런 식의 ‘공익추구’를 통해 어떤 공익에 기여하려는 지 우리는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가 없다.

우리가 추구하는 사회가 ‘공익을 위하여’ 개인의 명예가 난도질 되어도 좋은 사회인가? 과거에 우리는 이와 비슷한 표현을 역사책에서 혹은 직접 들어본 기억이 있다. ‘민족을 위하여’, ‘국가를 위하여’, ‘당을 위하여’ 개인과 개인성이 압착되고 이 개인 탄압의 스토리는 진흙탕 역사의 수레바퀴 밑으로 들어가 잊히는 것...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추구하는 자유민주주의 사회의 모습이 아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혹은 다른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이 언론에 의해 공익추구의 이름으로 비일비재(非一非再)하게 일어나고 있다. 도대체 어디에 문제가 있는 것일까?

   
▲ 자유경제원이 29일 <언론권력의 왜곡 선전선동, 해법은 무엇인가>라는 정책토론회에서 KBS 등 언론권력의 선전선정 왜곡보도의 문제점을 진단하고, 바람직한 해법을 제시했다.

사상의 자유로부터 언론의 자유까지의 연결 고리를 살펴보면 답은 명백하다: 그것은 사실 왜곡 보도의 경우 ‘공익을 추구한다’는 언론의 자유가 개인의 행복권 침해는 물론 공익에 반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사상의 자유가 보장된 사회에서는 결과적으로 거짓을 말할 수 있음도 명백하다. 이 딜레마를 풀기 위해서는 더 이상 언론의 자유에 대한 통찰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우리는 언론의 자유가 속해 있는 사상의 자유의 근거와 본질을 들여다 볼 수밖에 없다.

사상의 자유: 대화의 평등성

서양의 사회철학에서 사상의 자유의 정당성을 가장 명확하게 제시한 철학자는 밀(J. S. Mill)이다. 그는 『자유론(On Liberty)』에서 사상의 자유가 필요한 4가지 근거를 제시하였다.

이제 우리는 의견의 자유와 의견의 발표의 자유가 네 가지 독립적인 근거로 인해서 인류의 정신적 복지(다른 모든 복지가 의존하는)에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
첫째, 만일 어떤 의견이 강제적으로 침묵되어질 경우, 그 의견은 진실일 수도 있다. (…) 이것을 부정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무오류성을 가정하는 것이다.
둘째, 설령 침묵된 의견이 오류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일말의 진리를 가질 수 있고 대체로 가지고 있다. (…) 그 진리의 나머지가 알려지는 기회는 오직 반대의 의견들과 충돌하는 경우밖에 없다.


셋째, 설령 일반적인 사회 통념이 진리일 뿐만 아니라 전체적 진리라고 하더라도, 만약 그것이 활발하고 진지하게 도전받도록 내버려두지 않거나 실제로 도전받게 하지 않는다면, 그것을 수용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그거의 합리적 근거에 대한 느낌이나 이해 없이 편견의 형태로 지지할 것이다. 넷째, 자유 토론이 없다면, 교리 자체의 의미가 상실되거나 약화되고, 개성과 행위에 대한 활기찬 효력이 상실될 위험에 처하게 될 것이다.(…) 
 

밀이 위에서 염두에 두고 있는 상황이 대화 혹은 토론임은 명백하다. 즉 진리의 발견과 진리의 의미를 분명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반드시’ 반대 의견을 허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어떤 주장을 ‘정당하다’고 부르기 위해서는 한 사람이 독단적으로 해답을 제시하는 독백 상황이 아니라 반론이 제기될 수 있는 대화 상황에서 상대방을 설득할 수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

이점은 강요나 회유, 폭력을 통해서 상대방의 동의를 얻을 수는 있더라도 그를 내심 설득할 수 없다는 점에서 실제로 명백하다. 즉 설득을 통한 정당화란 대화의 참여자 모두가 자유롭게 자신의 주장을 제시할 수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는 점에서 사상의 자유는 모든 정당화의 전제 조건이다. 여기서 ‘사상의 자유’가 ‘대화의 평등성’과 내용적으로 완전히 동치(同値)임이 분명해진다.

