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촌이 땅 사면 배 아픈 세태 민족주의로 치유해야

전우현의 민족과 자유의 새지평(12)-자유주의의 장점, 민족주의의 장점과 합쳐야

   
▲ 전우현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지난 9월 21일은 세계평화의 날이었다. 그러나 평화의 날이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오늘도 세계는 전쟁과 테러의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인간은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자신을 돌아보기보다 끊임없이 탐욕을 부리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 우리 인간들은 생존을 위해 상호 협동하는 지혜도 갖고 있다. 그래서 무엇인가를 만들어 낸다.

조금씩 조금씩 생산, 분배, 유통, 소비, 투자에 익숙해지면서 재산을 모아 가난, 질병을 이겨낸다. 자녀를 가르치고 더 나은 집을 짓고 옷을 만들어 입으며 남는 것은 교환하거나 판다. 병들거나 늙더라도 그 전에 벌어놓은 것을 가지고 대비한다. 하지만 이런 외길을 따라 걸으며 만드는 인간세상은 생각보다 더 복잡하다. 가난과 질병을 100% 이겨낼 수 없고 의식주 해결 정도도 개개인의 능력과 노력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자연스레 인간사회에 갈등이 생겼다.

생존의 문제에 갈등이 생기니 모든 일들이 합의하기 어려울 만큼 복잡해졌다. 이를 평등지상주의(공산주의)라는 이념으로 단칼에 해결해 보려고도 했다. 그러나 그것이 결코 해결책이 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이처럼 어렵고 복잡한 세상에서 우리가 산다. 이 점을 안다면 좌파의 선동이 얼마나 단순한지, 터무니없고 비현실적인 구호인지를 깨닫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으로 대중들은 국가가 가진 능력 이상의 것을 요구한다. 이러한 요구를 선거 때마다 한다. 이 요구를 선거 공약에 반영하지 않는 후보는 낙선한다. 이것이 포퓰리즘이 사라질 수 없는 이유다. 사정이 이러함으로 경제가 발전하고 가난에서 벗어나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다. 한민족 5천 년 역사에서 경제가 발전한 것은 몇 년 동안이었던가? 우리가 삼시 세끼 끼니문제를 해결한 것은 5천 년 역사에서 매우 예외적인, 일시적인 일이다. 어쩌면 다시 옛날로 돌아가는 것이 슬프지만 자연스러운(?) 과정인지도 모른다. 우리의 영혼이 깨어나고 피나는 노력이 없다면.

자유민주주의의 논밭(田畓), 공장(工場)의 가치를 무시하면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다. 지금처럼 포퓰리즘 행진을 계속할 때 가난을 면하기는 어렵다. 시계를 거꾸로 돌려 삼시 세 끼 끼니를 때우지 못하던 50년대, 60년대로 돌아갈 것이다. 이미 그런 징조가 나타난다. 젊은이들의 일자리가 없어지고 있다. 9급 공무원 채용시험이 수 백대 일의 경쟁이라고 한다.

필자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는 대학에 안가는 친구도 시험을 봐서 9급 공무원이 됐었다. 확실히 80년대보다 지금의 일자리가 적다. 젊은이들에게 직장이 없고 직장이 있어도 언제 잘릴 지 모르니 결혼을 늦추고 아이 낳기를 기피한다. 이는 기업의 고용능력이 점점 떨어지기 때문이다. 근본적으로 열심히 하는 사람을 왕따시키는 포퓰리즘의 영향이다. 열심히 하는 기업을 홀대하고 적대하니 다들 우리나라를 떠나 외국에 공장을 짓고 외국인을 고용한다.

성심성의껏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을 더 잘 가르쳐 좋은 학교에 가도록 지도하면 학생들을 줄 세우는 것이라고 비난한다. 공교육이 무너질 수 밖에 없다. 자연스레 돈 많이 드는 사교육 시장은 불야성으로 번성했다. 부모들은 등이 휜다. 돈 없는 부모는 부모노릇도 못한다. 그러니 경제적, 교육적 불평등은 더욱 가중되었다. 평등을 얻으려다가 자유도 평등도 모두 잃었다. 그러니 자유, 자유민주주의의 가치를 잊지 말아야 한다.

