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동 나라정책연구원장은 20일 한반도 통일은 헌법에 규정된 대로 자유민주적 기본가치를 확산시키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와함께 중국에게도 한반도 통일이 중국에도 유익하다는 점을 설득하는 외교적 노력이 중요하다고 했다.
▲ 김광동 나라정책연구원장
김원장은 이날 자유민주연구학회가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개최한 <비정상의 정상화,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세미나에서 '통일국가의 질서와 체제로 본 대북정책 방향'이란 주제발표를 했다. 다음은 김원장의 발표문 전문이다.
문제의식
통일에 대한 국민 기대나 박근혜정부의 의지는 높다. 박근혜정부는 4대 국정과제로 통일기반 구축을 설정했고 ‘통일대박’론 설파와 함께 ‘통일시대준비위원회’ 구성 계획도 밝혔다. 통일된 국가로서의 대한민국 위상과 미래비전에 대한 논의는 지금까지도 많았다. 그렇지만 논의들 간 차이의 핵심은 어떻게(How) 그것을 만들어내느냐의 문제다. 감나무의 감 떨어지기를 기다리며 떨어졌으면 좋겠다라는 차원을 넘어 감을 따기 위해 어떤 사다리를 만들어 어떻게 올라가 따낼 것이냐에 국가의 합의와 역량이 보다 집중되어야 한다. 통일체제를 만드는 과정에 대한 합의와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과제설정 및 일관된 실천이 동반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또 다른 허상을 만드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다시 공허함으로 빠져들 수 있다.
예를 들어 한국의 모든 정부마다 북한 핵문제 해결을 내걸었지만 지난 20여년 넘게 핵문제는 한 치도 해결의 방향으로 가지 못했다. 해결은커녕 북한은 핵무기실험을 3차례나 감행하고 대륙간 탄도미사일 실험을 성공시켜나가며 보란 듯이 한국을 협박하며 그들의 길을 걷고 있다. 2010년 천안함이 격침되며 46명의 장병이 희생당하는 상황에 직면했으면서도 서해에서 예정했던 한-미 합동군사훈련조차 중국 반대로 취소하는 굴욕을 감수한 바도 있다.
또 연평도에 대한 무차별 포격을 당하고도 적절한 대응조치조차 제대로 감행하지 못했고, 불과 며칠 전에는 북한 경비정이 NLL을 4Km나 넘어와 휘졌고 있었음에도 나포 예인하지 못하고 경고방송만 틀어대며 돌려보낸 것이 현실이다. 당면의 조치도 취하지 못하면서 미래의 통일 비전만 열거하는 것은 국민 혼란과 착각만을 가중시킬 수 있다.
더구나 북한의 후견자 역할을 담당하는 중국은 미국과 세계질서를 만드는 G2체제가 되었다며 ‘신형 대국관계’를 설정해 놓고 있다. 스스로 글로벌 질서창출국으로 자리매김한 중국은 미국을 대상으로 세계질서를 함께 창출하며 핵심 국익을 상호 보장하자는 것이다. 그런 차원의 첫 시도 중 하나가 일본이 실효 지배하고 있는 센카쿠(디아오위다오)에 대한 영유권 주장과 남중국해 방공식별구역의 확장이다. 특히 중국은 수도 베이징의 코앞에 있는 북한지역이야말로 중국의 핵심이익에 해당함을 여러 차례 공언하며 포기할 수 없는 자기영역권임을 밝혀온 바 있다.
그에 따라 북한의 3대 70년에 걸친 개인숭배적 전체주의 독재인 ‘최고 존엄’에 의한 세습체제를 지지하고 엄호하며 당분간은 북한 공산체제의 붕괴는 말할 것도 없이 대한민국에 의한 자유민주적 통일도 용납할 것으로 보여지지 않는 현실이다.
