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러브레터>가 개봉했던 1999년, 중학생 시절의 이야기다. 체육복을 잃어버린 탓에 분실함을 뒤져 겨우 입을만한 옷을 발견했다. 등에는 대문짝만하게 ‘오겡끼데스까’라고 적혀 있었다. 고민 끝에 이를 빨아입는 대신 문구를 조금 수정하기로 했다. ‘오뎅과 메스꺼운 초밥’이라고. ‘러브레터’는 중학생 시절 이같은 ‘단편적인 기억’으로만 남아있던 단어였다.

그로부터 16년이 지났다. 가물거리는 기억 대신 편안한 마음으로 극장을 찾았다. 그러나 ‘첫사랑과 오겡끼데스까’로만 남아있던 기억이 하나 둘 퍼즐처럼 맞춰지고, 그가 하나의 그림으로 완성되는 순간 가슴으로부터 밀려올라오던 눈물이 결국 눈시울을 넘어서고 말았다. 첫사랑에 대한 미련도, 지난 연애에 대한 아쉬움 때문도 아니었다. 사랑, 사랑의 맨얼굴과 마주한 것이 얼마만이던가….

   
▲ 뮤지컬 <러브레터> 공연장면 / 사진=PAC Korea

히로코는 2년 전 죽은 약혼자 이츠키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우연히 알게된 그의 옛 주소로 편지를 보낸 그녀는 얼마 후 ‘이츠키’라는 이름으로 답장을 받는다. 그가 연인의 중학교 동창이자 동명이인이라는 것이 얼마 지나지 않아 밝혀지지만, 그녀는 그래도 이츠키와의 연락을 끊을 수 없다. 반가움과 실망, 그러나 그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히로코의 사랑은 여전히 현재진행중이기 때문이다.

한발 더 나아가 그녀는 편지의 주소를 찾아 나선다. 자신이 모르는 추억을 공유한 현실 속 이츠키를 의심하고 질투하며 끝내 연인이 돌아오지 못한 산 앞에 선다. “잘 지내고 있나요. 저는 잘 지내고 있어요” 메아리로 돌아오는 목소리에 순간 그의 목소리가 들린다. ‘괜찮다. 잘 지내고 있다’ 히로코 자신도, 연인 이츠키도 서로에게 같은 메시지를 보낸 것일까.

동명이인 중학교 동창의 연인에게 뜬금없는 편지를 받은 이츠키 역시 당황스러움에도 불구 재미를 느낀다. 양파 껍질을 벗기듯, 까도까도 떠오르는 새로운 기억과 그가 남긴 추억들을 마주하며 그녀는 어느새 중학생 시절로 돌아간다. 그리고 소년이 남긴 흔적을 찾아가던 그녀는 이야기의 끝에서 자신의 얼굴을 마주한다.

이츠키를 따라가는 두 여인의 기억을 따라가다 보면 마지막에는 ‘사랑’이라는 단어가 기다리고 있다. 그것이 과거의 첫사랑이든, 현재의 사랑이든 감정과 의미는 크게 다르지 않다. 그리고 사랑이 추억으로 남아야 하는 순간, 그것이 아프든 슬프든 다시 돌아봤을 때 현재의 나를 지탱하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 뮤지컬 <러브레터> 공연장면 / 사진=PAC Korea

사랑은 때로 고통의 기억으로 남는다. 연인, 가족, 친구와의 이별은 특히 더 그렇다. 중학생 시절 많이 내린 눈 때문에 아버지를 잃었던 소녀 이츠키의 가족이 10년이 훌쩍 흐른 뒤 같은 상황에 처하자 숨겨왔던 그 당시의 원망을 서로에게 털어놓는 것이 그렇다. 그러나 작품은 그 원망이 같은 사랑에서 출발했고, 갈등이 해결됐을 때 좋은 추억으로 남을 수 있음을 자연스럽게 전한다. 마치 ‘사랑했던 추억 그 자체를 사랑하자’고 이야기하는 듯 하다.

히로코는 이츠키가 떠난 산에 대고 외친다. “잘 지내고 있나요. 저는 잘 지내고 있어요”라고. 그리고 그 말은 메아리쳐 돌아온다. 산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그의 대답이었을까. 미안함, 안타까움, 아니면 미련…. 실타래처럼 엉켜있던 감정을 한올씩 풀어 곱게 뭉쳐놓고 나면 관객들은 모두 느끼게 된다. 기쁨이든 아픔이든 사랑은 우리 모두의 추억이며, 우리는 이를 기억하며 살아간다고.

작품에 등장하는 벚꽃은 그 추억을 표현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짧고 화려하게 피었다가 또 한참을 기다리게 만들듯 ‘사랑에 대한 추억’도 문득 떠올라 행복한 감상을 자아내곤 한다. 극장을 함께 찾은 연인이, 가족이, 그리고 친구가 먼 훗날 나를 되돌아보게 할 추억이 될 것임을 직감한다.

뮤지컬 <러브레터>는 영화에 등장한 눈 쌓인 산을 기억하던 이들에게 ‘벚꽃의 추억’을 새로 주입시킬지도 모른다. 벚꽃이 피면 찬란했던 기억들이 떠올라 조용한 벤치에 앉아 멍 하니 시간을 보내게 만들 수도 있다. 벌써부터 그 시간이 기다려진다. 내 사람들과의 사랑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고, 그 추억을 바탕으로 현재의 내가 이렇게 살아있음을 느끼고 싶기 때문이다. [미디어펜=최상진 기자]

   
▲ 뮤지컬 <러브레터> 공연장면 / 사진=PAC Kore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