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정부 큰 시장제창, 공익과 사익의 조화 추구한 경세가(하)
최종현 회장 라이프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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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의춘 미디어펜 발행인 |
1994년 1월 중순, 서울 을지로 SK사옥 최종현 회장 집무실에서 일어났던 대화다.
“회장님 얼마를 적어내야 할까요”(손길승 SK그룹 경영기획실 사장)
“우리가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특히 정부가 하는 거면 최대한 비싸게 사세요.”(최종현 SK회장)
손길승 사장은 고민하지 않고 질렀다. 그야말로 입이 쩍 벌어지는 엄청난 액수였다. 예상가격보다 몇 배나 더 됐다. SK는 세간의 특혜시비를 불식시키고 한국이동통신을 인수하는 데 성공했다. 인수가격은 4,271억 원. 한국통신의 한국이통 보유지분 23%인 127만 5000주를 주당 33만5000원에 인수하는 데 쓴 금액이었다.
한국이통주식은 SK가 인수하기 전 한 달 간 매일 상한가를 기록했다. SK는 당시 액면가에 비해 무려 30배를 주고 샀다. 한국이통 인수 당시 임원들은 시가보다 몇 배나 비싸게 주고 사는 것에 대해 반대했다. 최 회장은 지금 인수하지 못하면 5년 후에는 5000억 원을 더 줘야 한다고 했다. 10년 안에 1조~2조원의 이익을 낼 것이라고 예상했다. 정보통신이 향후 유망산업이 될 것이라는 점에서 인수금액에 구애받지 말고 반드시 인수하라고 지시한 것이다.
SK텔레콤은 SK그룹의 주력업종이 됐다. 한국 정보통신산업을 리드하고 있다. 세계IT업계 랭킹도 20위권으로 상승했다. 최 회장은 항상 10년 앞을 내다보고 경영을 했다. 60년대엔 경쟁사들이 직물생산에 주력할 때 폴리에스터 원사업체로 도약했다. 형에 이어 그룹경영권을 이어받은 후 실력을 발휘한 첫 번째 창업이었다.
제2 창업은 정유 사업 진출. 71년 선경석유를 일찌감치 설립한 후 정유 사업 진출을 꿈꿨다. SK는 80년 신군부가 유공을 매각할 때 삼성 현대 대우 상위 재벌들을 제치고 인수하는 데 성공했다. 미리 원유도입선과 정유공장 건설 등 치밀한 준비를 한 끝에 올린 개가였다. 결코 특혜로 인수한 것은 아니었다.
70년대엔 선경반도체까지 설립했다. 반도체사업은 접었다. LG와 삼성이 선발로 앞서간 상태였기 때문이다. 남들이 하는 사업은 하지 않는다는 게 최 회장의 경영철학이었다. 레드오션은 진출하지 않고, 블루오션에 선발로 진입해서 앞서가자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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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년 고 최종현 회장의 10주기를 맞아 SK그룹은 고인의 경영철학과 국가관 등을 재조명한 추모서적 '최종현, 그가 있어 행복했다'를 발간했다. |
제3 창업은 정보통신사업에 말뚝을 박는 것이었다. 80년대 중반 대한텔레콤을 설립한 것이 시발점이었다. 한국 이통을 인수하기 전 10년 전이었다. SK는 90년 노태우정부가 제2이동통신 사업자선정을 할 때, 포스코 코오롱 동부 동양 쌍용 등 경쟁사들을 압도적 점수 차로 이기고 사업권을 따냈다.
최 회장이 노대통령과 사돈인 것이 특혜설에 휘말렸다. 최 회장은 “저희는 이번 사업자 선정에 정당하게 임했다. 만약 부당한 일이 있었다면 기꺼이 물러날 것이다”고 밝혔다. 근거도 없는 특혜설은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았다. 여권의 김영삼 대통령 후보도 이를 취소할 것을 요구했다.
정치권과 언론은 특혜설을 부추기는 불쏘시개 역할을 했다. 정부는 일주일 만에 사업자 선정을 취소했다.