한편으로 자유주의는 개인을 매우 중시한 결과 개인주의가 지나칠 우려가 있다. 또, 책임감과 사랑이 부족할 수 있다는 것도 문제이다. 원래 자유주의는 봉건 전제주의, 토지귀족의 탐욕과 개인주의를 비판한 데서 출발하였다. 그러나, 그 자신도 사회적 책임감이 부족할 수 있었고 개인주의가 지나칠 수 있었다. 그에 반발한 공산주의, 사회주의는 한없는 사회적 책임감을 요구했다. 이처럼 자유주의의 대척점에 선 공산주의는 개인을 부정했다. 그리고 개인에 대한 폭력마저 정당화했기에 봉건 전제주의보다 더욱 잔혹했다. 그러니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는 도저히 자유주의의 대안이 될 수 없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민족주의가 필요하다. 개인의 존엄성, 자유를 부정하지 않으면서 자유인의 윤리적 도덕적 동기를 제공하는 것이 민족주의이기 때문이다. 우리 한민족에게 있어서 민족주의는 자유주의의 약점을 보완하는 이념이 될 수 있다. 민족주의는 반드시 큰 정부를 요구하지도 않는다. 필자는 아무런 부작용 없이 자유주의, 개인주의의 부족한 부분(도덕적 맹점, 오만함, 지나친 이기주의, 분열주의)을 해결할 수 있는 약초가 민족주의라고 생각한다.

자유주의(내지 자유민주주의)에서는 경쟁을 피할 수 없음이 자연의 이치라고 본다. 경쟁이 있어야 발전이 있음은 사실이다. 그런데 경쟁에는 탈락하는 사람이 나온다. 이러한 사람에게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한다. 무지막지하게 도태시키는 이분법은 너무나 비인간적이다. 한민족 안에서 민족의식으로 서로를 이해한다면 이러한 비인간적인 결과를 막을 수 있다.

승자는 겸손하고 패자는 승자를 인정해주는 공정한 게임룰도 만들어진다. 서로를 인정하지 않고 오만하거나, 시기질투에 불타오르는 싸움도 줄어들 것이다. 특히 자유경쟁에서 승리한 사람들이 사치 방탕하는 일이 도덕적으로 왜 나쁜지를 민족공동체 차원에서 잘 알게 해준다. 자유주의나 자유민주주의가 민족주의, 민족의식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기에 이것은 가능하다.

그리하여 한반도의 민족주의는 충분히 자유주의의 약점, 함정을 메운다. 서구의 자유주의가 서구가 아닌 이 곳, 한반도에서 수용됨에는 전통적 가치와 충돌하지 않게 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내세울 수 있는 안전판은 한민족 민족주의다. 자유주의의 개인적 속성을 약간이나마 우리 정서에 맞게 수정 보완하는 원리가 민족주의인 까닭이다. 중국의 경우 물질의 서구화, 근대화가 가져오는 공허함을 중화 정신(유교사상)으로 보완하려 한 것과 같다.

어느 사회나 외래의 흐름이 들어오면 그 충격, 폐해를 막기 위한 방어본능이 나온다. 우리 한민족 민족주의는 거의 5천 년에 걸쳐 형성된 생활 의식에서 나온 것이다(비록 민족주의에 대한 각성은 한말에 나왔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의식과 외래의 사상은 조화되는 것이 좋다.

그래야 자유주의, 자유민주주의도 연착륙(軟着陸)할 수 있다. 필자는 우리 사회가 너무 급속히 발전하다보니 가정교육, 학교교육, 사회교육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 현실을 많이 보아왔다. “내가 공부 잘해서 성공하면 그만”이라는 미숙아들이 우리 사회의 지도층이 되는 것은 큰 문제다. 자유주의, 자유민주주의를 잘못 이해한 것이다. 비록 자유주의 자체의 결함은 아니지만 자유주의가 얼마든지 오해받을 여지가 있다.

어쨌든 이는 이웃에 대한 이해와 사랑이 부족한 면이다. 그리하여 필자는 이해와 사랑의 결정체인 민족의식(民族意識)을 강조하고 싶다. 이 건전한 의식은 자유주의, 자유민주주의의 부족함을 메워줄 것이다. 자유주의의 장점과 민족주의의 장점을 합쳐야만 한다.  /전우현(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바른사회 시민회의 운영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