사상의 자유가 논쟁의 장에서 피할 수 없다는 점은, ‘사상의 자유를 부정하려 해도 사상의 자유를 요구하지 않을 수 없다’는 자기모순에서 분명하게 들어난다. 이런 점에서 사상의 자유를 근간으로 하는 자유주의는 사실상 선험적으로 그 정당성이 확보될 수 있으며, ‘정치체제’로서 자유주의의 우월성이 여기에 있다.

우리가 ‘나의’ 권리라고 생각했던 사상의 자유가 실은 ‘나와 너의’ 평등한 대화 상황이라는 점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시민적 자유가 개인의 소유물이라는 종래의 해석에서 자유란 사회의 운영과 작동에 연계되어 있음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즉 평등한 대화 상황이 아닌 곳에서 어느 일방의 독주는 그에게는 사상의 자유의 행사라고 생각되겠지만, 다른 일방에게는 불평등한 대화이며 따라서 사상의 자유의 심각한 제약으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다. 이점은 그 어떤 특수한 경우에 제한되지 않고 보편성을 지닌다는 점에서, 언론의 자유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지금까지 언론의 자유는 대략 언론사나 언론인이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으면 실현되는 것으로, 그리고 언론의 왜곡 보도에 대해서는 언론중재위원회와 같은 기구를 통해 반론을 보도함으로써 해결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언론과 개인은 일반적으로 대칭 관계, 즉 평등한 대화 상황에 놓여 있지 않다. 왜냐하면 언론과 개인 간의 논쟁적 대화 상황은 언론과 개인 모두가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다는 점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이 대화를 지켜보는 독자나 시청자와의 관계에서 규정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어떤 주제를 놓고 서로 상반되는 주장을 하는 대화에서 참여자는 자신에게 유리한 증거와 사실 그리고 견해를 인용하며, 상대방이 제시하는 근거를 인정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럴 때 두 사람간의 대화가 의미를 지니려면, 양자의 주장을 모두 들을 수 있는 일종의 심판관이라고 할 수 있는 제3자가 필요하다. 이 심판관이 언론의 경우 독자와 시청자들이다.

그러나 메가폰이나 대형 확성기를 들고 이야기 하는 자와 육성으로 이야기하는 자가 평등한 대화 상황에 놓여 있지 않은 것처럼, 현대 대중사회에서 개인은 언론과는 비교 불가능할 만큼 약자의 위치에 놓여 있다. 언론이 자신의 주장과 견해를 전파할 수 있는 능력은 현재 개인, 시민단체, 기업, 정당은 물론 정부보다 훨씬 더 강하다.

이런 점에서 언론과 개인의 논쟁적 대화는 결코 평등한 대화 상황이 아니며, ‘언론의 자유는 언론인만의 자유’일 가능성이 극히 높다. 지금까지 국내외를 막론하고 언론의 자유, 사상의 자유가 평등한 대화상황을 전제한다는 사실을 간과한 결과 ‘공익이라는 이름하에’ 공인에 대한 인격살인이라는 폭력을 방치한 것이다. 한 마디로 언론인과 법조인 모두 ‘벌거벗은 임금님’에게 공익이라는 상상의 옷을 입히고 못 본척하여 왔다.

불평등한 대화상황에서 ‘언론의 자유’가 실현될 경우

전통적으로 언론과 개인 혹은 집단 간의 비대칭적, 불평등한 대화 상황에 대한 보상책으로서 언론의 사실 보도, 공정한 보도에 대한 자율적 책임성 2014년 7월 25일 KBS1은 <KBS파노라마>에서 세월호 참사와 관련하여 언론 보도의 문제점을 자성하고 이를 시정할 수 있는 TF를 만들었다고 보도하였다.

그러나 언론의 자유에 대한 본질적인 성찰 없이 일종의 자기 PR식 ‘공정성 확보노력’을 강조하는 한, 그리고 문창극 전 총리후보에 대한 왜곡 방송을 변호하는 KBS의 태도를 보면서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자체 노력으로는 ‘KBS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점이다.

