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펜=김지호 기자] “보험, 은행 등 금융권의 로비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모르시죠?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황영기 회장 할아버지가 금융투자협회에 온다고 해도 금융권의 조직적 로비력을 당할 수 없을걸요. 증권사 사장들이 삭발하고 단체 농성을 한 것도 아니고. 금융투자업계가 단결해서 협회에 힘을 모아 좀 더 로비력을 키울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한 자산운용사 고위 관계자는 금융당국이 은행권에 일임형 개인종합자산관리계좌(ISA)를 허용한 이유를 묻는 기자에 질문에 이같이 답했다.
금융당국이 그간 규제로 은행권에 일종의 ‘부채의식’을 갖고 있어 애당초 일임형 ISA를 허용하는 걸로 마음을 먹고 있었던 데다 금융투자업계의 반발이 그리 심하지 않자 그대로 밀어붙였다는 설명이다. 그는 특히 이번에도 조직적이고 치밀한 은행권에 비해 고질적으로 허약한 금융투자업계의 로비력이 고스란히 드러났다고 말했다.
금융투자업계의 허술한 로비력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지만 이번에는 고유업무로 여겨졌던 투자일임업마저 은행권에 넘겨주면서 그 위기감은 더욱 높아지고 있다. 비록 ISA에 한정됐고 비대면 계좌 개설을 얻었다고는 하지만 은행권이 추후 ISA를 넘어서는 투자일임을 요구할 수 있다는 공포감이 증권사를 뒤덮고 있는 것이다. 황영기 회장이 홀로 고군분투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이번에도 더불어 민주당에 최근 입당한 주진형 한화투자증권 사장이나 국민의당에 입당한 김봉수 전 한국거래소 이사장, 이번 총선에 출사표를 던진 이정환 전 한국거래소 이사장 등이 나왔지만 아직 금융투자업계 출신 국회의원이 전무하다는 점은 증권사에 불리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또 금리 인하 등 통화정책이 국내 자본시장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지만 아직도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에는 자본시장 전문가가 참여하지 못하고 있다. 이와 관련한 은행법 개정안은 아직도 국회를 통과하지 못하고 있다. 이 역시 금융투자업계의 부실한 로비력을 보여준다.
무엇보다 증권사들이 협회에 힘을 실어주지 못한 것이 은행권에도 일임형 ISA를 넘겨준 원인이라는 지적이다.
물론 전체적으로 업황이 좋지 않았지만 금투협 회원사 회비는 지난 2012년 570억원이었던 것이 2013년 530억원으로 줄었다. 2014년과 2015년에는 2013년 대비 100억원 삭감된 430억원으로 급감했다. 올해 들어 지난해 증권사 업황이 다소 좋아지자 회비를 겨우 5% 인상했지만 이마저도 자율납부 형식이다 보니 금투협 입장에서는 받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다.
돈 뿐 아니라 금투협의 인력도 줄었다. 지난 2012년 박종수 회장 시절에는 40여명의 직원이 구조조정을 당해 금투협을 떠났다. 250명 남짓한 직원 중 5분 1이 나간 것이다. 로비력의 기본은 돈과 사람인데 이를 줄였으니 힘을 쓸 수 있을리 없다.
이번 은행권 일임형 ISA 허용 사례를 통해 금융투자업계는 깨달아야 한다. 금투협의 로비력은 결국 증권사와 자산운용사 등 회원사가 얼마나 힘을 실어주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을 말이다. ‘회비가 비싸다’, ‘업계 대변을 잘 못한다’고 금투협에 푸념만 해서는 금융투자업계는 영원히 금융권에 밀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미디어펜=김지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