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펜=김동하 기자] 중동 지역의 전쟁 양상이 격화되면서 국내 석유화학 업계의 기초 원료 수급과 수익성에 비상등이 켜졌다. 국제 유가 상승으로 기초 원재료인 나프타 가격이 상승하는 가운데, 수익 방어를 위해 국내 석유화학 빅4(LG화학·롯데케미칼·금호석유화학·한화솔루션)는 '탈(脫) 범용' 및 고부가가치 스페셜티 전환 속도전을 본격화하고 있다.
5일 업계에 따르면 이란의 호르무즈 해협 봉쇄 공식화 등 중동발 지정학적 위기가 고조되면서 석유화학 산업의 핵심 기초 원료인 나프타 수급망에 심각한 차질이 빚어질 것이란 우려가 확산되고 있다. 중동의 불안정은 곧바로 유가 급등을 부르고 이는 시차를 두고 나프타 가격 상승을 동반해 기업들의 제조 원가를 크게 끌어올렸다.
원가는 치솟는데 글로벌 수요 둔화로 최종 제품의 판매 가격은 올리기 힘든 스프레드(마진) 축소 국면이 도래했다. 석유화학 산업의 핵심 수익성 지표인 에틸렌 스프레드는 제품 가격에서 원재료인 나프타 가격을 뺀 수치다. 업계는 통상 톤당 250달러 안팎을 손익분기점으로 판단한다. 하지만 최근 이 지표는 50달러 선까지 떨어져 기존 범용 나프타분해설비(NCC) 중심의 사업 구조로는 제품을 만들수록 적자가 누적되는 한계 상황을 드러냈다.
이에 따라 국내 석유화학 업계는 원유 가격 변동성에 휘둘리는 범용 에틸렌 생산 비중을 줄이고 고객 맞춤형 고부가 스페셜티 소재로 수익 구조를 다변화하는 밸류체인 전면 개조에 전사적 역량을 쏟아붓고 있다.
LG화학은 원가 경쟁력이 악화된 범용 석유화학 제품 대신 모빌리티와 전지 소재 등 고부가 스페셜티 중심의 4대 성장동력 체제로 사업의 무게 중심을 완전히 이동했다. 특히 전남 여수산업단지에 위치한 대규모 범용 NCC를 대상으로 강도 높은 사업 구조조정 논의에 속도를 내며 고정비 출혈을 막는 데 집중했다.
이와 동시에 기존 폴리염화비닐(PVC)이 지닌 내열성 단점을 완벽히 극복한 초고중합도 PVC 개발에 성공해 전기차 급속·초급속 충전 케이블 소재 시장을 선점하는 등 원가 변동을 이겨낼 압도적인 기술 격차를 벌렸다. 또한 반도체용 고순도 세정액(IPA)과 전기차용 고기능성 합성고무(SSBR), 탄소나노튜브(CNT) 등 고부가 파이프라인을 지속적으로 확대하고 있다.
롯데케미칼은 중동발 나프타 의존도를 근본적으로 낮추기 위해 창사 이래 최대 규모의 구조조정을 단행하며 체질 개선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최근 산업통상부의 사업재편 최종 승인을 받아 HD현대오일뱅크와의 신설 법인을 통해 충남 대산산업단지에 위치한 110만 톤 규모의 초대형 NCC 설비 가동을 전면 중단했다.
이는 2조1000억 원 규모의 대대적인 금융 지원과 세제 혜택을 동반한 조치로 원가 리스크를 원천 차단하는 계기가 됐다. 롯데케미칼은 범용 설비를 과감히 도려내는 한편 오는 2030년까지 스페셜티 매출 비중을 전체의 60% 수준으로 대폭 상향한다는 명확한 로드맵을 수립하며 불확실성에 정면으로 맞섰다.
금호석유화학은 타이어용 고기능성 합성고무인 솔루션스타이렌부타디엔 고무(SSBR) 분야의 독보적인 생산 능력을 바탕으로 마진 악화 위기를 돌파했다. 배터리 팩 탑재로 차체가 무거운 전기차는 높은 하중을 견디면서도 마모 저항을 줄이고 주행 효율을 극대화해야 하므로 고품질 SSBR 소재가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증권업계 분석에 따르면 유럽 시장 기준 SSBR 가격은 범용 제품(ESBR) 대비 약 37% 이상 높게 형성돼 원가 인상분을 완벽히 상쇄하는 것으로 파악됐다. 금호석유화학은 이미 12만3000톤의 생산 능력을 확보한 데 이어 올해 4분기 완료를 목표로 3만5000톤 규모의 추가 증설을 단행해 급증하는 글로벌 전기차 시장 수요를 독식할 준비를 마쳤다.
한화솔루션은 나프타 원료를 기반으로 하는 범용 석유화학 사업의 태생적 리스크를 피하기 위해 글로벌 전력망 확충 트렌드에 발맞춘 초고압 케이블 소재를 새로운 핵심 스페셜티로 낙점했다. 글로벌 전력망 확대로 인한 수요 급증에 선제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전선 소재(W&C) 사업부를 전격 신설하고 조직 역량을 집중시켰다.
국내 최초로 국산화에 성공한 400kV(킬로볼트)급 케이블용 XLPE(가교 폴리에틸렌)와 해저케이블용 XLPE를 앞세워 글로벌 절연 소재 시장 공략에 총력을 기울였다. 원유 가격의 직접적인 영향권에서 완전히 벗어난 고부가가치 사업 밸류체인을 확고히 다지며 장기적인 수익 창출 기반을 마련했다.
석유화학업계 관계자는 "중동 분쟁 격화에 따른 나프타 가격 급상승은 단순한 시황 악화를 넘어 에틸렌 스프레드 붕괴라는 국내 석화 산업의 치명적인 한계를 가장 뚜렷하게 드러냈다"며 "단순 범용 설비의 가동률 조정을 넘어 독자적인 기술 격차를 지닌 고부가가치 스페셜티 시장을 얼마나 빨리 장악하느냐가 올해 각 기업의 생존과 턴어라운드를 판가름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미디어펜=김동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