따라서 우리의 통일논의와 정책은, 한편으론 일본과 미국에 대항하는 중국 헤게모니의 확장을 목도하고, 다른 한편으론 동의하든, 무시하든 북한이 중국의 핵심 이익지역이라는 중국의 안보외교정책을 감안하며 어떤 과정(process)을 통해 통일기반 구축방향에 맞는 대북 및 안보외교정책을 구사할 것인가에 집중되어야 한다. 중국이 강조하는 레드라인(red-line)을 넘어서거나 변화시키는 방안에 통일로 가는 입구가 있는 것이다. 중국 왕이(王毅) 외교부장은 3월 8일 전국인민대표대회의 기자회견에서 한반도 평화와 안정을 위한 중국의 4원칙을 발표했고 그 중 하나로 레드라인이 있음을 밝혔다. 한반도문제에 대한 레드라인이란 “중국의 문 앞에서 전쟁이나 혼란이 일어나는 것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혀 한반도에서의 전쟁이나 북한 체제붕괴에 따른 상황 전개를 용납할 수 없음을 확인한 바 있다.
특히 중국의 주권을 대변하는 정치권력으로서의 중국 공산당이 권력 지배를 당분간 포기하지 않을 것이고 북한의 공산체제 붕괴도 용납할 것으로 보여지지 않는 상황에서 항구적 평화체제 정착과 통일 기반 구축을 위해서도 박근혜정부의 당면 목표는 어떻게(How)에 집중되어야 한다. 주어진 상황에서 현실 가능한 방법을 찾고 그 방향에 맞춰 일관된 대북 및 통일정책을 펼치는 것이 바로 박근혜정부의 과제이기 때문이다. 그런 차원에서 본 글은 동북아 국제질서의 본질을 규명하고 그 질서의 돌파구를 모색하는 차원에서 대북정책 및 동북아 안보질서를 재구성해가며 대한민국 주도의 통일질서를 만들어 갈 방향을 찾는데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1894년과 1945년 및 1953년 질서의 성격
새로운 질서인 통일된 한반도질서를 강구해본다면 한반도의 국제질서의 역사와 현재 질서에 대한 이해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120년 전인 갑오년, 1894년에 한반도에서 펼쳐진 청-일(淸-日)전쟁으로부터 오늘 2014년의 동아시아 및 한반도질서의 형성 과정을 재조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 상대적 약소국의 위치에 있는 나라가 통일이라는 과제를 실현한다는 것은 관련 강대국의 동의 형성과 협조와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고 향후 우리가 펼쳐갈 미래도 미국, 중국 및 일본을 포함한 주변 강대국의 미래질서와도 절대적으로 연관되었기 때문이다.
1894년까지 명-청으로 이어진 한반도 조선에 대한 5백년 중국 주도 질서는 일체의 흔들림이 없었다. 조선은 사대(事大)와 조공(朝貢) 혹은 각종 책봉(冊封)이라는 형식적 국가관계를 넘어 중국을 세계의 중심이자 전부로 이해하고, 중국을 통해 세계와 만나는 국제질서에 편입되어 있어야 했다. 그랬던 청은 영국과 프랑스 등 서구 국가들과 난진조약(1840), 톈진조약((1842), 베이징조약(1960)을 거치며 더 이상 그 질서를 지킬 힘이 사라져갔다. 그 과정에서 조선의 흥선대원군은 척화비로 상징되듯 ‘주화매국(主和賣國)’을 외치며 쇄국을 더 단단히 하고자 했다. 하지만 체제를 만들고 주도했던 청이 무너지는 상황에서의 쇄국이란 아무런 의미를 가질 수 없었다. 최익현을 포함한 조선의 선비들도 척왜양이(斥倭洋夷)를 말했지만 그 대안은 항상 청조(淸朝)중심 질서의 복원과 조선왕조(王朝)의 옹립이었지 근대적 자주독립국이거나 문명사회를 염두에 둔 것은 결코 아니었다.
