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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국가의 초기단계는 독점자본주의와 재벌구조

2016-01-31 09:28 | 편집국 기자 | media@mediapen.com

반기업 정서의 근원 3 : 정경유착의 필연성
에도막부의 붕괴와 명치유신(明治維新)의 사례

다시금 생각해 보는 페리제독의 내항

일본의 근대화 과정을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사건이 1853년 페리제독의 출연과 1854년 미일화친조약이다. 세계사 및 동아시아의 근대사를 논하는 역사교과서와 경제사 서적모두 “미국의 압력에 의한 강제적 개항”으로 규정하고 있으나 조금만 냉정하게 들여다보면 의문점이 생긴다. “쿠로후네 사건”이라고 명명할 만큼 흑선들의 출몰이 얼마만큼의 물리적 공포감을 일본에게 줬던 것일까? 이다. 1차 아편전쟁이 일어나던 1840년 청나라의 개항을 똑똑히 지켜봤던 일본의 입장에서 페리제독의 내항(內港)이 달갑지는 않았겠지만, 일본의 내부정세는 청나라와 판이하게 달랐다.

   
▲ 사진은 사열식에 참여하는 페리제독. 1853년 요코하마 막부의 수뇌부들에게 페리의 등장은 서구의 위협으로 평가되지만, 하급무사들에게 페리의 존재는 막부의 시스템을 갈아엎을 절호의 기회이자 명분 이였다./사진=자유경제원 '세상일침' 게시판

19세기 들어오면서 일본은 사회-행정제도와 인적구성원의 변화에 모순점이 생긴다. 하부구조에서부터 상업이 팽창하면서 막부체제의 조세제도와 부딪치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 일본의 사회-행정적 구성은 9개의 지방산하, 62개의 국(國)예하, 518개의 번(藩)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러한 복잡한 행정구성속에서 각기 다른 조세제도를 가지고 있던 구조라면 자본주의의 초기단계인 독점자본주의는 불가능했다.

여기에 발맞추어 당시 인적구성원의 변화를 보면 첫째, 무사계급(士)의 상업 활동, 둘째, 불분명하게 되어버린 사농공상의 구조, 셋째, 사(士)계급을 제외한 농(農)공(工)상(商) 계급의 평준화이다.
당시의 농촌공업 역시 상인이 주도하는 하청제 가내공업의 형태로 일부지역에서 발달하고 농민반란이 빈번하게 발생하였다는 사실이 말해주듯 사농공상의 폐지는 메이지유신 이후 메이지정부의 결과물이라기보다 에도막부 말기부터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 죠슈번의 무사들 : 제일 왼쪽이 이토우 히로부미. 잘 알려진 데로 명치유신은 하급무사들의 반란이고, 대부분의 사무라이들은 상업에 종사하고 있었다./사진=자유경제원 '세상일침' 게시판

하급무사들, 막부를 뒤집을 명분을 잡다

막부의 개항을 지켜본 사쓰마와 죠슈번 무사들의 개혁의지에 불을 지핀 것이 서양세력에 대한 막부정부의 불평등 조약에 대한 반발이었고, 거기에 발맞추어 기치로 내건 슬로건이 존왕양이(尊王攘夷)였다는 것이 일반적인 상식이지만 더 깊이 들여다보면 사회적 모순점에 대한 일본사회의 근본적인 개혁의지였다는 게 더 역사적 사실에 가깝다.

대중에게 너무도 유명한 일본의 재벌기업 미쓰이(三井)와 미쓰비시(三菱)가 17세기와 18세기에 걸쳐 상업에 종사하던 하급무사들 이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오늘날 까지도 명맥을 지속시키는 두 기업들 이외에 19세기 초반부터 일본에서는 하급무사의 상업 활동이 두드러졌고, 경직된 조세제도는 상업 활동에 지장을 주며 계급사회를 지속시키는 “안전장치”였을 뿐이다.

