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익, 예산 동결로 ‘만성 인플레’ 해결하다
시장경제로 꽃핀 호황…다시 만날 수 있을까
[미디어펜=조우현 기자]1983년 10월 9일, 북한이 일으킨 아웅산 테러로 운명을 달리하게 된 고 김재익 경제수석비서관은 ‘자유주의 시장경제’라는 철학을 경제 정책에 반영해 한국 경제를 호황 이끈 인물로 평가된다.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스탠퍼드대학교 대학원에서 경제학 박사를 수료한 김재익은 대한민국 최초의 ‘자유주의 관료’였다. 

   
▲ '인야레이크'호텔에서 저녁식사 후 커피를 들며 얘기를 나누고 있는 (왼쪽부터) 김재익 대통령비서실 경제수석비서관, 서상철 동장부 장관, 김동한 과기처 차관./사진=연합뉴스


그는 1975년 경제기획원 경제기획관, 1976년 경제기획원 기획국장, 1980년 경제기획원 경제협력차관보 등을 역임했다. 이후 대통령비서실 경제수석비서관으로 발탁되며 이끌어낸 ‘1984년 정부 예산 동결’은 김재익의 마지막 성과이자 유작으로 남게 됐다. 

김재익의 경제 정책은 현재 인플레이션으로 암울한 시기를 보내고 있는 한국 경제에도 귀감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게 재계의 관측이다.


◇ 김재익, 예산 동결로 ‘만성 인플레’ 해결하다

1980년 경제수석비서관 자리에 오른 그는 근로자 임금을 억제하고 추곡 수매를 축소하는 등 지금 들어도 파격적인 정책들을 통해 물가 안정의 기틀을 잡아 나갔다. 정부의 재정 건전성을 높이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당시 한국은 1970년대 이후 고도성장을 주도하면서 만성적인 재정 적자에 시달렸다. 1981년 재무부가 국회에 제출한 1980년 결산 자료를 살펴보면 당시 대한민국 정부의 순국가채무는 7조4527억 원에 이르렀다. 이는 1979년 결산 때 보다 42.7%나 늘어난 수치였다.

이대로 안 되겠다고 생각한 김재익은 대통령에게 물가 안정을 위해 1984년 정부 예산안을 동결할 것을 건의했다. 

물가가 오르는 상황에서 예산을 동결시키는 것은 사실상 예산 감축과 다를 바 없는 것이었다. 때문에 김재익의 소신은 공직 사회를 상대로 한 전 방위 전투로 확산될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1985년 12대 총선을 앞두고 1984년 예산을 깎는 것은 정부와 여당 입장에서 부담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예산이 없으면 지역구 사업을 할 수 없고 지역구 사업을 못하면 표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재익의 지속적인 설득을 통해 전두환 대통령은 “선거에서 불리하더라도 물가는 잡아야 하고 재정 적자 문제는 해결해야 한다”는 김재익 말에 신임을 보냈다. 이후 1984년 6월, 정부는 예산동결조치를 확정 발표하며 ‘재정건정성’에 한걸음 나아간다.

그리고 이는 김재익이 우리에게 남겨준 마지막 유산이자 최후의 선물이 됐다. 같은 해 10월 9일 북한이 미얀마의 아웅산 묘역에 미리 설치한 폭탄이 터져 김재익 수석을 비롯한 대한민국의 장관 등 각료와 수행원 17명이 사망했기 때문이다.


◇ 김재익이 뿌린 씨앗, 단군 이래 최대 호황 이끌어

김재익의 경제 정책은 그의 사후에 꽃피었다. 전두환 시대의 정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논란이 있지만, 경제적으로는 ‘단군 이래 최대의 호황기’였다는 평가가 무색하다는 것이 대체적인 판단이다. 

실제로 한국경제는 1980년대부터 내실 있는 성장을 시작했다. 1982년 대부분 국가들이 마이너스 또는 제로성장 나타내는 동안 한국은 5.3%의 실질 성장률 보이면서 성장 기반을 닦아낸 것이 대표적인 예다. 

1983년 실질 경제성장률은 9.5%로 치솟으며 1978년 이후 5년 만에 9%를 넘어섰고, 1984년과 1985년의 실질 경제성장률은 각각 7.5%와 5.1%로 주춤했지만, 이 시기에도 저축률은 꾸준히 상승해 1986년 마침내 꿈의 30%대 돌파했다.

이후 1986년과 87년 두 해 연거푸 세계 최고의 성장기록 세웠다. 다른 나라들이 성장하지 못하고 뒷걸음질 칠 때 한국 경제는 12.3%, 12.2%의 높은 성장률 나타낸 것이다. 

대기업은 자본과 기술을 축적하며 글로벌 기업으로 도약할 준비 시작했고, 노동소득 분배율이 개선되면서 소득불평등 정도도 크게 떨어졌다. 중산층이 두터워지면서 구매력이 높아졌고 오로지 수출에만 목숨 걸었던 경제 시스템에 ‘내수시장’이라는 새로운 부문이 자리 잡았다.

이 경제적 호황기는 외환위기 직전인 1990년대 중반까지 10년 동안 이어졌다. 


◇ 시장경제로 꽃핀 호황…다시 만날 수 있을까

김재익은 ‘경제 결정권을 정부가 아닌 시장에 돌려줘야 한다’는 시장경제 철학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빚을 지지 않는 정부’가 전제 돼야 한다고 봤다. 당장의 고통을 참아내더라도 아편이나 마약 같은 정부 재정 적자의 유혹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신념에서다. 

이는 한국경제가 정부의 개입이 아닌 ‘시장경제’를 통해 발전해가야 한다는 믿음에서 나온 철학이었다. 이 신념은 국보위 시절 고 전두환 대통령의 가정교사로 일할 때도 일관되게 강조했던 것이었다.
 
당시 김재익은 경제 질서는 강제적인 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수요와 공급에 의해 자생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 아무리 임금이 올라도 물가가 올라가면 무용지물이라는 것, 가계나 정부 모두 적자운영을 해서 안 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김재익은 경제 질서가 강제적인 ‘권력의 힘’이 아닌 시장의 자율적인 시스템 속에서 움직여야 한다고 굳게 믿고 이를 실천해 나갔다. 또 물가 안정, 가계나 정부 모두 적자 운영을 피해야 한다는 원칙하에 경제 정책을 펼쳤다.

이에 김재익의 경제 정책이 조금 더 일찍 시작 됐다면 1997년 외환위기의 가능성이 줄었을 수 있다는 진단도 나온다.

‘김재익 평전’을 집필한 고승철 작가는 “역사에 만약이라는 가정은 무의미하지만 1983년 김재익의 주도 아래 시작된 시장 자유화 논쟁이 한층 생산적으로 발전돼 우리 스스로 문호를 열고 스스로 경쟁력을 강화해 나갔다면 이후 한국의 여사는 달라졌을지도 모른다”고 평가했다. 

“김재익의 시장개방 철학이 조금 더 일찍 시행됐다면 외환위기는 결코 오지 않았을 것이라도 단정적으로 말할 순 없지만 김재익이 이루고자 했던 시장개방과 관치금융의 차단, 고임금 구조의 혁파 등이 순조롭게 이뤄졌다면 외환위기 가능성 훨씬 낮아졌을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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