한반도에 대한 지배력을 상실해가던 중국은 청-조수호조약을 통해 조선이 속방(屬邦)으로 새삼 확인하며 서양 및 일본으로부터 조선은 청의 속국임을 인정 보장하라고 요구했지만 그것은 잃어가는 힘을 확인한 것에 불과했다. 임오군란을 계기로 위안스카이(袁世凱)를 조선에 보내 용산에 군을 주둔시켜 13년간 조선을 간섭 통치하고, 또한 당대 조선의 최고 권력자이자 국왕 고종의 부(父)였던 흥선대원군을 중국으로 납치하여 3년간 톈진부근에 억류시키며 확고한 지배력을 행사하고 군림하고 있음을 과시했지만 종말로 치닫는 상황을 막지는 못했다.
조선에 대한 절대 지배력을 행사했던 중국을 대상으로 한 일본의 청-일전쟁(1894) 결과는 조선에 대한 청의 지배력을 일거에 배제시키고 일본 주도적 동아시아질서를 만들기 시작했던 절대적 사건이었다. 이미 근대체제를 이루고 앞서 가 있던 일본은 시베리아 및 연해주로 확장일로에 있던 러시아와 경쟁하고 있었지만 그 각축은 10년 뒤의 일본의 러-일전쟁으로 종결되며 일본주도적 동아시아질서로의 대전환이 완성되었다. 그 후 일본은 조선은 물론 대만, 만주, 중국점령과 동남아시아 및 태평양으로 그 지배력을 확장하였다.
1894년 질서는 1941-5년에 펼쳐진 제2차 세계대전, 혹은 미-일간의 태평양전쟁으로 50년 만에 전혀 다른 체제가 성립하였다. 1945년의 동아시아 및 한반도 질서란 미국의 일본 군군주의체제를 패망시켰다는 것이 가장 커다란 질서변화를 만든 축이자 힘이었다. 그 과정은 카이로회담(1943), 얄타회담(1945) 및 포츠담회담(1948)이라는 국제질서의 연장선에 있는 것이다.
1945년 질서의 가장 큰 특징의 첫째는 미국이 일본 및 한반도를 비롯한 동아시아에 주도적 질서를 만들어내는 국가로 등장하였다는 사실이고, 둘째는 소련(러시아)이 연합국의 일원이 되게 되면서 동아시아에 공산주의 혁명을 확장시키며 중국과 한반도에 밀려들어왔다는 사실이다. 결국 일본 지배질서가 붕괴되면서 그 공백에 미국과 소련이 공존하게 되었고 그 힘이 중국의 공산화(1949)와 함께 한반도에는 분단과 북부지역에 공산 전체주의체제를 만들었던 것이다.
공산주의 확장의 연장선에서 소련-중국-조선(북한)은 한 축을 이루며 1950-3년의 6.25 침략전쟁 등을 통해 공산체제의 확장을 기도하였지만 미국과 자유진영에 의해 좌절되었다. 일본과의 태평양전쟁 결과인 미국 주도적 질서 하에 만들어진 한반도 남부에 대한 침해는 물론 자유민주체제의 추가적 후퇴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미국과 자유진영의 힘으로 3년간의 참혹했던 대전쟁에도 불구하고 1945년 질서는 현상 유지될 수 있었다. 특히 6.25 전쟁과정에서 보여진 중대 사실은 중국의 등장이었다. 전쟁 중인 1950년 10월 1일 기점으로 공산체제에 대한 롤백(Roll-back) 및 자유민주질서의 확장을 의미했던 북진(北進)이 중국의 대규모 참전과 함께 좌절되었다는 것이고 다시 1945년 질서로 복귀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질서로 만들어진 1945년 및 1953년 질서는 크게 보면 같은 것이지만 가장 큰 변화는 소련(러시아)대신 중국이 한반도에서의 질서주도 국가로 복귀했다는 것이다. 또 다른 질서체제의 의미로 본다면 중국 참전에 의한 3년간의 전쟁수행과 38도선 주변의 대치국면의 유지는 절대적 지배력이었던 중국 주도의 1894년 이전 질서가 한반도 절반까지로 재구축된 것이기도 하다.
