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짚신 속 2674자의 절규…'파리장서' 원본 공개

2026-02-26 10:57 | 이석원 부장 | che112582@gmail.com
[미디어펜=이석원 문화미디어 전문기자] 1919년 봄, 한 선비가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 중국 상해로 향했다. 그의 짚신 속에는 잘게 찢어 숨긴 종이 조각들이 들어 있었다. 그것은 전국의 유학자 137명이 연명하여 파리평화회의에 보내려던 독립청원서, 이른바 '파리장서(巴里長書)'였다. 그간 문헌으로만 전해지던 이 역사적 문건의 '진짜 얼굴'이 3·1절을 맞아 드디어 공개됐다.

국립한국문학관(관장 임헌영)이 이번에 공개한 자료는 파리장서의 친필 원본이다. 3·1운동 직후 영남과 충청을 비롯한 전국 유림이 뜻을 모아 작성한 이 서한은 당시 유림의 거두였던 면우 곽종석(郭鐘錫)이 직접 붓을 들어 썼다. 후대의 한학자 이가원과 정무연의 배관기(拜觀記)가 덧붙여져 사료적 가치는 물론 문학적·서예적 가치까지 입증된 귀한 유물이다.

국립한국문학관이 '3월의 문학인'으로 곽종석과 김창숙을 선정했다. /사진=국립한국문학관 제공



"늙은이가 죽을 곳을 얻었다"…목숨과 맞바꾼 문장들

파리장서 사건의 발단은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에 유림 대표가 포함되지 않았던 데서 시작된 '뼈아픈 자성'이었다. 심산 김창숙(金昌淑)은 "망국의 책임을 져야 할 유교가 이번 운동에 빠졌으니 어찌 부끄러움을 견디겠느냐"며 통탄했다. 그는 곧장 스승이자 동지인 곽종석을 찾아갔다. 제자의 방문을 받은 곽종석은 "망국대부(亡國大夫)로서 늘 죽을 곳을 찾지 못해 한이었는데, 오늘이야말로 죽을 곳을 얻었다"며 기꺼이 독립청원서 작성을 맡았다.

작성 과정은 긴박했다. 김창숙이 영남을 돌며 뜻을 모으는 사이, 충청에서는 김복한(金福漢)을 중심으로 별도의 청원서가 작성되기도 했다. 유림은 치열한 회의 끝에 곽종석의 원고를 채택하고 수정·보완을 거쳐 최종본을 완성했다. 이 서한은 상해의 김규식을 거쳐 파리로 우송됐으며, 국내외 언론과 향교에도 배포됐다. 이 일로 곽종석 등 유림 인사 20여 명이 옥고를 치르며 목숨을 걸고 지켜낸 문장이 되었다.

곳곳에 면우 곽종석의 가필과 교정의 흔적이 보이는 '파리장서' 원문(사진 위)과 연민 이가원의 배관기(拜觀記). /사진=국립한국문학관 제공



'독립'은 곧 '세계 평화'… 현대적 가치로 재조명

이번에 공개된 파리장서는 단순히 과거의 유물을 넘어 우리 문학사의 중요한 유산으로 평가받는다.

첫째, 3·1운동이 신분과 이념을 초월한 전 국민적 항쟁이었음을 입증하는 실증 자료다. 보수적인 구 지식인층으로 분류되던 유림이 조직적으로 규합해 국제 사회에 목숨 건 호소를 보냈다는 점이 이를 뒷받침한다. 

둘째, 정교한 외교 문서로서의 가치다. 필자들은 국제 정세를 면밀히 파악하고 논리적인 문장을 구성해 독립의 당위성을 설득했다. 

셋째, 이들이 주장한 독립은 곧 세계 평화의 실현이라는 인류 보편적 가치를 담고 있다. "만국이 평화롭다면 우리 한국도 만방의 하나이니 어찌 우리만 평화롭지 않겠느냐"는 구절은 오늘날에도 깊은 울림을 준다.

한편, 국립한국문학관은 자료 공개와 함께 '3월의 문학인'으로 곽종석과 김창숙을 선정했다. 오는 3월 26일에는 성균관대학교에서 이들의 문학적 성취와 파리장서의 의미를 톺아보는 학술행사도 개최할 예정이다.

[미디어펜=이석원 문화미디어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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