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아시아 금융위기로 대규모 외자유출이 이뤄진 후 러시아 중앙은행은 연이은 금리인상을 단행했다. 1998년 5월 일주일간 150%의 고금리를 유지했다. 이후 8월 모라토리엄(채불상환 지급유예)을 공식 선언하고 루블화 33.7% 평가절하를 단행했다. 당시 외환보유고는 147억 달러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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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6일(현지시간)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시민들이 환전소에서 루블화를 달러로 바꾸려 줄지어 서 있다. 루블화는 이날 러시아 중앙은행의 금리 인상에도 불구하고 가치가 20% 떨어졌다./뉴시스 |
현재 러시아 상황은 유가하락, 루블화 절하, 대외환경 악화 등 1998년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 1998년 러시아의 디폴트(Default, 채무불이행) 재연될까 전세계가 긴장하고 있는 이유다.
정부도 '통화금융대책반'을 마련해 러시아 루블화 폭락과 그 영향력이 신흥시장국으로 확대될 가능성과 우리 외환시장, 채권시장의 변동성 파급력에 대한 대책에 고심이다.
17일 국제금융센터와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 11일(현지시간) 러시아 중앙은행 통화정책회의에서 정책금리를 지난 11일 100bp 인상 발표 이후 예고없이 650bp 재인상 결정을 단행했다.
이번 인상폭은 지난 1998년 모라토리엄 선언 이후 최대다. 올 들어 여섯번째 금리인상으로 정책금리는 연초대비 1150bp 상승했다.
이와 동시에 환매조건부채권(Repo) 거래를 통한 시중 외화유동성 공급량을 기존 15억 달러에서 50억 달러로 확대조치했다.
러 중앙은행의 이같은 깜짝 금리인상은 유가급락에서 비롯됐다. 러시아 당국이 루블하 절하와 인플레이션 압력의 필사적 방어의지를 보여준 결단이다.
국제유가는 배럴당 61.06달러로 하락해 러시아 경기침체 우려가 깊어지면서 루블화 절하 흐름을 이어갔다. 브렌트유는 연초대비 44.9%로, 최근 3개월간 40.8% 하락했다.
덩달아 달러화대비 루블화 가치는 연초대비 95.4%, 바스켓대비 89.8% 절하됐다. 11일 금리인상 이후에도 이틀연속 사상 최저치를 경신했다. 지난 15일에는 10.2% 급락했다.
더불어 루블화 급락과 식료품 수입금지 조치로 인한 수입물가 상승의 여파가 심했다. 러 소비자물가는 11월 소비자물가지수(CPI)는 지난해 같은기간과 견줘 9.1% 상승해 전월(8.3%)보다 가속화됐다.
러 중앙은행은 "유가가 배럴당 60달러 선에서 지속될 경우 내년 경기침체가 예상된다"며 "물가는 내년 1분기 11.5%로 정점에 도달할 전망이어서 긴축기조를 내년에도 유지할 수 있다"고 언급했다.
시장참여자와 외신들은 이번 러시아의 조치를 루블화 급락에 대한 최후의 방편으로 평가했다.
파이낸셜 타임즈는 "러 중앙은행은 시장에 충격을 주는 기법으로 루블화 붕괴를 허용하지 않을 것"으로 분석했다. 뉴욕 타임즈는 "전격적인 러 금리인상은 과거 신흥국 외환위기에서 볼 수 있는 것"이라며 "현재 러시아가 경험하고 있다"고 전했다.
올해 터키의 경우 자국의 통화가치 방어를 위해 7.75%에서 12.0%로 금리를 대폭 인상했다. 브라질도 헤알화 가치 40% 급락으로 정책금리를 45% 인상한 바 있다.
문제는 극단적인 통화긴축 조치로 인한 거시경제의 충격이다. 추가적인 약세가 이어질 경우 금융시장은 혼란에 빠질 가능성이 크다.
스탠다드 뱅크는 "현재의 금융불안은 유가 외에 경제제재, 지정학적 리스크, 당국의 정책결정 결여 등 혼재된 결과"라며 "러시아 경제에 대한 투자자들의 신뢰도가 더욱 저하될 수 있어 대규모 예금인출, 뱅크런의 위험이 있다"고 경고했다.
AP통신은 "러시아 경제의 추가 악화는 투자자들의 자금 이탈을 불러일으킬 수 있어 루블화 가치의 추가하락으로 이어질 소지가 있다"고 우려했다.
금리인상 이후 루블화 반등이 역전되지 않을 경우 러 당국의 자본통제가 예상되지만 쉽지만은 않다. 앞으로 유가하락과 자본유출이 지속될 경우 신용등급 강등, 외환보유고 소진 등 디폴트 야기 요인이 부각될 수 있다. 루블화 급락세를 막는 방어책으로 금리인상이 능사가 아니라는 뜻이다.
박미정 국제금융센터 연구원은 "유가 하락세가 지속될 경우 러시아 이외에도 베네수엘라, 브라질 등 원자재 수출국 통화와 금융불안이 동시에 확대될 수 있다"며 "신흥국 전반의 직간접적인 영향이 확대될 소지가 있다"고 말했다.
정부는 러시아 금융시장 불안이 국내금융시장에 미치는 영향이 극히 제한적일 것으로 예상했다. 이날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올 9월말 현재 국내 금융회사의 러시아에 대한 외화익스포져(위험노출액) 잔액은 13억6000만 달러로 미미한 수준이다. 전체 1083억4000만달러의 1.3%에 불과하다. 반면 러시아, 인도, 인도네시아 등 주요 신흥 12개국의 익스포져는 113억3000만달러(전체 10.5%) 수준이다.
금감원 관계자는 "국내은행들의 만기 차입금 차환은 원할히 이뤄지고 있다"며 "조달금리 수준도 큰 변동 없는 등 외화자금시장은 안정적인 상황을 현재 유지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지난해 대러시아 수출은 전체 수출액의 2% 정도 차지한다. 대외기관에서는 수출을 하지 못하는 충격을 볼때 직접적으로 GDP에 미치는 영향은 0.6% 정도 하락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정부도 이런 점을 들어 단기적으로 큰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간접적인 영향을 고려해보면 긍정적인 측면만 기대할 수는 없다. 수출의 경우 러시아에 대한 교역이나 금융거래가 활발한 곳은 유로존이다. 유로존에서의 대러시아 교역이 감소되면 가뜩이나 경기침체 둔화 우려에 빠져있는 유로존의 회복력, 구매력, 수출교역량이 전세계적으로 줄어들 수 밖에 없다.
우리도 예외는 아니다. 러시아에 대한 수출 뿐만 아니라 유로존 수출 감소에도 타격을 받을 수 있다.
서정훈 외환은행 경제연구팀 연구위원은 "러시아에 돈을 많이 빌려주는 곳은 유럽계인 만큼 채무동결되고 모라토리움을 선언하게 되면 신용경색에 걸릴 수 있는 우려때문에 신흥국에서 자금을 뺄 가능성이 있다"며 "우리나라의 자금이 급격히 유출될 가능성이 있고 단기적으로 환율변동성이 높아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