기사 작성에서 반론권 보장, 그리고 언론중재기관의 결정에 사후 오보 정정 기사, 끝으로 언론의 자유에 대한 심대한 남용의 경우 제재가 있어 왔다. 그러나 언론에 대한 제재의 경우 곧바로 ‘언론탄압’으로 간주되어 국제적으로 언론의 자유 및 민주화 정도에 대한 평가에서 한국은 불이익을 받기 일쑤다. 사후 정정 보도는 대부분 거의 효과가 없으며 한 번 발생한 명예훼손은 복구되기 힘들다.

특히 언론 보도로 바뀌어 버린 인생행로를 어떻게 되돌릴 수 있겠는가? 또한 자율적 책임성과 반론권 보장은 대부분 형식적으로라도 지켜지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이처럼 언론의 자유의 남용이 갖는 폐해가 시정되지 않는 이유는, 이런 폐해를 알릴 수 있는 유일한 방도가 바로 언론이기 때문이다.

언론 간의 극심한 경쟁은 특종 기사, 새로운 기사, 자극적인 기사를 양산하고 있고, 한국의 경우는 물론, 독일과 같은 선진민주주의 국가에서도 언론의 오보와 인격사냥으로 대통령이 물러나는 경우가 발생하였다. 2011년 독일에서 가장 나이 어린 대통령이 되었던 크리스티안 불프(Christian Wullf)는 그가 주지사로 있었을 때 지위를 이용하여 이익을 취했다는 의혹으로 여론의 집중적인 포화를 맞고 결국 사임하였다.

그러나 2014년 2월 독일 법원은 이 의혹이 전혀 근거가 없음을 밝혔고, 검사는 항소를 포기하였다. 불프는 자신의 경험을 『아주 높은 곳, 아주 낮은 곳(Ganz Oben, Ganz Unten)』이라는 책에서 기술하면서, ‘언론의 자유의 남용에 의한 인격살인에 대하여 독일 사회가 더 강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특히 주목을 끄는 것은 주간지 『자이트(Die Zeit)』에 전 총리후보였고 사민당 당수였던 슈타인브뤽(Peer Steinbrück)의 서평이다.

불프의 이야기 속에는 언론의 모든 자기조절, 적절성에 대한 감각과 법적 원칙에 대한 존중이 사라졌다. 50년 전의 슈피겔-사건은 정치가 비판적 언론과 언론의 자유를 무시하여 일어난 스캔들이었다. 지금은 그것이 거꾸로 되었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자 크리스티안 불프의 인격 파괴와 격추는 폭력적인 언론이 정치가를 다루면서 일어난 스캔들이 되었다. 불프의 경우, 언론의 자유의 날카로운 칼날을 고문의 도구가 되었다. () 나는 적절한 시간에 크리스티안 불프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보이지 못한 것에 대하여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다.

슈타인브뤽에 의하면 대통령 불프에 대한 언론의 마녀사냥의 배경은 언론 간에 극심해진 경쟁이다.

이점은 한국의 경우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공중파, 종편, 케이블이 하나의 광고시장을 놓고 시청률 경쟁을 벌이고 있고, 인구에 비해 일본 보다 많은 종합지와 인터넷 신문은 ‘클릭수’를 놓고 생존을 건 싸움을 벌이고 있다. 바꿔 말해 언론과 개인 간의 불평등한 대화상황에서 선정적 기사를 만들기 위한 사실 왜곡과 과장이 일어날 개연성은 과거보다 훨씬 크며, 거대 포탈과 SNS를 통해 사실 왜곡으로 인한 폐해는 더욱 심해질 것이다.

또한 사실 보도 보다 훨씬 관용의 정도가 넓은 언론의 ‘단순 의견표명’ 역시 언론과 개인 간의 불평등 상황에서는 공인 및 사인에 대해서 매우 심한 인권침해를 낳을 수 있다. 바로 이점이 언론의 의견 표명에 대하여 사실 왜곡 보다 훨씬 너그러운 사법부의 판단이 상식과 배치되는 것이다.

지금까지 법원의 판례는 언론과 개인 간의 불평등한 대화 상황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언론의 의견 표명을 마치 한 개인의 의견처럼 취급하여 왔다. 