최 회장은 제2이통사업을 포기한다는 결단을 내렸다. 그는 “이통사업을 포기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잠시 미룰 뿐이라고 했다. 4년 후 최 회장은 마침내 한국이통을 인수했다. SK텔레콤은 현재 세계 IT업계 20위권 업체로 발돋움했다.
최 회장은 창업주는 아니지만, 창업 1.5세대로 불린다. 73년 창업주인 그의 형 최종건회장이 타계하면서 경영권을 승계했다. 회장취임 이후 에너지 및 화학, 정보통신을 양대 축으로 발전시켰다. 그는 재계 10위권의 중견그룹에 불과했던 SK그룹을 타계직전엔 5위 그룹으로 도약시켰다. 현재는 삼성 현대차에 이어 재계3위에 랭크돼 있다.
최 회장의 사업궤적을 보면 80년대까지 ‘석유에서 섬유까지’라는 수직계열화를 구축하는 데 주력했다. 수직일관생산체제 구축은 재계에서 처음 선보인 것으로 재계에 상당한 영향을 줬다. 90년대 이후는 정보통신과 IT분야 투자에 힘을 쏟았다.
최 회장은 1세대 총수 중에서 드물게 실물경험과 이론을 겸비했다. 50년대 서울대 농대 재학 중 미국 위스콘신대 생화학과에 편입해서 졸업했다. 시카고대 경제학대학원에서 경제학 석사 학위까지 땄다. 대부분 총수들이 국내파나 일본파가 많았던 시기에 일찌감치 미국유학파로 글로벌 경영감각을 선보였다.
그가 그룹경영에 본격 참여한 것은 62년 11월 미국 유학중 급거 귀국하면서부터다. 시카고 대학원 시절 장차 국회의원이 되거나, 언론인으로서 국민들을 계몽하는 칼럼니스트를 꿈꿨다. 부친은 다급하게 빨리 귀국해서 형의 사업을 도우라고 했다. 그는 오자마자 선경직물 부사장으로 취임했다. 회사는 적자에 허덕였다. 직원들은 몇 달째 월급을 받지 못했다.
그는 미국 유학시절 사귄 미 8군사령부의 장교로부터 중요한 정보를 얻어 인견사(인조비단용 실) 수입권을 최대한 사들였다. 이게 대박을 쳤다. 미국(미국대외원조처)이 이듬해 원사수입권을 가진 한국회사만 실을 수입할 수 있도록 하는 조치를 내렸기 때문이다. 최 회장은 다른 무역상들로부터 사들였던 원사수입권을 이용해 실을 대거 사들여 비싸게 팔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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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내 1위 업체이며 현재 세계 IT업계 20위권 업체로 발돋움한 SK텔레콤. 사진은 하성민 SK텔레콤 사장/뉴시스 |
박정희군사정부의 수입 제한 및 수출장려정책도 호기로 작용했다. 나일론실크원단을 홍콩에 대규모로 수출하는 데 성공했다. 자금난에 숨통이 트였다. 그가 부임한 지 1년만인 63년에 밀린 빚을 갚았다. 직원들의 임금도 모두 지급하고도 돈이 남았다.
선경직물은 60년대 중반 보유 직기 1천대가 넘는 국내 최대 직물기업으로 도약했다. 그의 다음 도전은 폴리에스테르 원사공장을 짓는 것이었다. 직물은 유행을 타면서 경영부침도 심하지만, 직물의 원료인 원사사업은 부침이 없었다. 하지만 돈과 기술이 문제였다.
일본에서 기술도 들여오고, 자금도 조달해야 했다. 자본금 5000만원에 불과했던 선경직물은 32억 원이나 되는 원사공장투자를 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형 최종건도 동생의 대담한 구상에 혀를 내둘렀다.
최 회장은 일본으로 날아가 데이진과 기술이전협상을 벌였다. 데이진은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한국의 조그만 중견 직물업체가 원사공장을 짓겠다는 것에 대해 신뢰를 하지 않았다. 그는 수십 차례 일본행 비행기를 탔다. 번번히 고배를 마셨다. 기술 없는 서러움을 뼈저리게 절감했다.