이러한 사회적 변화 열기가 끓어오를 때쯤 일어난 사건이 페리제독의 내항이다. 이 사건에 의해 상업 활동에 열을 올리던 대부분의 하급무사 집단들은 막부를 뒤엎을 명분과 실리를 찾은 것이고 막부의 성공적인 해체는 시장통합을 의미한다.

보다 깊은 이해가 필요한 역사속의 봉건제도(Feudalism)

중앙집권을 오랫동안 경험해온 한국인들에게 봉건제도는 군주제하에 지방이 나름 자치권을 가지고 있던 제도 정도로만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19세기 이후 패권을 잡은 대부분의 국가들이 봉건제도를 경험한 국가라는 것을 인식해 볼 때, 봉건제도가 지닌 특유의 긴장감이 만들어낸 역동적 효과를 더 한다면 작금의 역사인식 보다 더 깊은 성찰과 이해가 필요하다. 독점자본주의 (Monopoly Capitalism)는 말 그대로 부정적 뉘앙스가 풍기지만 모든 성공국가의 초기단계는 독점자본주의와 재벌구조라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그 의미는 성공국가는 대부분 위로부터의 혁명이고, 위로부터의 혁명이 가능한 것은 아이러니 하게도 봉건사회가 가진 미묘한 긴장감, 전쟁과 같은 극단적인 물리적 충돌도 불사하는 강한 경쟁심리 속에 오랜 기간에 놓여 있던 일본과 서유럽 국가들 같은 문명에서 보이는 특유의 정서이다.

이러한 정서의 이면에는 자신보다 물리적으로 강한 집단 혹은 개인에 대한 존중(?) 내지는 흡수될 준비가 항상 내제되어 있다. 이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자신보다 강한 대상과 왜 충돌을 하는가?

공산전체주의 같은 극도의 비도덕적 대상이 아니라면, 그들과 연합해서 더 큰 시너지를 낼 수 있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그러므로 분명한 명분과 목표가 주워졌을 때 2배 내지 3배, 그 이상으로도 통합이 가능한 것이 봉건사회를 경험한 국가들의 특징이다. 조선왕조 이래 전쟁과 실리적인 상업 활동 같은 역사적 경험이 전무 하다시피 한 한국의 경험에서 자본주의와 근대국가의 형성과정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 의화단 사건 진압과 8개국 연합. 사진 좌측부터 영국, 미국, 러시아, 영국령인도, 독일, 프랑스, 오스트리아-헝가리왕국, 이탈리아, 일본./사진=자유경제원 '세상일침' 게시판

한국인들은 구한말 일본의 활약에 왠지 모를 경외심과 괘씸함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1899년에 일어난 의화단 사건의 진압과정에서 일본의 활약(?)은 유교문명을 배신한 일본의 일탈이라고 생각하면 그 괘씸함(?)은 배가 될 것이지만, 의화단 사건을 진압한 일본과 열강 8개국들 모두 봉건사회를 경험한 국가들이고, 그 당시에도 프랑스와 미국을 제외하면 모두 입헌군주제를 시행하던 국가들이다. 여기에 청나라에서 나오는 이권이라는 명분과 목표가 주어진 상황에서 비슷한 문명패턴끼리의 자연적 연합으로 해석 할 여지는 충분히 있다.

경희대 경제학과 안재욱 교수는 본인의 저서 “흐름으로 읽는 자본주의의 역사”에서 한반도는 통일신라 이후부터 조선왕조가 끝나는 시기까지의 경우 과도한 중앙집권이 상업 활동을 가로막았다고 서술 한 바 있다. 중앙통제에 의한 자본의 흐름은 당연히 경직되기 마련이고 효율적인 측면에서도 과도한 외압이 생길 위험이 존재한다.