“언론보도에 의한 명예훼손이 성립하기 위하여는 구체적 사실의 적시(간접적이고 우회적인 표현을 사용하여 그와 같은 사실의 존재를 암시하는 경우 포함)가 있어야 하고, 구체적인 사실의 적시 없이 단지 특정 인물이나 사건에 관하여 비평하거나 견해를 표명한 것에 불과할 때에는 명예훼손이 되지 않는다라는 대법원의 원칙적 판단은 사실의 적시에 의한 것이든 단순한 의견 표명이든 결과적으로는 한 개인이나 사건에 대하여 독자나 시청자가 ‘근거 없이 부정적 의견형성을 하도록 만드는 결과를 낳는다’는 점에서 정당성이 없다.

대법원의 입장은 언론의 의견 표명이나 개인의 의견 표명이나 차이가 없으며 마치 언론과 개인이 평등한 대화 상황에 있다거나, 언론에 의해 형성되는 ‘사상의 시장’에서 소비자가 자유롭게 특정 의견을 선택할 수 있다는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념이나 취향에 의해 분화된 언론 시장에서 서로 다른 언론매체를 두루 섭렵한다는 것은 쉽지도 않고, 설사 두루 섭렵한다 하더라도 자신의 이념과 취향에 맞는 의견 표명을 선호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문제는 이렇게 소비되고 있는 언론의 의견 표명이 사실에 근거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무런 근거도 없는 자의적인 의견 표명이고, 언론과 개인 간의 불평등한 상황을 고려할 때 언론에 의한 인격살인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는 점을 의미한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어느 누구의 긍정적인 견해에는 긍정적인 사실이, 부정적인 견해에는 부정적인 사실이 전제되어 있다’는 상식을 갖고 있다. 즉 대법원이 공인의 경우 명예훼손죄가 적용되지 않는다고 보는 언론의 단순 의견 표명의 경우에 일반인은 피해자에 대한 매우 잘못된 추측을 할 수 밖에 없다. 한국 대법원의 판단은 언론에 의한 단순 의견 표명이 마치 음식물에 대한 개인의 다양한 기호처럼 더 이상의 근거가 필요 없는 ‘감각적 행위’로 간주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언론의 의견 표명에 대한 대법원의 명예훼손죄 면책 선언은 한국 언론의 감정적인 보도 행태 및 극심한 언론 시장 내에서의 경쟁으로 인한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보도 내용과 결합하여 개인이나 단체에 대한 일상적인 명예훼손을 낳고 있다.

그리고 이런 보도 행태는 언론인들에게 마치 ‘언론 본연의 행동 방식’으로 이해되어 아무런 자책감이나 자기비판, 자기성찰 없이 이런 행태가 반복되도록 만들고 있다. 예를 들어 세월호 참사와 관련된 언론 보도에서 쏟아져 나온 감정적 표현은 모두 예외 없이 언론의 의견 표명에 속하고, 따라서 현재의 사법부 판단 기준에 의하면 면책사유가 된다.

특히 개인이나 특정 집단에 대해 비난이 쏟아질 경우, 언론 스스로 터널효과에 빠져 다른 관점에서 사건을 볼 수 있는 여유를 상실하고, 이것이 언론인의 ‘경쟁적 정의감’과 결부되어 더욱 격한 보도를 쏟아지도록 만들고 있다. 이런 감정적 보도에 의해 형성된 국민 여론은 왜곡된 것이지만, 정부와 정치인의 판단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특히 일정한 간격을 두고 일어나는 각종 선거로 정치의 여론민감성은 한국의 경우 극대화 되었다. 그 결과는 이명박 정부 시절 광우병 촛불시위의 경우 대재난에 가까운 혼란이었고, 세월호 참사의 경우에는 대통령의 ‘해경해체’ 및 ‘국가개조’라는 즉흥적이고 무책임한 결정, 문창극 전 총리 후보의 경우 강요된 사퇴로 이어졌다.

대법원이 언론의 단순한 의견표명이라고 보는 것이 정보통신 기술의 발달로 촘촘하게 연결된 현대 대중정보사회에서 거대한 폭풍이 되어 사회를 극도로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다. 그것도 ‘공익을 위하여’, ‘언론의 자유의 실현’, ‘사상의 시장의 자율적 규제’ 등 미사여구 밑에서 실행되고 있다는 점을 우리는 성찰해야 한다.

