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조정래가 신작 장편 <천년의 질문>(전3권, 해냄)을 펴냈다. 재벌 비자금 사건을 파헤치는 기자를 중심으로 권력-자본-언론이 얽혀 돌아가는 한국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고발한 작품이다. 대기업 비자금, 정경유착에서 촛불 집회에 이르는 지난 3~4년 한국사회 현안이 두루 등장한다. 결국 ‘국가란 무엇인가?’를 묻고 있고, 그래서 제목이 천년의 질문이라고 한다. 보기 드물게 대중적 파급력이 큰 이 작품을 포함해 그의 문학 전반을 점검하는 연속칼럼 ‘조정래 문학은 건강한가’를 3회 나눠 싣는다. <편집자>
[연속칼럼] 조정래 문학은 건강한가?-下
|
|
|
▲ 조우석 언론인 |
"(일제시대) 죽어간 우리 겨레의 수는 얼마일까요? 400만 명이었습니다. 민족 전체의 20% 가까이가 죽어가야 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첫 번째 역사 질문 앞에 서게 됩니다."(<천년의 질문>제1권 141쪽, 운동권 시절의 장우진의 말)
기억하실 것이다. 조정래를 다루는 첫 글에서 인용했던 대목인데, 당시 나는 작품이 온통 어설픈 정치평론, 현대사 강의로 도배됐다고 지적하면서 그 사례로 뽑아 제시한 대목이다. 희한하지 않은가? 그의 장편소설 <천년의 질문>은 기업소설인데도 설익은 현대사 강의, 그것도 지독한 반일 정서를 불어넣는 대목이 불쑥불쑥 등장한다. 그래서 물어봐야 한다.
조선인 400만 명 학살, 대체 그게 맞는 소리일까? 맞고 틀리고를 떠나 밝혀둘 게 있다. 그의 12권짜리 옛 대하소설 <아리랑>의 '작가의 말'에도 그 얘기가 등장한다. 그에 따르면, 일제 36년 동안 학살당한 동포는 3백만 명에서 4백만 명이며(그때는 그런 식으로 서술했다), 자기가 <아리랑>을 쓰게 된 것도 그걸 밝히기 위해서라고 털어놓았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일제가 우리 동포들이 수없이 죽었는데 왜 그동안 학교에서는 그런 걸 가르치지 않는지 평생 분노해 왔다. 깨우쳐 보니 일제하 친일파가 해방 후 국가를 장악했기 때문이고, 이후 대한민국은 정부마저 총체적 부정이었다는 사실 앞에 자신은 괴로워했다는 식이다.
그래서 식민지 시대의 진실을 알리기 위한 것이 <아리랑>이란다. 그런데 학살자 3백만 명~4백만 명설은 서울대 이영훈 명예교수의 말대로 "결단코 그런 일은 없었다." 그건 말도 안 된다. 1910년 당시 조선 인구는 대략 1600만 명, 330만 가호이었는데 집집마다 1명의 학살 희생자란 게 말이나 될까? 일개 소설가의 엄청난 거짓말에 기가 질린다.
|
|
|
▲ 2003년에 세워진 전라북도 김제의 아리랑문학관. 조정래 대하소설<아리랑>과 관련된 모든 것을 정리 보존했다는 공간인데, 소설의 배경이 김제만경이기 때문이다.그러나 반일 감정을 포함해 잘못 쓴 소설이 이 나라 현실을 왜곡하고 있는 상징물일 수도 있다. /사진=한국관광공사 |
일제시대 조선인 학살자 400만명 설은 허구
조정래는 본래가 그런 위인이다. 그는 일제에 대한 분노 즉 좌파 민족주의 때문에 그 시대를 냉정하게 보는데 실패하고, 그래서 이런 엉터리 소설을 자꾸만 만든다. 그걸 <아리랑>에서 거짓 주장하다가 10여년 뒤 <천년의 질문>에서도 또 우려먹는 것이다.
그걸 지적한 이영훈 교수의 글은 지금은 폐산된 잡지 <시대정신> 35호(2007년)에 실었던 실증적인 논문 '광기 서린 증오의 역사소설가 조정래-대하소설 <아리랑>을 중심으로'인데, 실은 <아리랑> 전체가 황당무계한 반일로 도배됐다. 소설 배경은 1904-1945년이다. 러일전쟁부터 시작하여 한일합방, 토지조사사업, 해방을 두루 커버한다.
소설 전체가 반일의 덩어리인데, 유심히 볼 점은 일제가 소설 초기에 등장하는 한 농민에 대한 즉결처분이다. 조선을 식민지로 장악한 다음 실시한 토지조사사업을 배경으로 김제경찰서 죽산주재소의 소장이란 자가 차갑수라는 농민을 마을의 당산나무에 결박한 다음 즉결로 총살에 처한다.