일본 이토추상사로부터 도요보로부터 폴리에스테르 원사공장 기술이전을 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최 회장은 '노(No)'라고 했다. 도요보기술로는 일류 폴레에스테르원사메이커로 도약할 수 없다고 봤기 때문이다. 기업은 당장의 오늘보다 내일의 경쟁력을 생각해야 한다는 게 최 회장의 지론이었다.
데이진은 최 회장의 의지와 기업가정신에 감동했다. 마침내 기술이전을 해주기로 합의했다. 투자자금도 데이진의 지급보증과 정부의 수입대체를 위한 외화자금지원으로 해결했다. 직물공장에 이어 폴리에스테르 원사공장까지 가동한 선경직물은 국내 최고의 섬유업체로 발돋움했다.
그의 기업가정신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폴리에스터 원사개발에 이어 폴리에스터 필름 국산화에 출사표를 던진 것. 원사 기술이전과정에서 숱한 굴욕과 수모를 당했던 그는 폴리에스터 필름만은 자체기술로 개발하고자 했다. 그룹을 자금난에 빠지게 했던 폴리에스터 필름개발 사업은 험난한 여정이었다. 그는 결코 포기하지 않고 연구진을 독려했다. 마침내 연구진은 자체개발에 성공했다. 최회장은 생전 인생 최고의 순간으로 이때를 꼽았다.
80년에는 비디오 테이프도 개발하는 성과를 거뒀다. 미국 3M, 독일 바스프, 일본 소니에 이어 세계 4번째로 이룩한 성과였다. 세계최고를 추구하는 일등주의, 선진국 기업을 따라잡아야 한다는 도전정신, 남보다 앞서야 한다는 혁신의 열정이 낳은 귀중한 열매였다.
최 회장은 75년 ‘석유에서 원사’까지 수직계열화를 선언하고 제2창업에 나섰다. 80년 11월 유공을 인수한 것은 SK그룹사에 획기적인 이정표가 됐다. 그룹 사업 구조를 석유에서 원사까지 수직계열화를 완성하는 계기가 됐기 때문이다. 최 회장은 70년대 초기부터 정유사업을 추진해왔다.
73년 일본과 합작으로 선경석유를 설립했다. 온산에 하루 15만 배럴의 정유공장을 건립한다는 청사진도 마련했다. 이란, 사우디아라비아 실력자들과 친분을 쌓았다. 사우디로부터는 SK가 정유공장을 지으면 원유를 공급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중동전쟁이 발발하면서 최 회장의 정유프로젝트는 수포로 돌아갔다. 일본 측이 합작을 포기한데다, 사우디등으로부터 원유 공급전망도 불투명해졌기 때문이다. 석유수출국기구(OPEC)에서 이스라엘과 우호적인 국가에는 원유공급을 중단한다는 선언도 했다. 이후 최 회장은 사우디실력자와 두터운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80년 신군부가 들어섰을 때 그의 진가가 드러났다. 사우디정부는 한국에 대한 원유공급을 더 이상 줄 수 없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동자부장관은 몇 번이나 사우디로 날아가 당시 야마니 석유상을 만나려고 했지만 번번이 거절당했다. 석유공급이 끊길 국가적 위기였다. 신군부도 최 회장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는 사우디정부를 움직여 하루 5만 배럴씩 공급받기로 합의했다. 정부도 못한 일을 최 회장이 사우디왕가와의 탄탄한 인맥을 활용해 성사시킨 것이다.
SK가 유공을 인수한데는 원유도입 능력과 사우디와의 탄탄한 네트워크가 결정적인 밑거름이 됐다. 정경유착으로 유공을 품에 안은 것은 아니었다. 유공은 이후 SK에너지로 상호를 바꾸고 한국을 대표하는 에너지업체로 도약했다.
최 회장이 타계하기 전인 97년 그룹외형은 45조원으로 재계5위였다. 98년 8월 최 회장이 타계한 후 장남 최태원 회장이 경영권을 승계했다. 최태원 회장은 선친에 이어 에너지화학 및 정보통신을 핵심 축으로 하면서 사업다각화에도 적극 나섰다. 2012년 하이닉스반도체를 인수하는 등 수성에도 성공했다. 2014년 그룹 매출은 142조원으로 삼성 현대차에 이어 재계3위를 차지하고 있다.