그것은 마치 과거 독재나 권위주의 시절에서 언론의 자유를 탄압하면서 사용했던 ‘미풍양속 보호’, ‘사회 안정’, ‘국가 안보’ 등의 구호와 조금도 다를 바 없다. 당시 언론의 자유를 제약했던 인물들과 기관도 이런 제약의 정당성을 확신하였다고 보아야 한다. 현재 한국의 언론인들이 갖고 있는 ‘주관적 정의감’이 바로 그것이다.

언론의 자유=불평등한 대화상황의 보상

이제 ‘언론의 자유의 실현’이 ‘언론인만의 자유 실현’이 아니라 ‘언론과 독자’, ‘언론과 개인’ 간의 평등한 대화상황의 복구에 있다는 점이 명백하여졌다면, 우리는 언론에 일방적으로 유리하게 되어 있는 불평등한 상황을 보상할 수 있는 방안을 구상해야 한다.

그것은 지금처럼 언론의 자율적 책임과 외부의 책임추궁으로 구성되겠지만, 그 핵심은 동일한 상황에서 출발해야 한다. 한국과 같이 정보통신 인프라의 완비로 정보 유통의 속도와 범위가 빠르고 광범위한 대중사회에서 ‘사실’과 ‘사실이라고 믿을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었으나 허위’와의 차이는 하늘과 땅처럼 극과 극이라는 점이다.

특히 ‘사실이라고 믿을만한 상당한 이유’는 대중들에게 허위를 사실로 인식하게 만들어 지속적인 인지장애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점은 아직도 미국산 쇠고기가 위험하다고 믿는 국민들과, 천안함 폭침이 북한의 소행이 아닐 것이라고 믿는 국민들의 비율이 적지 않다는 점에서 명백하다.

허위 보도를 통해, 그것이 명백한 허위이든 사실이라고 믿을만한 이유가 있든, 얻어지는 공익이란 전혀 없다는 점, 언론과 개인 간의 불평등한 상황을 보상할 수 있고 현실적으로 실현가능한 유일한 방법이 ‘사실의 보도’라는 점에서 언론의 자율적 보도 원칙이든 사법부의 명예훼손 면책사유에든 다음과 같은 내용이 포함되어야 한다:

개인의 언행(강연, 인터뷰, 발언 등)과 저작물을 보도할 때는 그 언행의 전체적 의미, 의도가 반드시 반영되어야 하며, 이에 대한 판단척도는 그 개인의 동의를 구할 수 있을 정도여야 한다. 이런 척도의 필요성은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언론과 개인의 비대칭적 대화상황을 고려할 때 명백하다.

언론이 종래에 반론권으로만 인정했던 당사자의 의견제시를 언론이 ‘완전하게’ 대신해 주어야 평등한 대화가 성립하며, 이를 전제로 해서만 논리적으로 언론의 비판적 의견표명이 허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KBS의 문창극 전 총리후보의 교회강연 동영상 방영이 이런 사실 보도의 전체성 위반에 해당한다.

언론이 특정한 사건이나 개인에 대해 보도할 때는 사실의 제시만으로는 불충분하다. 모든 사실은 특정한 맥락과 배경 하에서만 그 본래의 의미를 갖고 전달될 수 있으므로, 원래의 맥락을 벗기고 다른 사실들과 조합하여 만든 보도나 기사는 아무리 그 자체만으로는 사실이라 고집하여도 명백한 사실 왜곡이다.

이점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광우병 촛불시위 때 자칭 전문가와 언론의 사실 짜깁기이다. 또한 영상과 사진의 경우에도 모두 ‘사실을 보도하였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이 전체의 맥락과 배경에서 떨어져 나올 경우 본래의 의미를 잃어버리게 된다. 윤진숙 전 해수부 장관 사진 왜곡이 여기에 해당한다.

어떤 사실의 존재 여부를 보도할 때에는 단순히 ‘사실이라고 믿을만한 상당한 이유’만 갖고는 부족하다. 우리는 모든 허위에 대하여 그것이 ‘사실이라고 믿을만한 상당한 이유’를 발견하거나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사실이라고 믿을만한 상당한 이유’라는 무의미한 표현이 나온 배경에는 ‘객관적 사실 확인’의 과정에서 피할 수 없다고 보이는 ‘주관적 사실 추정’을 배제할 경우, 언론의 사실 관련 보도의 상당부분이 불가능할 것이고, 따라서 언론의 기능과 자유를 위축시킬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있다.