"에에 또, 지금부터 중대 사실을 공포하는 바이니 다들 똑똑히 들어라. 저기 묶여 있는 차갑수는 어제 지주총대에게 폭행을 가해 치명상을 입혔다. 그 만행은 바로 총독부가 추진하고 있는 중대 사업인 토지조사사업을 악의적으로 방해하고 교란하는 용서할 없는 범죄행위인 것이다. 따라서 죄인 차갑수는 경찰령에 의하여 총살형에 처한다!」
니뽄도를 빼들고 선 주재소장의 칼칼한 외침이었다. <중략>
「사겨억 준비!」
주재소장이 니뽄도를 치켜들며 외쳤다. 네 명의 순사가 일제히 총을 겨누었다.
「발사아」
총소리가 진동했다. 차서방의 몸이 불쑥 솟기는가 싶더니 이내 축 늘어졌다. 그리고 왼쪽 가슴에서 시뻘건 피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제4권)
이런 즉결처분은 소설에서 다른 동네를 무대로 한 번 더 반복된다. 그리고 토지조사사업 기간에 전국에서 무려 4천여 건이라고 조정래는 밝힌다. 이 나라의 엉터리 평론가들은 이걸 두고 "토지조사사업을 다룬 이 부분은 역사적 의미의 부각뿐만 아니라 소설적 형상화에서도 가장 빼어난 성공을 거두고 있는 부분이다"라고 어이없는 극찬을 했다.
그렇지만 위와 같은 즉결 총살형은 일제시대의 현실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토지조사사업에 관한 논문이나 연구서에서 그런 사건이 소개된 적이 없으며, 당시 신문과 잡지가 그걸 보도한 적도 없다. 그런데도 조정래는 천연덕스럽다. 즉결 총살의 법적 근거까지 제시하고 있다.
|
|
|
▲ 아리랑문학관에 전시된 물품의 하나. 대하소설 <아리랑>이 커버하고 있는 근현대사의 연대기를 보여준다. |
좌파 민족주주의의 분노
소설의 다른 대목에서 그것의 정식 명칭이 조선경찰령이라고 설명한다. 이 또한 놀랍게도 조선경찰령 따위 법령은 존재한 바 없다. 그게 진실이다. 이게 무얼 말해주는지는 분명하다. 일제에 대한 조정래의 섣부른 좌파 민족주주의의 분노란 근거 없을뿐더러 유치하다. 사실 조선을 지배하자는 구상 아래 일제는 1912년 조선민사령(朝鮮民事令)을 공포했다.
조정래 따위가 알 리 없겠지만, 그게 이 나라 민법의 출발이었다. 근대적 민법을 유럽에서 도입해 조선 땅에 정착시킨 것이다. 즉 일본은 법치를 통해 조선을 지배했다. 양반 상놈의 신분제도를 해체한 것도 그들이고, 약탈이 아니라 근대재산제도를 도입했다. 그런데 왜?
일제는 약탈-수탈 등의 방법으로 우릴 한두 번 괴롭힌 게 아니다. 조선반도를 영구지배하려 했고, 그래서 법치를 통해 우릴 제대로 다스리려 했다. 그 결과 일제시대 평균 3.7% 경제성장을 이끌어낼 수도 있었다. 그런다면 조정래 자신이 일제를 과소평가한 것이다. 공부를 덜한 탓에 분노만 키웠고 이런 2.5류 소설로 독자를 기만한 것이다.
상황이 이러한데도 전라북도 김제에는 아리랑문학관이 버젓이 세워져있다. 조정래 문학이 만들어낸 거대한 흉물이다. 소설<아리랑>과 관련된 모든 것을 정리 보존했다는 공간인데, 소설의 배경이 김제만경이기 때문에 2003년 김제시가 공공의 목적으로 만들었다.
설립목적이 이렇다. "일제강점기 시기에 김제만경이 수탈당한 땅과 뿌리 뽑힌 민초들이 민족의 수난과 투쟁을 대변한다"는 것이다. 무서운 현실이다. 소설이 뒤틀린 현실을 창조해냈고, 그것이 일본에 대한 눈먼 증오를 강화하고 있다. 그리고 놀랍게도 좌파 민족주의가 부채질하는 눈먼 반일 정서는 끝내 이 나라를 망치기 직전이다.
좌파 민족주의는 지금 시민종교다. 문재인 정부는 적폐청산 식 반일 외교를 특징으로 하는데, 그게 자해극으로 치닫고 있는 상황을 우린 지금 지켜보고 있다. 어쨌거나 '묻지 마 반일 정서'를 만든 장본인의 하나가 조정래라는 걸 확인했다. 맞다. 첫 글의 단언대로 조정래 문학은 건강하지 않다.
'문학의 옷'을 걸쳤을 뿐이고 집요한 반기업 심리와 좌파 민족주의가 춤추는 질 나쁜 문학이다. 상황이 이런데도 조정래하면 거품을 물 것인가? 그걸 나는 오늘 독자들에게 묻는다. 독자들이 양해해준다면 다음 회 '번외편 칼럼'을 한 번 더 쓸 생각이다. 조정래 대하소설 <태백산맥>까지 두루 도마에 올릴 구상이다. /조우석 언론인
[조우석]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