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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조건적 반일 감정? 분노의 미신을 걷어내자

2015-11-07 08:42 | 편집국 기자 | media@mediapen.com
   
▲ 최종부 경제진화연구회 부회장

민족자결주의와 3.1운동에 대한 단상

세계사적 측면으로 우리의 역사를 제대로 바라보자는 목소리를 이제서라도 내야겠다.

“기미년 삼월일일 정오. 터지자 밀물 같은 대한독립만세. 태극기 곳곳마다 삼천만이 하나로”

삼일절 노래의 한 구절이다. 들을 때마다 가슴을 끓어오르게 하는 노랫말이다. 터지자 밀물 같은 대한독립만세를 민족대표 33인이 외쳐주었다면 얼마나 고마웠겠느냐만은 사실 파고다공원에서 시작된 3.1운동에서 민족대표33인은 없었다. 이들은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자발적인 신고로 일본경찰에 잡혀갔다. 보통 우리가 알던 것과는 다르다. 이 정도로 3.1운동이 잘못 알려진 것은 문제도 되지 않는다.

우리가 보통 알고 있는 3.1운동은 무엇인가.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의 영향을 받은 민족대표 33인이 주도한 비폭력무저항운동 정도로 알고 있을 것이다. 당연하다. 교과서에 이렇게 실려 있고 이렇게 배우고 자라왔기 때문이다. 삼천만 민족의 독립운동이었다던 3.1운동마저도 오류가 섞인 서술이 되어있는 상황이다. 갑자기 의아할 것이다. 아니 도대체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 이것은 당연한 것인데. 라는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우선 위에 언급된 민족자결주의에 대한 내용이다. 우선 민족자결주의란 어떤 민족이든 다른 민족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는 것으로 민족의 운명 즉, 정치적 운명은 그 민족이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당연히 이것만 보면 우리의 3.1운동이 당연히 세계적으로 인정받아야 하는데 잔악한 일본에 의해서 폭압을 당했다고 알고 있다. 대부분의 학생이 이렇게 교육받았을 것이라 확신한다.

그러나 민족자결주의를 제대로 살펴보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이 원칙은 제1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인 독일과 러시아의 식민지에만 적용되었고 일본과 미국 등의 승전국 식민지에는 적용이 되지 않았다. 말 그대로 조선은 애초에 '해당사항’이 전혀 없던 원칙인 것이다. 민족자결의 정신을 어느 나라보다 잘 실현한 것이 우리 조상들이었다. 이런 상황에 민족자결주의와 무관했던 조선이 마치 민족자결주의의 수혜를 입어야만 했던 나라로 사실을 오도하는 것은 틀리지 않는가. 이러한 사실을 기술할 '용기’가 있는 교과서가 지금상황에서는 나올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사실을 적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을 들어서 당연히 인정받아야 할 권리를 일본의 폭력에 의해 묵살 당했다고 가르치는 교육은 무조건적인 반일감정만 생기게 할 따름이다. 이런 오류는 적지 않게 교과서에 실려 있다.

   
▲ 3.1운동 이전 1907년 고종은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서 이상설, 이준, 이위종을 헤이그 특사로 파견했지만, 이는 일본의 방해 여부 상관없이 실효성 없는 특사였다. 사진은 일제강점기(1910~1945) 대한제국 황실을 촬영한 것이다. 사진은 고종(高宗)의 둘째 아들이었던 영친왕(榮親王) 이은(李垠)과 그 부인인 이방자(李方子)를 중심으로 고종과 순종(純宗) 내외가 배치되어 있다. 고종은 오른쪽 상단에 위치해 있다./사진=대한민국 역사박물관 현대사아카이브

식민지 지배라는 것을 바라볼 때도 마찬가지다. 식민지지배라는 것은 세계사 전체의 현상 중 하나였고, 제국주의의 특성이었다. 너무도 잔인한 이야기 이지만 자발적 발전 혹은 서양근대문명의 습득을 하지 못한 약소민족과 약소국가는 열강이라 불리는 강대국의 식민지배를 받는 것이 '당연’했던 게 그 당시의 국제질서였다. 역사에 만약 이란 없다. 있는 그대로를 우선 보고 평가하는 것이다. 제국주의를 옹호하는 것이 아니다. 식민지배를 찬양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며 일본의 강제식민침탈의 정당성을 부여하자는 것도 당연히 아니다. 한 국가가 근대화를 이룬 다음 식민지를 넓혀 본인들의 이속을 챙겼던 것이 그 당시 시대 전체 현상 중 하나였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독립은 쉬운 것이 아니었다. 아니 사실 인정자체가 안되던 것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이전, 1910년대 전까지 독립이라는 것은 국제사회에서 전혀 인정되지 못했다. 이 사실을 실어놓은 교과서는 거의 없다. 단순히 침략국이 나쁜 것이고 피 침략국은 착한피해자인 것이다.

3.1운동 이전 1907년 고종은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서 이상설, 이준, 이위종을 헤이그 특사로 파견하게 된다. 여기에서 우리 교과서나 보통의 교육은 일본이 간계를 부려서 고종의 정당한 주장을 일본이 방해하여 실패한 것처럼 묘사한다. 그래서 이와 같은 묘사도 틀렸다는 것이다. 헤이그특사 라는 것 자체가 전혀 실효성 없는 특사였다 라는 것을 인정하기가 지금까지의 감정으로는 너무도 받아들이기 힘든 게 현실이다.

전 세계적으로 독립이라는 개념이 없고 식민지배가 국제질서였던 현실에서 헤이그특사가 받아들여질지는 당연히 만무하지 않은가.

무조건적인 반일적 감정이 최대 선(善)이 아니다. 세계사적 측면에서 우리의 역사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려는 노력과 그를 가르치려는 움직임이 필요할 것이다. 이러한 노력은 편향의 문제도 아니며 다양성의 문제도 아니다. 사실의 기술 문제다. 쉽게 해결되지 않을 분노의 미신이 우리를 감싸고 있다. 참으로 답답한 문제다. /최종부 경제진화연구회 부회장

(이 글은 자유경제원 '청년함성' 게시판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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