1953년 정전질서의 성격을 보여주는 상징적 문서가 바로 정전협정(停戰協定)이다. 당시 중국의 참전은 중국공산당 정부를 유지하고 한반도가 자유민주질서가 됨으로 해서 발생할 수 있는 공산주의체제의 안정을 확고히 하겠다는 차원이었다. 그것으로 소련주도적 한반도 북부질서가 중국주도로 변화하였고 일본에게 빼앗겼던 지배질서의 절반을 한국전쟁 3년 수행을 통해 복귀시킨 것이기도 하다. 결국 한반도 정전체제란 미국을 대표한 유엔군 사령관 클라크(Mark W. Clark)와 중국군 사령관 펑더화이(彭德懷)가 주도했고 그들의 서명으로 정전체제를 유지하는 실질적 힘과 질서로 상징된다.
상징성으로 보면 북한에서의 중공군 사령관 팽덕회는 1592년 조선에서의 이여송(李汝松)으로 비견된다. 결국 중국은 청-일전쟁에서의 참혹한 패배로 한반도 전체에 대한 지배질서를 잃은 지 60년만에 한반도 절반인 북부지역에서 지배질서의 재확장을 만들어냈다. 중국에게 북한이란 ‘항미(抗美)인민지원군’ 약 20만명의 사망희생을 포함하여 약 50만명이 넘는 중부상자 희생을 투여하여 만든 체제다. 러시아가 제2차대전 끝에 형식적으로 참여하고 획득한 북한에 대한 지배력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중요한 것은 중국은 미국에 대항하여 한국(6.25)전쟁을 수행하며 전후질서를 만들었고 미국과 함께 1953년 한반도 정전협정의 당사국이라는 엄연한 사실이다. 지리적으로나 질서의 축으로나 한반도 질서를 만드는 핵심당사자적 위치로서의 중국을 배제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 후 한반도 북부에 대한 중국의 지배질서는 1972년 중국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으로 복귀하며 국제질서적으로도 확고한 위치를 획득했고, 다시 1991년 소련의 해체와 공산주의체제의 붕괴로 유일무이한 위상을 갖게 된다. 마지막으론 1978년 이후 등소평주도의 개혁개방과 시장경제의 지향에 따른 경제력 강화와 군사력 확대로 흔들리지 않을 헤게모니를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연속선에서 중국은 북한 핵문제를 중국 주도의 6자회담으로 끌고 갈 수 있었고 북한에 안보나 경제는 물론 북한지도부의 계속과 안정에서도 절대적 역할을 하고 있다. 나아가 한반도와 관련된 안보질서와 관련해서 중국은 정전협정에 따른 중립국 감독체제의 변화나 주한미군의 역할 제한과 축소를 견인해내는 결정적 힘을 발휘하고 있다.
현 2014년 질서구조의 성격
1953년 질서에는 근본적 변화가 있었다. 첫째는 체제로서의 공산주의라는 것은 폐기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고, 둘째는 한반도 정전협정(1953) 질서가 유지되는 연장선에서 2014년 현재 질서는 중국 지배력의 확대 강화와 한국 국력의 성장과 위상 강화라는 변화가 있었다. 한국이 만든 지난 60년의 결과가 자유민주질서의 확립과 경제산업적 번영모델을 축으로 북으로 확장되고 있다. 마찬가지로 북한은 한반도질서에 한 축으로서의 역할이 거의 없어졌지만 공산체제와 폐쇄질서를 넘어선 중국은 지난 40여년의 성공 결과로 점차 그 힘을 외부로 확대하고 있다.
따라서 한국이 대북 및 통일정책을 현실화하고 자유민주 통일을 실질화하기 위한 방안이란 현 2014년의 질서의 구조와 성격을 기반으로 통일 지향 조성의 돌파구를 찾는 것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그것은 중국의 위상 변화와 한반도정책 및 평화체제 전략을 중심으로 하며 북한의 핵전략 및 ‘최고 존엄’적 독재에 대한 지원으로 나타나고 있는 한반도질서에 대한 변화를 모색하는 것이 필수불가결함을 의미한다.