사실 우리가 객관적 사실이라고 알았던 것이 나중에 주관적 추정으로 들어난 경우도 과학사에서는 결코 드문 일이 아니다.(지동설과 천동설 모두 우리의 보는 시각에 달려 있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객관성과 주관성 간의 넘기 어려운 심연이 아니라, 실은 주관적 추정이 불가피하다는 이유로 ‘터널 효과’의 문제를 간과한 데에 있다.

언론인 뿐 아니라 모든 인간은 특정한 시각에 집착할 경우 다른 가능성을 보지 않거나 배제하게 됨은 인간의 인식구조상 피하기 힘들다. 따라서 터널 효과를 언론의 주관적 추정에서 배제하기 위한 조치가 반드시 필요하다. 그것은 ‘사실’, ‘의혹’, ‘추정’과 같은 용어를 사용하기 전에 첫째, 그 이외의 모든 가능성에 대한 성찰이 전제되어야 하고, 둘째 이러한 주관적 사실 추정과 다른 가능성 간에 비교할 수 없는 개연성의 차이가 존재해야 하며, 셋째 이 탐사 내지는 성찰과정이 재구성 가능하도록 기록되어야 한다.

만일 이런 과정을 거쳐서 한국 언론이 미국산 쇠고기의 안전성에 대하여 국제기구나 전문가 등의 판단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였다면, 미국산 쇠고기를 독극물로 간주하여 ‘비과학적인 나라에서 사는 불행’과 같은 선동적인 표현을 사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건이나 개인에 대한 보도에서 그 사실 보도와 언론사의 의견 표명 간에 분명한 경계를 그어야 한다. 세월호 침몰 시 구조과정에서 ‘급격히 기울며 침몰하는 선체에 올라갈 능력도, 용기도 없었다’ “세월호 침몰 현장에 가장 먼저 도착한 해경 123정은 급격히 기울며 침몰하는 선체에 올라갈 능력도, 용기도 없었다는 것이 해경 교신록에서 드러났다.

당시 해경 지휘부는 네 차례에 걸쳐 세월호에 진입하거나 승객들을 바다에 뛰어내리도록 조치하라고 독려했으나, 123정은 "이미 배가 기울어 진입도 탈출도 어렵다. 곧 침몰할 것 같다" "특공대 투입, 항공 구조가 급하다"는 답변만 되풀이했다. 한편으론 123정이 지시를 따를 수 없을 만큼 지휘부의 지시가 때늦은 것이 아니었느냐는 해석도 가능한 대목이다.” <조선일보> 2014년 4월 19일,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4/05/19/2014051900200.html?brief_news02> (2014.7.26.)
라는 식의 보도는 사실 보도와 의견표명 간에 직접적 인과관계를 설정하게 되어, 독자로 하여금 ‘선체에 올라갈 수 없었던 이유’가 ‘용기의 부족’에 의한 것으로 이해하도록 유도한다.

사실에 대한 의견 표명은 언론사의 자유에 속하지만, 일반적으로 사실과 이 사실에 대한 의견 간에는 명백한 인과관계가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해석과 가치 판단이 개입하게 된다. 그러나 인과관계가 사실의 영역에 속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사실 보도와 의견 표명 간의 경계가 없는 보도는 사실의 호도를 불러일으킬 가능성이 극히 높다.

적어도 ‘정론(正論)’을 표방하는 언론이나 공영방송은 보도에 있어서 독자나 시청자에게 불필요한 감정을 일으키지 않도록 어휘선택, 어조, 제목을 선택하고 편집을 해야 한다. 여기서 불필요한 감정에 속하는 것은 ‘언론인의 정의감의 발로에 의한 공분(公憤) 유도’도 포함되어야 한다. 즉 언론 본연의 임무는 ‘사실 전달’이지 ‘정의의 실현’이 아니다.

