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석은 중‧장년층 관객으로 가득 찼다. 공연계가 1월 비수기에 돌입한 것을 생각하면 의외였다. 아내를 일찍 여읜 남자와 아내의 영혼이 한평생 나누는 이야기인 만큼 그럴 만도 했다. 또 중년층 관객들이 선택할만한 대학로 연극이 그만큼 부족하다는 것을 반증하는 의미였다.

2008년 초연 후 네 번째 무대에 오르는 <민들레 바람되어>는 지금까지 캐스팅만으로도 소극장 연극을 훌쩍 뛰어넘는 관심을 받아왔다. 주인공인 안중기 역에 조재현을 시작으로 안내상, 정웅인, 정보석 등 이름만으로도 든든한 배우들이 참여해왔다.

이번 공연 역시 젊은 날 아내를 잃은 남편에 드라마 <정도전>의 흥행 트리오 조재현, 이광기, 임호가 번갈아 출연한다. 살아있는 남편과 아내의 영혼이 나누는 대화를 지켜보는 노부부에도 이한위와 최근 종영한 <왔다, 장보리>의 최대 수혜자 황영희가 무대에 오른다. 중‧장년층 관객들이 선택하지 않을 수 없는 조합이다.

   
▲ 연극 <민들레 바람되어> 공연장면. / 사진=수현재

작품은 중‧장년층의 시각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아내를 일찍 떠나보낸 남자가 30대, 40대, 60대에 찾아와 아내의 영혼과 이야기를 나눈다는 설정은 ‘함께 살 만큼 살아본’ 부부들이 공감하기에 꼭 안성맞춤이다.

살아있는 남편과 영혼인 아내의 이야기는 서로 겉돌지 않는다. 대화하는 듯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그러다 꼭 결정적인 순간 ‘남편은 아내의 이야기를 듣지 못한다’는 것을 각인시킨다. 객석에서는 그때마다 ‘아!’하는 탄식과 함께 아내들의 훌쩍훌쩍 눈물을 훔치는 소리가 들린다.

남편은 마음 한켠에 아내가 떠난 자리를 비워둔 채로 살아간다. 30대에는 아내의 빈 자리를 채워줄 사람을 소개하기 위해, 40대 초반에는 빈 껍데기로만 남은 것 같은 자신의 인생을 달래기 위해, 40대 후반에는 누구에게도 위로받지 못해, 60대에는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만 같아 죽은 아내를 찾는다. 그때마다 아내는 한결같은 모습으로 남편과 웃고 울고 싸우다 끝내 포근히 감싸안아준다.

30대부터 60대 후반까지 한 남자의 30여 년 세월을 함께 흘려보내며 관객들은 자연스럽게 무대 위 배우에 동화된다. 이 남자의 말 못할 고민이, 그리고 그에게 아무 이야기도 전달할 수 없는 아내의 안타까움이 현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중‧장년 부부의 소통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늘 ‘하루에 30분만 가족과 대화하라’는 조언을 시도 때도 없이 듣는다. 귀에 못이 박힐 지경이지만, 그리 심각하게 받아들여본 적은 드물다. 집은 함께하는 공간이기보다는 그나마 쉴 수 있는 공간이라는 인식이 우리 사회에는 지배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늘 작은 실수로 큰 상처를 받는다.

   
▲ 연극 <민들레 바람되어> 공연장면. / 사진=수현재

얼마 전 포털사이트에서 8년차 부부의 이야기를 봤다. 8년차 부부는 이혼을 고려할 만큼 사이가 틀어진 상황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남편은 지하철역 앞에서 파는 귤 한봉지를 사와 식탁에 놓은 채 씻고 나왔다. 그랬더니 아내가 귤 몇 개를 먹고는 아들에게 “아빠 갖다줘”라며 건네주는게 아닌가. 그때 남편은 쿵 하는 충격을 받았다. 아내가 귤을 좋아한다는 것을 결혼한 뒤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 아닌가.

남편은 다음날도 퇴근길에 귤 한봉지를 샀다. 아내는 그가 씻고 나오자 “귤이 달다”며 말을 걸었다. 순간 울컥하는 마음에 눈물이 흘렀고, 서로 그 귤을 나눠먹으며 그동안의 갈등을 다 풀어냈다. 그는 글 마지막에 ‘아주 작은 것으로 관계는 회복될 수 있다’고 썼다.

서로의 속내를 쉽게 드러내지 않는 부부들에게 <민들레 바람되어>는 남편과 아내 사이에 놓인 귤 한봉지와 같은 작품이다. 대화의 연결고리가 부족한 부부들에게 손 한번 잡아주고, 좋은 공연 보여줘서 고맙다고 말할 수 있는 ‘소통촉진제’ 역할을 톡톡히 해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누구나 위험이 닥치고 괴로운 상황에 처하면 세상에 혼자 남았다는 느낌을 받는다. 안중기는 죽은 아내를 찾았지만, 극장을 찾은 관객의 옆에는 함께 눈물 흘려 줄 가족과 친구가 있잖은가. 허공에 대고 답 없는 메아리를 기다리는 것보다는 함께 바라보며 조금이라도 일찍 이야기를 나누라고 안중기, 오지영 부부는 오늘도 관객들에게 속삭이고 있다.

3월 1일까지 서울 대학로 대명문화공장 수현재씨어터에서 공연. [미디어펜=최상진 기자]

   
▲ 연극 <민들레 바람되어> 공연장면. / 사진=수현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