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을 잡고 10여 년 만에 중학교 동창을 만났다. 이태원에서 만나자고 한 것부터 수상쩍더니 저만치서 다가오는 그는 ‘친구인 듯 친구아닌 친구같은 놈’이 되어있었다. 자신의 성 정체성을 찾았다며 우리와는 다른 친구들이 소주를 앞에 두고도 말이 없자 그는 술 한잔을 쭉 들이키더니 말했다. “야 이거 내가 산다.” 그제서야 친구들 모두 한바탕 웃을 수 있었다.

‘킹키부츠’ 브로드웨이 초연에 CJ E&M이 참여한다고 했을 때 많이 우려했었다. 뭐 이런 황당한 작품에 투자를 하나 싶었다. 국내에서는 금기시되는 ‘드랙퀸’이라는 소재, 성 소수자를 소재로만 활용했을 뿐 의미부여에 실패했던 국내의 수많은 작품들, 역경을 딛고 일어서는 고리타분한 줄거리, 배경은 지구 반대편 시골 신발공장. 브로드웨이 토니상을 6개나 휩쓸었다고 할 때도 ‘그거 뭐 돌아가면서 주는 것’이라고 혼자 폄하하기도 했다.

   
▲ 뮤지컬 '킹키부츠' 공연장면 / 사진=CJ E&M

웬걸, 배우들이 무대에 서고 10분도 채 되지 않아 팔짱낀채 도끼눈으로 무대를 흘겨보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두 눈에서는 하트를 뿅뿅 쏟아내기 시작했다. 1막과 2막 마지막 곡에서는 절로 관객들과 함께 박수를 쳤다. 그리고 커튼콜엔 어깨춤까지 따라췄다. 고백컨대 처음이었다. 이런 완벽한 쇼뮤지컬은….

‘킹키부츠’는 4대째 이어온 신발공장 ‘Price and Son’의 위기를 극복하려는 찰리와 우연한 만남에서 그에게 영감을 주고 함께 드랙퀸 전용 부츠를 만드는 롤라의 성공담을 그린 작품이다. 어린시절부터 함께해온 공장 식구들을 지켜내려는 청년, 자신의 능력을 세상에 당당하게 보여줄 기회가 필요한 청년의 우정이 결국 반짝반짝 빛나는 레드 부츠처럼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두 청년 모두 아버지에 대한 트라우마가 걸림돌이다. 찰리는 유행이 지난 신발을 생산하는 아버지에, 롤라는 자신이 이루지 못한 복싱 챔피언이라는 꿈을 아들을 통해 이루려는 아버지에 상처를 안고 있다. 그러나 이는 ‘세대를 넘고 세상을 딛어야 한다’는 간결한 메시지로 승화돼 현실을 극복하는 발판이 된다. 롤라의 드랙퀸(남성이 유희의 목적으로 여성처럼 차리고 행동하는 것) 쇼 역시 자신의 정체성을 다지는 발판이 된다.

신디로퍼는 작품을 두고 “남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성공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우리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성공으로 이끈다”며 “뭔가를 하고 싶다면 부정적인 소리를 듣지 말고 그냥 시도하라. 아니면 줄곧 후회하게 된다. 훗날 정상에 오르면 그때 다른이들과 이야기하라”고 말했다. ‘킹키부츠’는 2시간 30분에 이 강렬한 메시지를 그녀가 작곡한 노래에 담아 전달한다.

   
▲ 뮤지컬 '킹키부츠' 공연장면 / 사진=CJ E&M

롤라는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공장직원의 결투를 받아들여 일부러 져주면서까지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라’고 조언한다. 그리고 이는 불화를 겪는 신발공장이 다시 화합하는데 결정적으로 공헌한다. 사장과 직원, 남자와 여자 그리고 아직 그 사이에서 결정하지 못한 사람들 모두 서로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세상은 훨씬 더 행복해지리라는 믿음이 느껴진다.

간단하지만 핵심만 콕콕 짚어내는 메시지를 살려주는건 뭐니뭐니해도 음악이다. 1막의 마지막곡 ‘함께 외쳐봐 Yeah’와 2막의 마지막곡 ‘Raise You up/Just Be’는 OST를 다운받아 몇 번을 되풀이해 들어도 어깨춤을 추게 만든다. 관객들은 1막이 끝날 때 함성을 질렀고, 2막이 끝날 때 어깨춤을 췄다. 그리고 커튼콜에는 마음 놓고 음악을 즐겼다. 핵심 넘버 뿐만 아니라 음악의 ‘강‧약‧중간‧약’을 세밀하게 배치해 관객을 들었다 놨다 했다.

특히 롤라를 연기하는 오만석과 강홍석이 인상적이었다. 오만석이 ‘헤드윅’의 모습과 유사하게 여성적이었다면, 강홍석은 브로드웨이 공연의 흑인 배우와 같이 힘이 넘쳤다. 교태와 파워로 차별된다 말할 수 있는 이들 모습은 취미로 뮤지컬을 즐기는 이들이라면 꼭 두 번 볼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국내에 소개된 쇼뮤지컬은 대부분 메시지를 생략하고 보여주기에 급급한 경우가 많았다. 국내 관객들이 대극장 공연에서 가장 기대하는건 ‘화려함’이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브로드웨이나 오스트리아 현지에서 직접 관람했던 공연이 국내에 들어왔을 때 ‘속빈 강정’처럼 실망했던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 뮤지컬 '킹키부츠' 공연장면 / 사진=CJ E&M

그러나 ‘킹키부츠’는 원작 본연의 느낌과 흥을 그대로 재현해냈다. ‘간결한 메시지, 인상깊은 노래, 화려한 쇼’ 등 쇼뮤지컬이 갖춰야 할 핵심 요소들을 완벽한 틀에 넣어 대중에게 내놓았다. 한번 보면 또 보고싶고, 두 번 보면 관련 영상을 찾아봐야 할 만큼 뇌리에서 잊히지 않는다. 어떤 찬사도 아깝지 않은 근래 보기 드문 완벽한 쇼뮤지컬이다.

공연이 끝난 시각 동대문에 있는 성 소수자 친구의 가게를 찾았다. 남다른 감각 덕분에 장사는 아주 잘 된단다. 직장 적응에 한창인 친구들은 이제 그가 정상인지 내가 정상인지 모를 만큼 자기들의 세계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친구는 “행복하니? 나는 행복해. 이렇게 함께 얼굴보고 이야기하며 행복하면 그뿐”이라고 말했다.

친구에게 방금 극장에서 나오는 길이라며 기회가 되면 공연장에 같이 가자고 말했다. 그는 “벌써 봤지”라고 말했다. 그리고 우리는 처음으로 긴 대화를 나누며 신발가게를 누비고 돌아다녔다. ‘새빨간 레드 부츠’에 동시에 시선이 꽂혔다. 한바탕 웃었다. 그리고 또 걸었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2월 22일까지 충무아트홀 대극장에서 공연. [미디어펜=최상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