특히 언론인의 정의감이 사실 근거가 없는 경우가 비일비재한 한국의 상황에서는 사실 왜곡에 추가하여 국민의 공분을 통한 왜곡된 의사 형성을 막기 위해서라도 이런 식의 보도 태도는 지양해야 한다. 특히 언론의 임무를 ‘정부의 비판’으로 이해하는 것은 과거 권위주의 시절의 산물일 뿐이다. 무엇보다도 사실 확인 후에 정부 비판과 같은 의견 표명이 나와야 하지, ‘정부의 비판’이라는 시각 하에서 사실을 볼 경우 터널 효과에 잡힐 수밖에 없다.

우리는 ‘국정원 댓글사건’, ‘김용판 서울경찰청장 국정원 수사 개입 사건’에서 볼 수 있었듯이 ‘정부의 비판’을 본연의 사명으로 삼고 있는 언론이 어떤 결과를 만들어 냈는지를 현재 목격하고 있다. 특히 정의의 실현은 사회 전체의 협업에 의한 것이며, 여러 단계에서 ‘무엇이 정의의 실현인지’에 대하여 언론 이외의 많은 구성원과 기관들에 의한 토의가 필요하다.

언론이 정의의 실현에 기여할 수 있는 것은 1차적으로 의견 표명이 아니라 사실 전달이다. 특히 언론보다 훨씬 지적이고 성찰력 있는 사회구성원들이 매우 많을 수 있다는 점에서 언론의 의견 표명이 오만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상은 언론 내부의 보도 원칙으로서 뿐만 아니라, 공인에 대한 명예훼손과 관련하여 사법부가 면책 사유로 전제할 수 있는 내용이기도 하다. 다양한 보도 형태, 언론과 개인 간의 불평등한 대화 상황에도 불구하고 ‘사실이라고 판단할만한 상당한 이유’라는 무의미한 규정으로 이처럼 중대한 문제를 다루어서는 안 된다. 언론과 언론인 역시 ‘언론의 자유’를 ‘언론인만의 자유’로 오해하는 것은 과거 권력기관의 자의적 언론 탄압과 다를 바가 전혀 없다는 상식적 판단을 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과거 몇 개의 일간지와 몇 개의 공중파 그리고 몇 개의 주간지와 월간지가 전부였던 시절과는 달리 현대 대중사회에서는 공중파, 케이블, 종편, 종합일간지, 일반일간지, 인터넷 언론, 웹진, 아날로그 라디오 및 스트리밍 라디오 그리고 무엇보다도 페이스북과 같은 SNS 및 거대 포탈 등이 언론 내지는 언론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앞에서 열거한 언론의 사실 보도 원칙을 모든 언론 내지는 유사 언론에 요구하는 것은 무리이며, 이런 요구는 언론기관을 종교기관으로, 언론인을 종교인으로 간주하는 것이라고 비판할 수 있고, 이런 지적은 표현의 다양성 보장이라는 측면에서 충분히 고려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일단 정론을 지향하는 언론사의 언론인은 현대사회에서 어쩌면 종교인보다 더 강한 자기절제 능력을 발휘해야 하는 특수한 계층으로 볼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현대 대중사회는 집단지성이 아니라 집단광기로 인해 순식간에 야만 상태로 변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상존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필요한 것이 언론의 등급과 평가 체계 및 평가기관의 도입이다. 언론기관이 연구 및 교육기관인 대학을 평가할 수 있다면, 다른 기관이 언론에 대한 평가를 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즉 공정성에 따라 언론을 정론으로부터 전혀 공정성이 없는 황색언론까지 평가하여, 일정한 기준을 넘어서지 못하는 언론의 경우 학술 연구나 정치에서 인용이나 판단 근거의 대상으로 삼는 것을 사회적으로 금지하는 방법도 있다.

이럴 경우 현재 매체 영향력이라고 부르는 평가와는 전혀 다른 평가와 새로운 언론의 발굴도 가능하다. 특히 이와 함께 포탈의 경우 사실상 기사 선택과 배치를 통해서 사실상 언론기관의 중요도 평가를 하고 있다. 일개 사적 기업에 불과한 포탈에 사회의 공익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언론 평가기능을 허용할 수 있는지를 공론을 통해 결정해야 할 것이다. /홍성기 아주대 기초교육대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