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펜=문상진 기자] 서울 지하철 2호선 강남역 화장실에서 발생한 '묻지마 살인사건'이 '여성혐오', '남성혐오'라는 남녀성대결 양상으로 뜨겁게 치닫고 있다. 극단적 갈등양상이 지나친 일반화의 오류라는 지적에도 불구하고 수그러들 줄 모르고 있다.
지난 17일 서초동 주점 공용화장실에서 스물셋 여성을 흉기로 무차별 살해한 김모(34)씨는 조현병(정신분열증) 환자다. 24일 현장검증에서 김 씨는 화장실 안으로 들어가 경찰이 준비한 마네킹을 흉기로 수차례 찌르는 장면을 태연히 재연한 것으로 알려졌다.
운동복 차림에 모자와 마스크를 했지만 심경을 묻는 취재진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그냥 뭐 담담하다"고 답했다. 피해여성 유가족에게는 "개인적인 원한이나 감정이 없기 때문에 미안하고 송구스럽다. 죄송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고 했다.
김 씨는 2008년 이후 병원에 6차례나 입원한 전력이 있다. 경찰은 '여성혐오'라기보다 조현증을 앓던 그가 여성들이 자신을 괴롭힌다는 피해망상에 빠져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보고 있다. '여성혐오' 발단은 김 씨가 체포 직후 "여성에게 무시당해 화가 났다'고 진술하면서 시작됐다. 하지만 경찰은 김씨가 식당에서 일할 때 남성 고객과도 자주 마찰을 빚었다며 편견의 대상이 여성으로 한정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강남 묻자마 살인 사건'은 우리 사회에 오랫동안 똬리를 틀고 있던 남녀 차별에 대한 여성들의 반기를 불러일으키며 '여성혐오' 폭발의 기폭제가 됐다. 이번 살인 사건 이전에도 이미 우리 사회는 여협·남협에 대한 분노가 임계치를 넘어서고 있었다. 일상화된 놀이처럼 온라인 커뮤니티나 SNS에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노출돼 왔다.
'강남역 묻지마' 유가족 두번 울리는 여혐·남혐 저주 굿판 걷어라. 서울 지하철 2호선 강남역 화장실에서 발생한 '묻지마 살인사건'이 '여성혐오', '남성혐오'라는 남녀성대결 양상으로 뜨겁게 치닫고 있다. 극단적 갈등양상이 지나친 일반화의 오류라는 지적에도 불구하고 수그러들 줄 모르고 있다./사진=시민 제보
여성을 비하하거나 조롱하는 여성혐오적 표현이 판을 쳐 왔다. 여성이 매력이 없어져 시장가치가 떨어졌다는 상장폐지녀의 줄임말인 '상폐녀', 한국의 젊은 여성을 비하하는 '김치녀', 여자는 3일에 한번씩 패야 한다는 '삼일한', 성형한 여성을 비하는 성형괴물의 줄임말인 '성괴'등이 심심치 않게 떠돌았다.
실제로 많은 여성들이 여성 혐오를 직간접적으로 경험했다고 답하고 있다. 지난해 10월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여성 3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83%가 인터넷·SNS에서 여성 혐오 표현을 경험했다고 답했다. 여성 절반 이상(58.3%)은 앞으로 여성 혐오가 더 심해질 것이라고 예상했고, 혐오가 약화될 것이란 응답은 8.7%에 불과했다.
여성에 대한 비하적 발언에 대한 반발의 남성비하 혹은 '남성혐오'를 낳는다. 한국남자와 벌레는 섞은 '한남충', 한국남자는 숨쉴 때마다 패야 한다는 '숨쉴한' 등이 그것이다.
이처럼 온라인상에 퍼져 있던 여성 혐오에 대한 문제가 '강남 묻지마' 살인 사건으로 강남역이 해방구가 됐다. 이후 대구·부산·대전 등으로 퍼지면서 수많은 포스트잇이 나붙고 추모의 인파가 몰렸다. 현장에서 남녀 갈등을 우려하는 목소리를 내던 여중생도 핑크색 코끼리 복장을 한 남성도 봉변을 당했다.
추모현장에 나붙은 포스트잇에는 '나는 오늘도 우연히 살아 남았다' '언제까지 여자가 조심해야 하는가' '남자가 죽였다' '여자라서 죽었다' 등의 메모지 수천 장이 나붙었다. 이에 한 남성은 '한 범죄자가 살인을 저질렀다고 온 남성을 모욕하지 말라'는 주장을 SNS에서 퍼기도 했다. 남녀 강등이 위험 수위를 넘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 희생자를 위한 추모의 현장이 증오의 현장으로 바뀌는 건 어렵사리 봐왔다. 최근 세월호 추모가 대표적일 것이다. 증오 대상의 표적을 벗어나 대통령에서 정부·여당으로, 대한민국으로 창끝이 벌어지다가 끝내는 추모 현장에서 태극기를 불태우는 막가파로 변질됐다. 이성은 사라지고 분노와 증오로 가득 차 결국 추모라는 순기능은 사라지고 분열과 상처만 남는 역기능만 안겼다.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남성과 여성이 서로 협조하고 협동하면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잇는 만큼 냉정하게 상황을 인식해 불필요한 소모전을 벌이지 말아야 한다고. 지금 우리사회는 남녀뿐만 아니라 여러 집단이 서로 혐오의 대상이 되는 '혐오 사회'로 가고 있다는 우려한다.
화장실을 뜯어 고친다고 마음의 상처마저 치유될 수는 없다. 서로를 혐오하고 물어뜯는 것은 문제 해결의 희망마저 꺾어버리는 어리석음이다. 추모는 슬픔의 힘을 바탕으로 다시는 재발하지 않게끔 모두가 마음을 여는 것에서 비롯돼야 한다.
분노하느라 추모를 잊어서도 안 되고 추모하느라 분노해서도 안된다. 슬픔이 분노가 되어서는 아무런 희망도 없다. 남녀갈등이 아니라 남녀 모두가 안전한 사회를 만드는 것이 누구가의 죽음을 헛되지 않게 하는 것이다. 어처구니 없게도 사랑하는 가족을 떠나보낸 유가족의 슬픔앞에 쌈박질이라니….
[미디어펜=문상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