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독립론 중심, 남달랐던 독립운동...미 정부·재미동포·임정과 갈등 빚어
좌우합작 불가, 공산주의 혐오...임시정부 다른 분파들로부터 배척 당해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 우남 이승만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기 위해 이승만대통령기념재단이 지난 11일 기념관 건립을 위한 국민성금 모금운동을 시작했다. 모금운동은 기업, 시민사회, 일반 국민 다수가 함께 참여하는 범국민적 운동으로 확산되고 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일본제국주의 당시 국제외교 및 계몽 활동을 통해 자유독립을 실현하고자 애썼다. 또한 1945년 해방 후 3년간 미 군정 당시 유엔 감시하에 국민총선거를 실시하도록 막후에서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결국 남한 단독정부를 수립하여 한반도의 공산화를 막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것으로 평가된다.

반면 독립운동 당시 독립운동 진영의 분열의 원인됐다거나 6.25 전쟁 당시 국민방위군 논란, 3.15 부정 선거의 책임을 지고 4.19 혁명에 의해 권좌에서 물러나는 등 현대사에서 부정적으로 평가되는 부분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최근 이승만 전 대통령의 공과 과가 치열하게 연구되고 재평가되는 과정 속에서 초대 대통령이라는 분명한 지위를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이렇다 할 기념관조차 없는 것에 대해 현대사의 빈공간이라는 우려가 높은 것도 사실이다. 

이에 미디어펜은 현 시점에서 이승만기념관이 왜 제기되는 지를 보다 객관적으로 알기 위해 총 3편의 연재 시리즈를 기획해 보도한다. [편집자주]

[우남의 꿈②] 이승만의 독립운동 임시정부 활동, '오해와 진실'은?

[미디어펜=김규태 기자] 1948년 8월 대한민국을 건국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초대대통령 우남 이승만(雩南 李承晚, 1875~1965)은 당대인들과 전혀 다른 삶의 궤적을 보이면서, 각종 오해와 논란에 휩싸였다.

먼저 일각에서 아직도 언급되는, 이승만이 독립운동 분열을 조장하고 상해 임시정부 당시 임정대통령으로서의 활동이 저조했다는 것에 대한 비판이다.

지난 문재인 정권이 20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을 기념해 선정한 독립운동 인물에도 이승만은 빠졌다. 이승만이 임시정부 초대대통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 1950년 10월 평양 탈환 후 이승만 초대대통령이 연설을 갖고 있다. /사진=재단법인 이승만대통령기념재단 제공


우선 이승만의 시각은 남과 달랐다. 김구 등 많은 독립운동가가 현실적 필요로 당시 거주국가 국적을 취득했지만, 이승만은 끝내 미국 국적을 취득하지 않고 무국적 망명객으로 머물며 온갖 불편을 감내했다.

그런 이승만은 독립운동 분열을 조장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대한독립운동의 대표주자로 자타공인된 인물이었다.

그 증거는 여운형과 박헌영 등 좌익이 주도한 조선인민공화국이 1945년 9월 7일 발표한 내각 명단에 '주석 이승만 부주석 여운형 국무총리 허헌 내무부장 김구 재무부장 조만식' 등으로 나왔을 정도였다.

또한 이승만이 귀국하자마자 1945년 10월 20일 대대적인 국민 환영회가 열렸고, 유일한 정치적 라이벌로 꼽히던 김구 또한 이승만을 향해 "뭉치면 이승만이고 흩어지면 삼천만이다"라며 "이승만에게 뭉쳐야 우리가 산다"라고 역설할 정도였다.

다만 이승만의 독립운동은 미국 정부, 재미동포, 임시정부 간의 갈등을 계속해서 빚긴 했다. 그런데 이를 두고 독립운동의 분열 조장이라고 치부하기엔 이승만의 혜안이 남들과 달랐을 뿐이다.

