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북은 터무니 없는 억측…체제유지 예술동원 북한 인정 못해"

   
▲ 김효진 남북경제연구소 기획연구실장
이외수 작가(이하 존칭 생략)는 여전히 현역이다. SNS 팔로우가 200만이라는 어마어마한 숫자에 ‘소통의 아이콘’, ‘SNS상의 대통령’으로까지 불린다. 40년 작가생활 동안 47권의 책을 냈으니 성공한 현역 작가임에도 틀림없다.

그가 일흔이라는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젊은층에 소구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좋게 말하자면’, 그럴 법 한데 그렇지 않는, 보수적이지 않은 유연한 감성 ‘덕’이 크다. 그러나 그의 감성이라는 것이 지나치게 ‘좌경화’된 사회인식에 뿌리내렸다는 점이 문제였다. 이는 곧 이외수는 ‘좌빨’이라는, 그로서는 억울(?)할 법한 비난의 원천소스였던 셈이다.

그랬던 그가 자신의 정체성을 공개적으로 밝히고 나섰다. 자신을 향해 종북이라는 혐의는 터무니없는 억측이라고, 본인은 체제유지를 위해 예술을 동원하는 북한을 조금도 인정할 수 없다고 천명한 것이다.

버거운 위암투병 중에 애써 서울 나들이를 감행한 이유가 이 말을 하기 위함이었을까? 지난 2일 국회 헌정기념관에서 열린 국가혁신포럼의 강연에서 밝혔으니 ‘전향(?)’이라면 이 보다 더 어울릴 만한 장소는 없다.
그 날의 강연제목은 ‘국방안보의 중요성과 국가개혁의 필요성’. 언뜻 보아도 안보나 행정전문가가 나서야 어울릴법한 주제에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외수라니!

역시 그는 달변가였고, 언어의 조련사이며 작가였다. 지치지 않는 이야기 솜씨에는 적절한 감동과 재미, 공감을 부르는 문제의식이 어우러졌다. ‘아름답지 않은 것은 사랑할 수 없다’는 소크라테스의 명언을 신봉하는 자신을 ‘예술 지상주의자’라고 밝혔다.

예술보다 인간이 더 거룩하다고 생각하는 본인이 볼 때도 인권은커녕 예술을 한낱 정권의 도구로만 이용하는 북한 체제를 도저히 인정할 수 없다고 말했다. 사실 이런 내용만으로는 새삼스럽지 않은 진부한 설명이긴 하다.

오히려 이런 객관적 사실 조차 인정하지 않는 특정 세력이 이상한 것일 뿐이다. 다만 당연한 얘기를 ‘좌빨’로 보이던 이외수가 공개적으로 밝혔다는 점이 새롭다고나 할까?

   
▲ ‘소통의 아이콘’, ‘SNS상의 대통령’으로 불리는 이외수 작가가 지난 2일 국회 헌정기념관에서 열린 국가혁신포럼 강연에서 자신을 향해 종북이라는 혐의는 터무니없는 억측이라고, 본인은 체제유지를 위해 예술을 동원하는 북한을 조금도 인정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사진은 이외수 작가가 25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신간 '완전변태' 출간 기념 기자간담회에서 질문에 답하고 있는 모습. /사진=연합뉴스
노골적인 질문은 한 젊은 대학생의 입에서 나왔다. 그렇다면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는 왜 그리도 반대했냐고 말이다. 노작가는 질문을 피하지 않았다. 세 명의 질문을 모아서 마지막으로 대답하는 시간이었기에 그냥 묻고 넘어가도 될만한 분위기였다. 자리가 파한 상태에서 다시 마이크를 잡고 소신을 밝혔다.

‘해군기지의 필요성 자체는 인정한다. 다만 주민들과 충분한 협의가 부족했다는 절차적 문제와 환경적 고려가 없었다는 점에서 항의를 한 것이다. 자신은 진보든 보수든 부정, 부패와는 타협할 수 없다. 부정과 부패에 대한 신랄한 비판일 뿐’이라며 자신을 ‘좌빨’로 보는 시각에 대해서도 절대 인정할 수 없다고 다시 한번 힘주어 강조했다.

어쩌면 그만한 ‘大작가’를 좌〮우의 프레임으로 ‘특정’지으려는 시도 자체가 저급한 일이지 싶다. ‘예술 지상주의자’에게 좌〮우를 따지는 시각 자체가 고차원 예술에 무지한 저차원의 좁은 인식일지 모른다.
그러나 오해(?)의 근원에는 그가 자초한 ‘원죄’가 있음을 또한 부인할 수 없다. 몇 년 간 그의 SNS에는 ‘젊은 감각’으로 각색된, 그러나 ‘왼쪽 저편’의 그것과 다를 바 없는 대정부 비난과 선동만 있었을 뿐, 좌〮우를 뛰어넘어 긴 세월 살아낸 원로의 격조와 깊은 통찰은 찾기 어려웠다.

아마 본인 스스로가 이 점을 가장 잘 알고 있지 않을까? 그렇기에 ‘좌빨’과 ‘종북’이 아니라는 분명한 얘기를 먼저 꺼냈는지 모른다. 돌이켜 보면 이만한 노작가가 이런 용어까지 써가며 자신의 신념과 가치를 밝힐 수 밖에 없는 상황 자체가 부끄럽고 슬픈 이 사회의 자화상이 아닐 수 없다.

한 개인이 어떤 신념체계를 갖고 있든, -그것이 공산주의 건 자본주의 건- 그것을 밝힐 것을 요구 받는 분위기는 전체주의적인 것이다.

‘개인의 자유라는 근원적 가치가 타인의 자유로운 삶을 침해하지 않는 한, 최대한 존중 받는 것이 정당하고 옳다’라는 암묵적 동의가 그 사회 윤리의 보편적 기반이 되지 않으면 불행한 공동체다. 그런데 2015년 대한민국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전방위로 가속화되는 느낌이니 위험한 것이다.

그가 이리도 주장하는 바를 굳이 믿어주지 않을 이유는 없다. 누군가의 말처럼 그가 ‘전향’한 것인지, 갑자기 애국보수의 탈을 쓴 것인지 따지는 것도 보잘 것 없다. 그가 자신을 보수며 우파라고 밝히지 않았으니 진정한 ‘전향’은 아니라며 여전히 ‘좌편향’ 그대로일 뿐이라고 몰아세우는 것도 정치적 발언이긴 매한가지다.

어차피 신뢰는 시간이란 누룩이 발효될 때 피어 오르는 법. 세월을 초월한 예술을 추구하는 자에게 세월의 크기는 작위적이며 무의미하다.

인간의 고통은 모두 개인적이다. 그는 말한다. 작가의 눈물이 들어가야 글이 나온다고. 그가 출간한 47권의 책에는 인간 이외수의 눈물이 녹아있을 것이다. 그 진정성이 독자를 울렸기에 베스트셀러 작가가 됐을 게다.

고통과 예술 앞에 이념이나 주의(ism)은 한없이 왜소할 뿐임을 위암투병을 통해 다시 한번 깨닫지 않았을까? 그렇고 났더니 자신을 향해 쏟아졌던 온갖 이념성 비난이 억울하고 하찮게 느껴지진 않았을까?
그가 이 시점에서 갑자기 뜬금없는 강연 초청을 왜 받아들였던 건지, 전혀 이해 못할 바도 아니란 생각이 퍼뜩 스치고 지나간다. /김효진 남북경제연구소 기획연구실장·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