첫째, 제3세계를 묶으려했던 중국은 결국 정치안보적으론 미국과 수교(1972)를 기점으로 유엔에서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으로 복귀하며 세계무대로 나오기 시작했고, 경제적으로 1978년 등소평체제에서 국제무대에 진출하였다. 개혁개방(‘78)이후 14년이 지난 1992년 한-중 수교 시점을 기준으로 한다면 한국과 중국의 국력은 커다란 차이가 없는 불과 1.3배 수준이었지만 그로부터 다시 21년이 지난 2013년 기준으로 중국의 경제적 국력은 세계 13위라는 한국의 7배에 달하는 수준에 이르고 있다.
인구는 한국의 27배고 현재 중국의 최대수입국은 한국이기도 하다. 산업연구원과 무역협회에 따르면 중국 수입시장에서 한국의 점유율은 2012년 9.17%에서 2013년 9.24%로 확대되며 일본에 이어 2위위 수입국의 위치에서 1위로 올라섰다. 한국은 중국의 제1위 수입국이자, 제1위 수출국이다. 서울신문, 2014년 3월 3일자
중국은 2011년을 기점으로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인 일본의 경제규모를 넘어섰고 미국까지 넘어서며 세계 1위의 무역대국에 가있다. 경제력 확대에 따른 군사력증강도 지난 20년간 세계에서 가장 높은 국방비 증가율을 보인 나라도 중국이다. 더구나 공산당중심의 계획경제적 기반을 가진 중국은 물자와 자원에 대한 통제수준이 다른 국가와 다를 수밖에 없어 국가 통제수준까지 고려할 때 중국의 통제력의 더 높다고 할 수 있다.
둘째, 대한민국에 대한 중국의 입장은 여전히 정경분리에 가깝다. 경제관계를 긴밀히 하면서도 안보와 군사부문에 관한 한 철저히 중국공산당의 기본입장이 관철된다. 그 예는 한반도에서의 미군 주둔문제와 관련해 2008년 이명박 방문시 중국이 보인 태도에서 명확하게 나타난다. 중국외교부는 “한-미군사동맹은 지나간 역사의 산물”이라고 명시적으로 한-미동맹을 부정하였으며 “냉전시대의 군사동맹으로는 역내에 닥친 안보문제를 처리할 수 없다”며 군사동맹 폐기를 요구하였다. 이명박-후진타오, 한-중 정상회담 직전 ‘한미 군사 동맹 강화가 동북아 정세에 미칠 영향’에 대한 기자들의 질문에 친강(秦剛)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한미 군사동맹은 지나간 역사의 산물”이라며 “냉전시대의 소위 군사동맹으로 역내에 닥친 안보문제를 생각하고 다루고 처리할 수 없다”고 밝혔다. 연합뉴스, 2008년 5월 28일자 보도.
심지어 2010년 천안함 격침에 따른 대응조치에서도 중국은 서해에 미국의 항공모함 워싱턴호가 들어와 한-미군사훈련하는 것을 저지 관철시켰다. 한국이 서해에서 다시 항공모함이 참가하는 군사훈련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연평도에 대한 무차별 폭격을 당하고 나서다. 그 때도 똑같이 중국의 반대가 있었지만 연이은 북한 공격에 대한 대응차원이란 논리와 미국의 합동훈련 강행 의지로 극복할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중국은 북한 핵문제를 통제수준이 낮은 국가의 대량살상무기(WMD) 문제가 아닌 한반도 평화협정과 연계해서 해결될 문제로 보는데서 한 치의 변화도 없다. 박근혜대통령을 만난 시진핑주석은 ‘한반도 비핵화’와 ‘한반도 평화체제’를 말함으로써 핵문제나 평화체제를 바라보는 시각에서 커다란 간격이 있음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주었다. 결국 북한의 핵무기 폐기문제는 동북아 안보 및 한반도 평화체제라는 차원에서 해결할 문제이지 ‘북한 핵무기’문제로만으로는 접근하지 않겠다는 입장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 이는 중국이 주한미군(駐韓美軍)의 문제와 북한 핵무기문제로 모두 일괄타결하기 전까지는 개별 접근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이를 확인한 이상 한국의 대북 및 안보정책도 그 선상에서 출발하는 것이 맞다.