최 회장은 단순 사업가라기보다는 보기드믄 경세가였다. SK그룹의 발전만을 꿈꾸지 않았다. 국가발전에 많은 고민을 했다. 전경련회장 시절 국가경쟁력강화에 매진했다. 그룹이 정부의 탄압을 받는 것을 감수하면서까지 한국을 세계1등 국가로 만들기 위한 전략을 제시하는 데 힘썼다. 그는 정부에 대한 쓴 소리를 그만하고, 사업에나 신경 쓰라는 부인 고 박계희 여사의 간청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나라경제를 위해서라면 내 사업이 타격을 입더라도 나서야 한다”는 소신을 피력했다.
그는 죽기직전까지 원고를 썼다. 말기 폐암투병을 하느라 산소 호흡기를 맨 채 <21세기 일등 국가가 되는 길>을 직접 집필했다. 그는 이 땅의 척박한 기업풍토에서 자유주의 시장경제의 기치를 내걸고 우리경제와 기업이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했다.
타계직전 산소통을 매고 청와대를 찾아간 것은 ‘재계총리’로서 국가를 구해야 한다는 절박한 위기의식에서 나왔다. 공자가 성인과 충신의 사례로 든 견위수명(見危授命)에 해당한다. 나라가 위태로울 땐 목숨을 아낌없이 바치는 사람이 성인이요, 충신이라고 했다.
SKMS는 최 회장이 70년대 창안한 경영원칙과 가치였다. SKMS는 패기 지식 사교 자세 가정 및 건강관리 등 핵심부문별로 SK맨이 되기 위한 자격요건을 정립했다. 수펙스(SUPEX)는 SKMS를 실천하려는 지침이었다. 수펙스는 인간의 능력을 이룰 수 있는 최고의 단계를 계속 추구하는 것이다.
수펙스 5단계 추구법도 제시했다. 첫째 회사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필요한 일이 무엇인지 파악한다. 둘째 파악한 일을 성공시키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찾아낸다. 셋째 그 성공요소를 바탕으로 수펙스 목표를 세운다. 넷째 수펙스 목표를 이루는데 장애가 되는 것이 무엇인지 파악한다. 다섯째 패기로 장애를 극복한다.
청년들을 위한 공익사업도 많이 했다. 70~80년대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던 MBC ‘장학퀴즈’는 최 회장이 고등학생들의 면학분위기를 고취하기 위해 그룹차원에서 지원한 인기프로그램이었다. 가정환경이 어렵지만, 학업성적이 우수한 학생들을 장학퀴즈에 참가시켜 장학금을 줬다.
현재는 EBS에서 장학퀴즈를 진행하고 있다. 중국베이징TV는 중국판 장학퀴즈인 ‘SK장웬방’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최태원 회장이 중국진출에 각별한 관심을 가졌던 선친 최종현회장의 유지를 받들어 이 프로그램을 지원하고 있다.
그는 세계최고의 대학을 만들려는 원대한 꿈도 간직하고 있었다. 74년 설립한 한국고등교육재단은 세계적인 학자를 육성하려는 장학 사업에서 비롯됐다. 그의 평생 꿈은 자신이 공부한 미국 시카고대학과 견줄 수 있는 대학원 중심의 대학을 한국에 설립하는 것이었다.
고등교육재단을 통해 세계적으로 탁월한 학자를 키우려 한 것. 해외유학생으로 선발된 학생들에게는 미국 유명대학 등록금 전액과 5년간의 생활비까지 파격적으로 지원했다. 그가 74년 충북 충주시 산척면과 동량면에 있는 헐벗은 인등산을 사들여 가래나무 150만 그루를 심었다. 30년 후 목재를 생산해 장학 사업을 위한 종자돈으로 활용하려 했다. 그는 인재육성에 남다른 열의와 관심을 가진 기업가였다. [미디어펜=이의춘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