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이번 판의 숨겨진 성격과 구조가 드러났다. 최순실 게이트를 통해 골수 좌익들이 무얼 원하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계기인데, 차제에 광화문 촛불시위를 '아름다운 명예혁명'으로 착각하는 순진한 시민세력의 각성도 내다볼 수 있게 됐다.
좌익의 숨은 몸통으로 지목돼온 영문학자 백낙청(78)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서울대 명예교수인 그는 지난 16일 페북에 올린 글을 통해 야3당의 현실정치에 개입하는 '훈수 정치'를 개시했다. "담대한 제안"이라며 제시한 글은 야당이 거부했던 국회 추천 총리 카드를 다시 받으라는 것, 이후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과 특검을 거세게 밀어붙이라는 압박이다.
최순실 게이트를 "대전환의 시작"으로 삼으라는 선동으로 끝나는 백낙청 글의 마무리는 이렇다. "박근혜 퇴진은 사회가 오랫동안 갈망해온 대전환의 시작에 불과하다. 100만 인의 촛불은 이미 4월 혁명과도 다르고 6월 항쟁과도 다른 새로운 방식과 풍성한 집단적 지혜를 보여주었다."
원탁회의 좌장 백낙청의 '훈수정치'
백낙청의 위력은 실로 컸다. 그가 페북에 글을 올린 단 며칠 새 국회 추천 총리 안이 대세로 등장했다. 바로 이튿날 한겨레가 백낙청의 훈수를 대문짝만하게 기사화한데 이어 음험한 정치인인 국민의당 비대위원장 박지원이 빠르게 움직였다.
이런 흐름 자체가 왜 백낙청이 좌익의 몸통이고, 야당이란 저들의 2중대인가를 보여주는 대목인데, 박지원은 17일 야 3당 대표 회동 자리에서 민주당 대표 추미애, 정의당 대표 심상정에게 국회 추천 총리를 의제로 일단 꺼냈다. 그러더니 주말을 전후해 급물살을 타기에 이르렀다.
야권 대선주자와 지도부 등이 20일 비상시국 정치회의를 열며 결의한 8개 항 합의문에 국회 주도 총리 선출안이 포함된 것이다. 이날 회동에는 문재인, 안철수, 박원순, 안희정, 김부겸, 이재명, 천정배, 심상정 등이 참석했는데, 백낙청이 내민 카드를 야권 전체가 수용한 모양새다. 타이밍도 절묘했다.
검찰의 중간수사 결과 발표(20일)와 함께 헌정사상 첫 피의자 대통령이 만들어지자 이해관계를 함께 하는 저들은 대통령 탄핵과 국회 추천 총리안을 병행하자는 안에 합의 본 것이다. 저들의 속내는 이렇다. 탄핵안이 국회에서 가결되면 황 총리가 대통령 권한대행을 하게 되는데, 통진당 해산을 주도한 그가 야당 입장에선 여간 껄끄럽지 않다.
백낙청이 페북에서 했던 말대로 "호위무사로 복무해온 인사가 권한대행 자리를 차지한다는 건 말이 안된다."는 인식이다. 물론 이 문제는 아직 완결된 건 아니다. 누구를 앉힐까를 둘러싸고 야3당끼리 합의를 이룰까가 관건이고, 이 추천안을 박 대통령이 과연 받아들일까도 별개의 문제로 남아있다.
어쨌거나 중요한 건 백낙청이란 위인인데, 다시 묻자. 왜 그의 한 마디가 이렇게 위력적일까? 그래서 현실정치까지 척척 움직이는 것일까? 중요한 건 그는 2012년 총선과 대선을 앞둔 상황에서 일찌감치 '희망 2013·승리 2012 원탁회의'를 주도하며 야권 연대와 후보단일화를 이뤄냈던 핵심이다. 그만큼 이 땅의 좌익세력과 야당은 한 몸으로 돌아간다.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 지난 16일 페북에 올린 글을 통해 야3당의 현실정치에 개입하는 '훈수 정치'를 개시했다. "담대한 제안"이라며 제시한 글은 야당이 거부했던 국회 추천 총리 카드를 다시 받으라는 것, 이후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과 특검을 거세게 밀어붙이라는 압박이다. 최순실 게이트를 통해 골수 좌익들이 무얼 원하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계기다. /사진=연합뉴스
민중혁명 물씬한 체제변혁이란 말
물론 편차는 있다. 야당이 자신의 당선과 정권교체만을 노린다면, 백낙청은 체제변혁을 노린다. 민중혁명 혹은 좌익혁명의 냄새가 물씬한 체제변혁이란 용어는 물론 그의 말이다. 그가 쓴 단행본 <2013년 체제 만들기>(2012년)에는 백낙청 식의 음험하고 위험천만한 꿈이 이렇게 설명돼있다.