셋째, 북한체제와 지배권력에 대한 문제는 북한의 핵무기 전략의 유효성 확인 및 최고존엄체제의 유지라는 차원에서 접근하고 있다는 엄연한 사실이다. 중국이 공개적으로 북한의 핵보유를 승인하고 지지한 적은 없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북한의 핵무기 개발을 좌절시키고 폐기하는데 나선 적도 없다는 사실이다. 그동안 중국은 3차례의 핵무기 실험 등과 관련된 각종 유엔(UN) 결의안에도 불구하고 북한 핵포기보다는 대화와 평화적 해결을 관철시켰다. 결국 북한의 핵무기는 북한의 대남 및 대미전략의 기본수단이지 핵폐기가 기본목표가 아님을 명확히 보여주었다.
다른 차원으론 중국의 안보군사적 영역에 관한 한 모든 것은 평화협정무제로 귀착되어왔고 그 평화협정의 기본내용은 물론 미군철수의 문제였다. 중국은 한반도정책에서 ‘정전협정 종식과 평화협정체제의 구축’이라는 전략목표를 중심에 두고 있고, 그것은 1954년 제네바 한반도 평화회담에서의 기본전략을 나타난 이후 지금까지 중국과 북한 간에 차이가 있어 본 적이 없다. 중국이 주도한 한반도 비핵화 관련 6자회담에서 2005년 9.19 합의나 2.13 합의는 물론이고 모든 논의에서 ‘평화협정’에 대한 구도를 갖고 출발한다.
물론 평화협정의 기본 내용에는 ‘미군 철수’내지 ‘미군 지위변동 및 철수 일정’을 관철시키는 것이었다. 한반도 질서는 1953년 ‘정전협정’질서가 가장 절대적인 힘으로 작동하지만 그 이후 전개된 변화와 구조적 성격을 감안한다면 안보질서를 규정짓는 중국의 상대적 위상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결국 중국이 자신의 핵심 국익 규정과 그에 따른 정책구사는 한반도 질서와 향후 통일체제를 만드는 과정에서 절대적 변수다.
한반도 질서와 관련하여 북한은 유엔총회 제30차 회의(1975) 결의로 ‘유엔사령부’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입장에 있다. 유엔사령부 해체 결정과 함께 모든 외국 군대(미군)는 철수하도록 되어 있음에도 유엔사령부를 유지하고 주한 미군을 철수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반복 천명하고 있다. 그 이후 북한의 기본정책은 정전협정은 이미 무효이자 폐기된 것이고 현재 발생하는 모든 문제는 평화협정이 체결되지 않은 잠정적 상태에서 미국이 평화협정에 응하고 있지 않음으로써 나타나는 문제라는 것이다. 이와 관련된 김일성 교시는 “체결된지 오랜 낡아빠진 정전협정은 평화협정으로 바꾸어져야 하며 미국 군대는 남조선에서 나가야 합니다” 『김일성저작집』 30권, p.653, 허문영 외, 『한반도 평화체제: 자료와 해제』(서울: 통일연구원, 2007), p. 215. 재인용.
따라서 현재 한반도에서 전개되는 대결구조의 본질은 정전협정 우선 준수와 평화협정 체결 전략으로 집약되어 있다고 볼 수 있고, 여기서 말하는 (a) ‘정접협정 우선 준수’란 실질적 평화조치의 우선적 정착으로서 북한의 대남 군사도발은 물론 핵무기 개발 및 보유와 같은 군사위협 배제인 반면, (b) ‘평화협정 체결’전략에는 정전체제의 폐기와 유엔사령부의 해체 및 주한 미군의 한반도 철수에 집약되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중국-러시아 등이 지원하는 북한의 평화협정 전략이란 한반도에서의 주한미군 철수와 그에 따른 한반도에서의 미국 영향력 배제로 요약된다. 그 ‘평화협정 전략’을 구현하는 차원에서 북한은 정전체제를 일관되게 부정하는 것은 물론, NLL 등의 군사도발을 통한 분쟁지역화이며 체제유지 및 미군철수를 관철시킨 전략으로서의 핵무기개발인 것이고 그것은 중국은 후원하는 것이다.
