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규태 재산권센터 간사 |
자살한 서울대생, 부자 부모를 찾는 연대생
수저계급론에 회의를 가진 어느 한 서울대생이 유서를 남기고 스스로 생을 하직했다. 자살한 서울대생은 “힘들고 부끄러운 20 년이었다”면서 “저를 힘들게 만든 건 이 사회고 저를 부끄럽게 만든 건 제 자신”이라는 글을 남겼다. 글쓴이는 자신의 자살 선택이 경제적 사고의 소산이라면서 자기를 힘들게 만든 건 이 사회와 이를 구성하는 ‘남은 사람들’이라고 재차 밝혔다. 이어 그는 먼저 태어난 자, 가진 자, 힘 있는 자의 논리에 굴복하는 세상에 버티고 있을 이유가 없다면서, 정신적 귀족으로서의 자신이 수저 색깔에 따라 생존이 결정되는 현실을 떠나고자 한다고 강조했다.
자살한 서울대생과 더불어 최근 필자의 눈에 들어온 또 하나의 젊은이가 있다. ‘부자 부모를 찾는다’는 피켓을 들며 마스크를 쓴 채 대학 정문 앞에서 일인 시위를 벌이던 연대생이다. 그는 “집안에서 해결하지 못하는 비대한 등록금이 짐이 되어 휴학을 하게 되었다”면서 “철학과 문학 등의 학문적 호기심을 충족하고 싶은 자신이 왜 수업료를 내며 교육을 받아야 하냐”고 반문했다. “교육은 누구나 누려야 할 국민의 기본권리”라고 주장하며 “젊은 층이 맘껏 공부할 수 있어야 사회가 유지되고 발전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일부의 뒤틀린 심사가 흙수저 헬조선 증후군을 자살로 이어지는 우울증 수준으로 끌어올리고 있다. 이어지는 누군가의 자살은 안타깝지만 거기서 끝이다. 이는 개인과 사회, 선택의 자유, 책임과 삶에 대한 태도의 문제로 치환된다.
선택할 자유 없는 존재, 바로 부모
자살한 서울대생이나 부자 부모를 찾는 연대생에게 말해주고 싶은 한마디가 있다. 살면서 매순간 선택하지만 절대로 선택할 수 없는 한 가지가 있다. 바로 부모다. 자신이 태어나기 전 결정되기 때문이다.
원래 지상천국은 이루어질 수 없다. 누구나 다 행복할 수 있는 세계는 온라인게임에서나 가능하다. 자신의 모자란 부분에 집중하면 스스로 불행해진다는 진실을 모른 체 하면 안 된다. 부모 또한 마찬가지다.
▲ 자살을 택한 서울대생이나 부자 부모를 찾는 연대생이 모르는 것이 하나 있다. 원래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부지기수다. 죽을 때까지 고단한 삶이다. 사진은 부자 부모를 찾는 연세대학교 학생의 플래카드./사진=SNS커뮤니티 게시판 캡처 |
어린 시절엔 누구나 한 두번 드라마 같은 일을 상상하곤 한다. 우리집과 비교도 할 수 없는 갑부집 아저씨 사모님이 어느 날 큰 차를 끌고 와 나에게 자신이 내 부모라 말한다. 나는 만면에 행복한 웃음을 띠고 날 키워준 원래의 부모에게 감사를 표한 뒤, 그들의 손을 잡고 집을 나선다. 다만 꿈은 언제나 거기서 끝난다. 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어릴 적의 미숙한 꿈이다.
온갖 사회의 벽에 부딪혀 자살을 생각하는 이들이나 자신의 처지를 부모 탓으로 돌리는 이에게 고한다. 노력이나 부모만으로는 행복해질 수 없다. 노력과 능력,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DNA 재능과 재산, 타이밍과 운까지 맞아떨어져도 이를 담아내는 마음의 그릇에 구멍이 뚫려 있는 이는 ‘흙수저’, ‘헬조선’에 계속 머무를 것이다.
살다보면 알게 된다. 노력으로도 되지 않는다. 재능이 넘쳐도 때를 만나지 못하면 암울하게 삶을 마감한다. 천운이 따라도 이를 맞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그런 일이 있었는지 모르고 지나간다. 아무 능력 없다면 3대를 잇기 힘든 게 부자인 세상이다. 하지만 그것도 원래 그런 게 세상의 이치다.
상대적 박탈감은 본인의 수준을 입증하는 격
재벌이든 누구든 타인에게 괜한 상대적 박탈감이 드는 사람들은 본인의 수준을 입증하는 격이다. 자살을 선택하는 이는, 부모는 물론이고 그를 알고 있는 지인 모두에게 평생 지울 수 없는 대못을 박는 행위를 저지를 뿐이다. 부자 부모를 찾는다는 연대생은 자신의 부모는 안중에도 없는 패륜아나 마찬가지다.
당신을 낳기 위해 10개월 간 태중에 품었던 어미가 죽기 전까지 평생 먹먹한 슬픔과 상처를 안기는 자식을 자식이라 말할 수 있을까. 공교육도 아니고 명문대에서의 인문학 고등교육을 자신이 책임질 생각 않고 부모와 사회 탓으로 돌리는 젊은이는 코흘리개 8살배기나 다름없다.
▲ 자살을 택한 서울대생이나 부자 부모를 찾는 연대생. 젊은이들의 '흙수저', '헬조선' 증후근이 화제다. 하지만 나는 이만큼의 대접을 받아야 하는데 사회가 이것밖에 해주지 않는다고 불평하는 사람, 이 정도로 공부하고 준비했는데 내 자리가 없다며 툴툴대는 사람은 그것밖에 되지 않는 사람이다. 현실은 매정하다. 자신의 부족함을 메꾸고 준비하지 않는다면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다./사진=jtbc 영상캡처 |
예전엔 밥을 남기는 게 죄였다. 배고픔에 허덕이고 끼니 때우는 것이 가장 큰 걱정거리였기에 그렇다. 하지만 지금은 밥을 끝까지 다 먹는 게 죄다. 내 몸과 내 건강에 해가 되기에 그렇다. 지난 삼사십년 사이 우리를 둘러싼 세상은 분명 풍요로워졌다. 이처럼 어느 때보다 사는 건 풍요롭지만 일부의 마음은 시리아 난민보다 더하다.
자살을 택한 서울대생이나 부자 부모를 찾는 연대생이 모르는 것이 하나 있다. 원래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부지기수다. 죽을 때까지 고단한 삶이다. 그리고 한 가지 진실이 더 있다. 살다보면 별의별 일을 겪곤 하지만 그래도 세상은 견딜 만하다. 살만 하다. 무척이나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었더라도 지나고 나면 자신의 밑거름이 되곤 한다. 너털웃음을 지으며 그때를 추억한다. 인생은 초콜릿상자 같은 것이다. 다음에 어떤 초콜릿을 집게 될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김규태 재산권센터 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