즉 체제란 영어의 시스템(system)보다 레짐(regime)을 뜻하며, "집권 이듬해인 2013년 이후의 세상 또한 별개의 체제라 일컬을 정도로 또 한 번 크게 바꿔 보자는 것"이다. 이게 무슨 뜻일까? 필자는 백낙청 식의 체제변혁을 구 통진당의 이석기의 진보적 민주주의보다 급진적이라고 분석한다. 물론 87년 민주화 체제를 훌쩍 건너뛴다.
87년 체제가 절차적 민주주의라면, 백낙청이 언급하는 새로운 체제란 그 이상이다. 그가 항용하는 말대로 '분단체제의 해체'도 포함된다. 그걸 그는 "한반도 재통합 과정을 안정적으로 관리할 국가연합"이라고 표현한 바도 있다.
그건 민주당이 총선 공약집에서 명문화한 남북연방제 통일 추진안과 닮은꼴이다. 물론 대한민국 헌법 제4조가 명문화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 따위란 진보적 민주주의자인 백낙청의 머리엔 자취도 없다. 그래서 백낙청으로 대표되는 이 땅 좌익들의 뇌 구조를 재확인할 좋은 기회가 지금인데, 그가 등장한 타이밍도 음미해볼만하다.
백낙청은 5년 전 야권연대 때 등장했다. 이후 세월호 때도 다시 모습을 보이며 특별법 재협상에 영향을 미쳤는데, 이번 2년 반 만의 재등장은 광화문 총궐기를 백낙청 식 혁명 전야 혹은 혁명의 만조기(滿朝期)로 본다는 뜻이다. 그래서 위험천만하다.
지난 번 글에서 나는 반복해서 밝혔다. 이번 촛불집회가 자칫 자발적 좌익혁명의 큰 깃발을 올리는 국가적 재앙으로 연결될 것이 두렵다고…. 과잉 민주주의의 부작용이 종북좌익혁명, 민중혁명으로 번지는 최악의 시나리오다. 대한민국이 촛불집회에 휩쓸려가면서 국가정체성을 내주며 결국 자멸하는 그림이다. 그래서 지금 상황은 건국 이후 최대의 도전이다.
그런 건 오불관언인 채 외려 '분단체제 종식'이라고 환영할 위인이 백낙청인데, 그래서 그가 새삼 무섭다. 그는 지난 반세기 좌편향된 대한민국 지식권력을 쥐락펴락해온 그야말로 범야권 재야의 좌장(座長)이다. 평양의 지령과 함께 움직인다는 관측도 있지만, 그건 검증이 어렵다.
명예혁명인가, 과연 민중혁명인가?
여하한의 검증을 받지 않았으면서도 학계-시민단체를 포함해 전방위에서 지적 도덕적 권위를 행세하기도 한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래서 백낙청이야말로 좌익의 숨은 신(神)이라고 해야 한다. 그런 백낙청이 현실정치에 직접 개입한 것은 최근 15년 내외다. 김대중-김정일이 만든 2000년 6‧15 선언 전후가 타이밍이었다.
이른바 중도주의적 변혁론을 들고 나와 좌파 통일운동을 선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게 좌우합작론의 변용에 불과했지만, 아무도 비판을 하지 않았다. 놀랍게도 그에 대한 학계 내부의 비판은 전무했다. 온유해 보이는 외모와 달리 일관된 반미 운동을 벌여도 모두가 그를 따랐다. 2004년 초에는 시인 고은 등과 함께 '국가보안법을 폐지시켜주십시오'라는 성명서를 내기도 했으니 그의 반미는 일관된 소신이다.
1970년대 이후 이 땅 젊은이들 상당수가 극단적인 체제 부정, 자본주의 혐오 성향을 품어왔는데, 원인제공을 한 것도 백낙청이다. 1960년대 이후 계간 <창작과비평>을 발행하면서 인문사회과학을 포함한 이 땅의 지식정보를 몽땅 오염시킨 장본인이 바로 그이다.
세상이 알 듯 그는 원조 금수저이고, 결코 좌익일 수 없는 사람이다. 고향이 평남 정주이고, 변호사였던 아버지 백붕제는 6.25 때 납북됐다. 1955년 경기고 재학 중 미 유학을 떠나 브라운대를 거쳐 하버드대에서 학위를 받았다. 정말 아이러니다. 1962년 이후 서울대 영문과 교수로 활동해온 그가 좌익의 빅브러더로 꼽힌다는 것 자체가 체제수호 세력이 없는 한국사회의 비극이다.
더 유감인 건 이 땅의 시민들이다. 광화문 촛불시위를 '즐거운 명예혁명'으로 착각하고 있는 순진한 시민세력, 그걸 선동하는 언론들이 좌익의 몸통 백낙청 등장에 한 차례 정치적 각성을 이룰까? 그 반대일 수도 있다. 어쩌면 '우리도 백낙청처럼!'을 외치며 더욱 더 이념적 경도(傾倒)를 할 수도 있는 게 아직도 정신 못 차리는 한국사회다. /조우석 주필
[조우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