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평등책임, 자본주의에 전가하는 건 사회 몰락 부채질 다름없어

   
▲ 좌승희 미디어펜 회장
최근 자본주의는 부의 대물림을 통해 경제적 불평등을 심화시킨다고 주장한 피케티에 대한 열기가 뜨겁다. 지난 300년간 자료를 검토했더니 자본 수익률이 항상 소득 성장률에 비해 높고 이것이 경제적 불평등을 조장해 왔다고 주장한다.

이를 시정하여 보다 평등한 사회를 만들려면 예컨대, 상위 0.5-1% 소득계층에 80-90%, 5-10%의 계층에 50-60%의 고율의 한계세율을 부과하고 이것도 국제 이주를 통해 회피하지 못하도록 전 세계가 이에 동참하자고 역설한다. 그래도 자신은 자본주의 자체를 배척하지는 않는다고 물러서지만,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몇 가지가 관찰된다.
 

우선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로인해 그의 하나님인 칼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소멸론은 청산되었다. 마르크스는 「자본론」에서 자본에 대한 장기 이윤율 저하 법칙에 의해 자본주의는 성숙·소멸하게 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피케티는 300여년의 자료를 통해 그 동안 자본수익률은 하락하지 않고 자본주이가 더 번창해 왔음을 증명한 셈이니 공교롭게도 마르크스의 주장이 거짓임을 증명한 셈이 되었다.

그러나 여기서 더나가 자본수익에 대한 고율 세금으로 수익률을 낮추겠다는 주장은 결국은 인위적으로 자본주의를 청산하겠다는 것과 다름이 없는 셈이다. 여기다 더구나 80-90%의 세율이 어디 시장경제의 기본인 사적 재산권제도와 양립할 수나 있는 것인가. 피케티는 그의 말과는 달리 자본주의멸망을 갈구했던 마르크스의 틀을 못 벗어나고 있는 셈이다. 
 

   
▲ 성과의 차이에 따라 보상을 차등하여 일정 수준의 경제적 불평등을 유지하는 사회는 발전을 유도할 수 있지만, 성과의 차이에 관계없이 평등한 혹은 자의적인 보상체제를 강요하는 사회는 필히 몰락한다. 사진은 페케티의 강연 장면.

둘째로 그는 자본수익률보다 낮은 저성장율과 불평등의 원인에 대한 규명 없이 강력한 재분배만을 주장하고 있어 경제유인구조에 대한 고려가 전혀 없는 사회주의적 명령경제의 대증요법을 연상시킨다. 불평등을 초래하는 유인구조를 찾아 고치지 않고 재분배만 한다고 평등이 회복될 수는 없다. 그의 몰수적 고율과세정책은 유인구조의 왜곡을 통해 경제정체를 재촉하게 될 것이다.
 

셋째로, 보다 근본적으로는 경제발전의 원리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다. 저성장이 문제라 했지만 왜 저성장이 추세화되었는지 그럼 어떻게 해야 회복될 수 있는지 하는 담론이 전혀 없다. 그러니 성장률보다 높은 자본수익률을 깎아 내리는 일에 매달린 셈이다.
 

넷째로 필자는 경제성장·발전의 원동력은 성장의 유인과 동기를 높게 유지하는데서 나온다고 본다. 이런 상태는 각자의 경제에 대한 기여에 합당한 만큼 보상을 차등함으로써 유지 된다. 각자의 경제적 성과에 미흡한 보상체제를 유지하는 사회는 몰락하게 된다. 사회주의국가들의 몰락이 그 전형적 예인데 보상에 실망한 자들의 사보타지가 체제몰락을 가져온 것이다.

따라서 성과의 차이에 따라 보상을 차등하여 일정 수준의 경제적 불평등을 유지하는 사회는 발전을 유도할 수 있지만, 성과의 차이에 관계없이 평등한 혹은 자의적인 보상체제를 강요하는 사회는 필히 몰락한다. 그래서 피케티는 고율과세를 통한 과도한 재분배·평등 추구가 성장의 유인을 차단함으로써 중산층을 몰락시키고 오히려 역설적으로 하향 평준화된 불평등을 더 조장할 수 있음을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면 이는 그 동안 서구사회의 지속적인 저성장과 불평등의 원인이 역설적으로 바로 2차 대전 이후 만연되어온 재분배와 경제평등을 추구해온 수정자본주의, 사회민주주의에 그 원인이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기도 하다. 불평등은 번영의 전제이지만 평등은 번영의 안티테제이다.
 

다섯째로, 그럼 불평등의 원천은 어디인가? 시장은 바로 스스로 돕는 자만 도움으로써 성과에 따른 차등보상을 통해 성장의 동기를 부여하는 장치이다. 시장에서 구매력을 가지고 우수한 재화와, 개인과 기업만을 선택하는 우리가 바로 경제 불평등의 원천인 셈이며, 이런 우리 자신들을 꼼짝 못하게 묶지 못하는 한 불평등은 결코 해소될 수 없는 삶의 본질이다.

불평등의 책임을 자본주의에 전가하기에 앞서 책 팔아 가난한 자 도우기보다 부자 되러 한국에 온 피케티는 자신을 돌아봐야 한다. 그래서 피케티는 수식은 잘 알고 자료정리에 큰 기여를 하였다지만, “경제는 잘 모르는 경제학 기술자”의 한계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런 논평이 피케티의 글을 좀 더 이성적으로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길 바란다. /좌승희 미디어펜 회장, KDI 국제정책대학원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