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러움의 정치'가 소득 양극화 불러...가난보다는 훨씬 덜 심각

<시장경제에 대한 그릇된 통념깨기 토론회-경쟁, 악(惡)인가>

진화의 관점에서 살핀 경쟁-복거일 소설가


   
▲ 복거일 소설가
끊임없는 경쟁은 가장 강인한 사람들도 지치게 한다. 사람들이 자본주의와 시장 경제를 두려워하고 배척하는 가장 큰 까닭이 그것들이 사람들에게 강요하는, 또는 강요한다고 여겨지는, 치열한 경쟁이라는 사실이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경쟁은 둘 이상의 개체들이 동시에 같은 자원을 얻으려고 애쓰는 상황을 뜻한다. 자원이 경쟁의 목표가 되는 것은 그것이 개체들의 생존과 생식에 필요하기 때문이다. 즉 경쟁의 궁극적 목표는 좋은 배우자를 얻는 것이다.

모든 개체들은 좋은 배우자를 얻어 생존 능력이 뛰어난 자식들을 낳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모두 탐내는 지위나 부와 명예와 권력은 그것들이 궁극적으로 좋은 배우자를 얻고 자식들을 잘 가르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삶의 근본적 조건은 자원이 제한되었다는 사실이다. 특히, 궁극적 자원인 좋은 배우자는 상대적 평가에 따라 결정되므로, 크게 제한되었다. 사회적 지위나 영예와 같은 것들도 골고루 평등하게 배분될 수 없다. 따라서 경쟁은 삶의 본질적 특질이며 결코 없어질 수 없고 줄이기도 쉽지 않다.

   
▲ 자유경제원(원장 현진권)에서 열린 <시장경제에 대한 그릇된 통념깨기 연속토론회-제 1차 “경쟁, 악(惡)인가”>에서 소설가 복거일 토론문을 발표하고 있다.
사람의 본능들이 형성되었던 시기에 사람들은 작은 부족들을 이루어 살았다. 그래서 부족 안에서의 지위는 개인들의 삶에 결정적 중요성을 지녔었다. 부족의 위계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한 사람들은 보다 풍요로운 삶을 누릴 수 있었고, 무엇보다도, 좋은 배우자들을 얻어서 뛰어난 자식들을 많이 낳을 수 있었다. 사회의 위계에서 낮은 자리를 차지한 사람들은 고달프게 살았을 뿐 아니라, 탐나는 배우자들을 얻지 못하거나 아예 배우자를 얻지 못했다.
 

그런 사회들에서 개인들에게 중요했던 것은 사회의 전반적 복지가 아니라 자신들이 사회의 위계에서 차지하는 자리였다. 설령 자기 부족의 생활수준이 다른 부족들보다 훨씬 높다 하더라도, 부족 안에서 자신이 차지하는 지위가 낮으면, 탐나는 배우자를 얻어서 뛰어난 자식을 낳을 수 없었을 터이다. 자연히, 사람의 마음은 자신의 지위와 소득을 다른 사람들의 그것들과 비교해서 판단하도록 다듬어졌다.

지금 우리도 그렇게 판단한다. 우리는 사회의 전반적 복지라는 큰 그림을 살피지 못하고 오직 자신의 상대적 지위와 소득만을 살핀다. 여기서 ‘부러움의 정치(politics of envy)’가 나온다.
 

당장 살아가는 데는 절대적 복지 수준이 중요하다. 그러나 좋은 배우자를 만나 좋은 자식들을 낳아서 생물적 목표를 이루려면, 둘레의 사람들보다 더 매력적이어야 한다. 남성들은 자식들을 낳아 기르는 데 충분한 부나 권력을 지녀야 하고, 여성들은 그렇게 좋은 조건을 갖춘 남성을 배우자로 얻을 만한 성적 매력을 지녀야 한다.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매력이든, 경제력이든, 권력이든, 모두 고루 가질 수 없다. 명예처럼, 사람들이 갈구하는 재화들 가운데 많은 것들은 희소하므로 가치가 있다. 모두 훈장을 받는다면, 훈장이 무슨 가치를 지니겠는가? 모두 명성을 누리거나 권력의 정점에 설 수도 없다. 매력도 본질적으로 상대적이다.

우리가 그렇게 비교하는 동물이므로, 우리는 우리보다 처지가 나은 사람들에 대해서 부러움과 미움을 품는다. 사회의 최상층에 자리 잡은 사람들을 빼놓으면, 모두 자신의 소득이 상대적으로 적다는 사실에 불만을 품게 되고, 그런 불만은 곧 자신들보다 사회적 지위나 소득이 높은 사람들에 대한 부러움과 미움으로 바뀐다. 자신의 처지를 보다 낫게 만들기는 아주 어려우므로, 그런 부러움과 미움은 자연스럽게 그런 결과를 낳은 체제에 대한 반감으로 발전한다. 그리고 보다 평등한 사회의 청사진을 내놓는 사람들의 추종자들이 된다.

부러움의 정치는 모든 사회들에서 소득 양극화를 심중한 문제로 만들었다. 소득 양극화는 물론 문제적이다. 그러나 그것은 가난이나 낮은 복지 수준보다는 훨씬 덜 심각한 문제다.
 

사람에게 궁극적으로 중요한 것은 복지다. 소득은 복지를 얻는 수단이다. 따라서 단기적으로는 복지의 최저 수준을 높이는 것이 긴요하고 장기적으로는 사회 구성원들이 평균적 복지를 늘리는 것이 중요하다. 다행히, 소득과는 반대로, 복지는 점점 격차가 줄어든다. 중세 사회에서 귀족과 평민은, 노예는 그만두고라도, 복지에서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그러나 현대에선 복지가 절대적으로 늘어나면서도 상대적 차이는 점점 줄어든다.
 

그러나 우리의 천성이 그러하므로, 소득 양극화는 중심적 문제로 남을 것이다. 대책도 시원치 않다. 다행히, 인류는 경쟁에서 진 사람들도 너무 불행해지지 않도록 하는 길을, 즉 개인적 자선과 사회안전망을, 발전시켰다. 경쟁에 진 사람들을 돕는 데는 물론 자원이 많이 든다.

자본주의와 시장 경제는 그런 자원을 잘 마련할 수 있다. 덕분에 사회 전체는 최대한의 복지를 누리며 불운하거나 가난한 사람들도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자원을 얻는다. 이런 시장경제는, 비록 불완전하지만, 인류가 지금까지 생각해낸 경제 체제들 가운데에선 가장 낫다.

(이 글은 15일 자유경제원(원장 현진권)에서 열린 <시장경제에 대한 그릇된 통념깨기 연속토론회-제 1차 “경쟁, 악(惡)인가”>에서 복거일(소설가)이 발표한 토론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