유독 봉건제도와 그것이 가져온 결과물에 대한 이해가 떨어지며, 중앙집권이 모든 것을 결정해야 하고 그러기를 바라는 현재 한국(인)의 정서에서 르네상스이후 산업혁명에 성공한 서유럽과 일본이 경험한 메이지유신을 통해 봉건제도의 종말과 함께 만들어진 천왕제의 절대성은 결국 시장통합의 성공을 의미한다는 것을 경제학을 비롯한 정치경제사 분야에서 방점을 찍을 필요가 있다.

정경유착의 필연성과 패전 후 일본

페리의 내항이후 전란을 거치며 일본의 막부정권이 시행한 서구식 산업화의 결과 많은 수의 비효율적인 막부 소유의 공장과 광산이 남겨졌다. 특이한 점은 유신의 성공이후 메이지 정부는 이것들을 신속하게 민영화했다는 것이다.

이 시설들은 당시 경쟁력과 생산력이 뛰어난 재벌들에게 운영되게 되었으며, 민영화의 체제의 힘과 효율성은 경제적 측면으로만 봤을 때 대성공 이었고, 2차 세계대전이 끝나는 시기까지 지속되었다. 이시기 단 하나의 치명적 실수는 경제적 팽창과 시장이 형성되는 시기가 일본의 군국주의 진행과정과 일치했다는 점이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전 “페리의 검은 배(黑船)”로부터 배운 교훈을 잘 실천했지만, 좀 과하게 받아들였다. 이 이후 일본은 과거 스페인제국이 패권을 놓친 원인이 된 과도한 군비증강과 끊임없는 대외 전쟁, 즉 경제규보보다 더 큰 군비지출을 함으로 몰락의 길을 걷게 된 과정을 그대로 답습하는 오류를 범했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은 일본이 희생도 컸지만 승전 이후에는 오히려 경제에 활력이 생겼다. 1890~1910년까지의 20년 동안 일본은 실질 GDP가 연간 2.16% 비율로 성장했다. 이 결과가 일본의 팽창 욕을 자극했고, 중일전쟁이 벌어진 1937년에는 국가 예산 중 47%가 군비증강에 쓰였다.

19세기 중반 서유럽의 시각에서 일본은 상당히 후진적이었기 때문에 아주 간단한 기술적 진보조차 눈에 띌 만한 성과를 근대화 과정에서 만들어냈다. 일본의 정세는 서구와의 직접적인 경쟁에 노출되었고 그들과의 가혹한 경쟁이 일본의 기업들을 튼튼히 단련시키는 결과를 만들었다.

많은 정치경제학자들이 일본의 전후 기적의 원인을 맥아더 장군에 의해 수행된 민주적 · 경제적 개혁에서 찾는다. 첫째는 재벌의 해체이고, 둘째는 민주주의의 확산 셋째는 광범위한 토지개혁이다. 이 세 가지 조치는 전체주의와 군국주의에 물든 일본을 개혁한다는 의미로써는 훌륭했지만 사실 경제적으로 큰 의미는 없었다.

최근 경제통계에 따르면 그 당시에도 재벌에 대한 통제는 그리 심하지 않았으며 기존에 일본재벌의 경쟁력과 미국에 의한 개조작업 당시 일본의 삶의 질을 떨어뜨릴만한 개혁은 피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일본은 당시의 조선과 건국초기 대한민국은 흉내 내기조차 힘든 변화와 활동을 통해 근대를 맞이했고, 성공과 실수를 반복하며 결과에 상관없이 재기할 수 있는 물적 기반을 성공적으로 이뤄냈다. 메이지 유신 성공이후 일본 사회는 경제적 근대화와 전후 복구 과정에서 만들어진 경험은 패전이후 어떤 결과가 오더라도 그것을 극복할 만한 사회적, 경제적 기반이 튼튼하게 만들어져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임종화 경기대학교 무역학과 객원교수

(4편에서 계속. 이 글은 자유경제원 '세상일침' 게시판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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