이승만은 대한독립운동 내내 두 가지를 내세웠다. 바로 '외교독립론'과 '좌우합작 불가'라는 신념이다.

특히 이승만은 "인간은 콜레라와 동거할 수 없다"는 말을 주변에 자주 했을 정도로 공산주의를 혐오했다. 이 때문에 이승만은 독립운동의 다른 그룹으로부터 배척 당했다.

또한 1919년 11월 국무총리 이동휘가 상해에 오면서 어렵게 출발한 통합임시정부는 온갖 분파들이 정쟁을 치달아 극심한 내홍을 겪었다. 사회주의, 민족주의, 무력투쟁론 및 외교투쟁론, 친미파 대 중러파, 노장파 대 소장파 등 서로 생각이 조금이라도 달라도 반목을 일삼았다.

당초 서울 한성임정 조직을 중추로 해서 상해임정과 노령임정 등 3개 임정이 통합했지만, 노령임정이 가장 먼저 분리해 나갔을 정도다.

   
▲ 1948년 8월 15일 이승만 초대대통령이 대한민 정부 수립을 선포하고 있다. /사진=재단법인 이승만대통령기념재단 제공


이승만은 당시 1920년 12월 28일부터 5개월간 임시정부 청사에서 집무를 보았지만, 재정적 궁핍은 물론이고 출신지역과 이념으로 갈라져 극심한 갈등 양상이 드러나는걸 막을 수 없었다.

이승만 임정대통령 다음 서열인 국무총리 이동휘는 공산주의자로 무력투쟁론을 주장했다. 그는 "소련의 도움을 받아 무장투쟁을 벌여야 한다, 임정을 시베리아로 옮기자"며 이승만 퇴진운동까지 벌였다.

안창호의 평안도 세력은 임정 시작부터 이승만에게 우호적이지 않았다. 더욱이 당시 이승만을 죽이기 위햄 김원봉이 의열단까지 파견했다는 소문까지 임정에 돌았다.

결국 공산주의자 이동휘는 1921년 1월, 국무총리를 그만두고 시베리아로 떠났다. 안창호도 사퇴했다. 당시 안창호와 여운형은 군중대회를 열어 이승만의 노선에 대해 "독립정신을 위배하는 것"이라고 성토하면서 무장투쟁론을 외쳤다. 박용만과 신채호 등 강경 무장투쟁파는 베이징에서 군사통일회를 소집한 후, 임정을 해산하라는 최후통첩까지 보낸다.

이처럼 극에 달한 내분이 수습되지 않고 파탄 지경에 이른, 당시 임정에 대해 이승만이 끝까지 무엇을 할 수 있었는지 의문이다.

이승만은 때맞춰 미국 국무장관 찰스 에반즈 휴즈가 태평양 9개국에게 해군군비축소회담을 제의하자, 이 9개국 회의에서 대한독립을 호소하겠다는 명분을 주변에 알리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 대한민국 이승만 초대대통령. /사진=재단법인 이승만대통령기념재단 제공

사태는 이승만의 도미 이후 일사천리였다. 임정에서는 이승만에 대한 온갖 비난이 극에 달했고 상해임정 의정원은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불신임 토의에 들어가 12 대 0으로 불신임안을 가결시킨다. 반대의원 5명이 퇴장한 가운데 벌어진 일이었다.

그러자 이승만은 상해임정으로 보내던 미국 하와이교민단의 인구세를 더 이상 보내지 않았고, 이에 임정은 1924년 이승만에게 면직 결정을 통보했다. 5년에 걸친 이승만의 임정대통령 수행은 그렇게 파국으로 끝났다.

이 과정에서 과연 모든 책임이 이승만에게 있다고 누가 자신할 수 있을까. 역사는 공산주의의 실패와 불능을 뚜렷하게 가르키고 있다. 이를 감안하면 상해 통합임정 당시 공산주의자들, 무력투쟁파의 이상적인 명분과 이념은 대한독립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보기 힘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