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펜=이원우 기자]"저와 비슷한 심정의 행원들이 그만큼 많았다는 거겠죠."
한 시중은행에서 근무하고 있는 A씨는 최근 익명게시판 어플 '블라인드'의 위력을 실감했다. 자사 브랜드 멤버스 고객유치 실적 압박이 너무 버거워 힘들다'는 내용으로 게시판에 글을 올린 적이 있는데 그 이후 머지않아 금융감독원이 해당 은행에 '자제'를 당부하는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미 금융권에선 그룹 관계사들이 고등학교에서까지 영업을 벌일 정도로 실적 압박이 심하다'는 얘기가 파다한 상태였다.
은행권 실적 압박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영업점 직원들의 스트레스도 문제지만 가계부채 문제를 가속화 시킨다는 지적까지 나온다. 멤버십 가입만이 아니라 '저금리'를 미끼로 한 대출유도까지 증가하는 추세이기 때문이다. /미디어펜
은행권 실적 압박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영업점 직원들의 과도한 스트레스도 문제지만 가계부채 문제를 가속화 시킨다는 지적까지 나온다. 최근 저금리 기조에 따라 수익 다변화 전략을 세우는 탓에 '저금리'를 미끼로 한 대출이 증가하는 추세이기 때문이다. 개별 은행들로선 합리적인 선택이어도 금융권 전체로 보면 위기를 자초하는 '구성의 오류'가 발생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18일 금융권에 따르면 최근 금융당국의 여신심사 가이드라인 적용에도 불구하고 은행권의 대출 잔액은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한국은행이 지난 13일 발표한 '2016년 6월 중 금융시장 동향'을 보면 지난달 말 기준 은행권의 가계대출 잔액은 667조 5000억 원에 달했다(주택금융공사 모기지론 양도 포함).
이는 전월보다 6조 6000억 원 증가한 액수인 동시에 예년 대비 2배 이상 높은 증가세다. 은행의 주택담보대출을 억제하기 위해 금융당국은 지난 2월 수도권에 여신심사 가이드라인을 도입하고 5월에 전국으로 확대했지만 가계부채의 급증세를 막는 데에는 역부족이었다.
근본적인 원인은 저금리 때문이다. 한국은행이 정하는 기준금리가 역사상 가장 낮은 초저금리 상태로 장기간 지속되다 보니 여신 이자도 함께 낮아져 보다 쉽게 대출에 목을 맬수 밖에 없다.
현재 가계부채 액수는 1220조원을 넘어선 상태다. 올 한 해 국가예산이 386조7000억 원이었음을 감안하면 3년치 국가 예산을 전부 퍼부어도 메울 수 없을 만큼 큰 금액이다.
금리가 더 내려갈 경우 가계부채 문제가 폭발할 수도 있다는 지적이 나왔지만 한은은 지난달 기준금리를 연 1.25%로 또 다시 내렸다. 금통위 이후 개최된 브리핑에서 이주열 총재는 "은행에 여신심사 기능 노력이 좀 더 본격화 되고 하반기 중에는 비은행권에 대해서도 가계대출을 관리하는 노력이 강화될 것으로 보인다"면서 "큰 폭의 증가세는 둔화될 것으로 보인다"고 발언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전망은 기준금리 인하 후 한 달이 지나지 않은 시점부터 어긋나기 시작했다. 수도권을 중심으로 여신심사 가이드라인이 도입된 이후 대출심사가 까다로워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가계부채는 늘고 있는 추세다.
안 그래도 낮았던 금리가 더 내려가면서 은행들의 수익성은 악화일로로 치닫을수 밖에 없다. 은행 수익의 대부분을 순이자마진(NIM)이 설명하는 상황에서 초저금리는 이자수익의 하락, 나아가 은행권 전체의 수익성 악화를 의미할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니 은행들은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영업실적을 높이려 하고, 대출을 늘려 가계부채 부담이 더욱 커지는 악순환이 발생하고 있다.
이와 같은 상황은 작년 한 해 은행원 1인당 신규 대출판매 실적을 봐도 알 수 있다. 최근 연합뉴스를 비롯한 복수 매체들은 작년 은행원 1인당 신규 대출판매 실적이 연간 10억 원을 돌파했다는 내용을 보도했다. 1인당 대출실적이 연간 기준으로 10억 원을 돌파한 건 지난 2003년 이래로 약 12년 만이다. 금리가 낮은 만큼 대출의 '양'을 늘리는 방향으로 은행들의 전략이 이행했음을 알 수 있다.
실적 압박을 받는 은행원들의 스트레스는 날로 가중되고 있다. A씨와 똑같은 스트레스를 호소하는 행원들은 모든 은행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최근에는 대출이나 멤버십 가입에 더해 ISA(개인종합자산관리계좌) 실적압박까지 더해져 이들은 그 어느 때보다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다.
금융권 전체가 위기에 빠진 상황에서 대출실적을 늘리는 방향으로 전략을 짜는 건 개별 은행 입장에서는 '합리적 전략'이다. 그러나 모든 은행들이 이와 같은 전략을 취하게 되자 국가경제가 가계부채 위험에 직면하게 되는 '비합리적 상황'이 도출됐다. 경제학에서 말하는 '구성의 오류(The Fallacy of Composition)'가 현실로 다가온 것이다.
오정근 건국대학교 특임교수는 "금융회사들이 고위험 대출에 대해 사전적인 워크아웃이나 채무재조정을 통한 금융부실 감소에 나서야 한다"면서 "고위험 부채를 안고 있는 가계의 채무상환 부담도 줄일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미디어펜=이원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