따라서 평화체제를 둘러싼 대립은 결국 ‘선(先)평화체제 조성’ 대 ‘선(先)평화협정 체결’이다. 그리고 그 대립의 성격은 1953년 정전체제와 달라진 몇 가지 변화가 있음을 고려해야 한다. 첫째는 한국 위상의 확대와 중국 대안체제화라는 것이다. 한국은 더 이상 1894년이나 1945-53년의 한국이 아니다. 비록 주변국의 비교우위로 두드러지게 나타나지 않았을 뿐 실제적으로 세계적 국력과 군사력의 보유국가다. 더구나 한국은 중국인들이 동경하는 대안체제의 대상중 하나다. 둘째는 중국 주도 질서의 확대이지만 그 중국의 질서는 이미 자유민주질서의 내면적 확대가 내포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반드시 중국공산당 및 계획경제의 질서와 그 확대만을 의미해서는 안 된다. 마지막 셋째 사항은 북한의 국력과 국제적 위상이 무의미하게 된 상황이 전개되어왔다는 것이고 그런 북한이란 중국에 대미 및 대한 지렛대와 중국발전과 리더십의 장애로 작동하는 현실이다.
‘평화협정’과 ‘최고존엄’ 구조의 양면적 본질
한국(6.25)전쟁으로도 나타난 것이지만 1945년 분단과 1948년 대한민국 건국 이후 제기된 한반도 질서의 최대 변수이자 대립축은 ‘한반도에서의 미군 철수’와 ‘자유민주체제의 대륙 확산’에 집약되어 있다. 한반도에서의 미군 철수는 곧 1945년 및 1953년 체제질서의 근본적 변화를 의미한다. 미군철수로 상징되는 중국의 영향력 확대는 핵문제 해결과정과 평화체제 관철과정에서 일관되게 대두되어왔다. 중국과 북한의 입장에서는 정전체제 파기와 ‘평화체제’의 수립이라는 방향으로 진전시켜왔다는 것이고 미국과 한국의 입장에서는 평화의 유지와 북한체제의 붕괴에 따른 통일국가의 지향이란 측면에서 바라보는 엄연한 현실이다.
중국과 북한은 정전체제의 무력화라는 기본정책과 ‘항구적 평화체제’ 구축이란 목표를 갖고 대한반도 및 대미정책을 추구해 왔다. 정전체제의 무력화란 a. 유엔사령부의 해체, b. 군사정전위원회 해체, c. NLL 등의 도발을 통한 정전협정 무효화와 분쟁지역화, d. 팀스피리트(TS)훈련 등 한-미 합동군사훈련의 좌절과 축소 등으로 나타나왔다. 특히 ‘평화협정’을 통해 ‘정전협정’을 폐기하고 평화협정의 기본내용을 통해 한반도에 미치는 미국의 영향력을 축출한다는 목표는 일관되게 관철되어 왔다. 그 전략에 따른 평화전략으로 나타난 몇 가지 사례들을 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19조)는 “남과 북은 현 정전상태를 남북사이의 공고한 평화상태로 전환시키기 위하여 적절한 대책을 강구한다”고 합의한 바 있다.
또 김대중대통령은 1999년 CNN회견에서 “현재의 정전체제를 남북간의 평화체제로 바꾸어야 합니다”라고 했고, 2000년 미-북 공동선언(10.12)에서 “정전협정을 공고한 평화보장체계로 바꾸어 한국(조선)전쟁을 공식 종식”시키는 방안을 강구하자고 한 바 있다. 이어 노무현정부가 동의 추진한 2005년 9.19 공동성명 2005년 9.19 공동성명상의 평화체제(peace regime)에 대한 조항은 제4조로 “6자는 동북아시아의 항구적 평화와 안정을 위해 공동 노력할 것을 공약한다. 직접 관련 당사국들은 적절한 별도 포럼에서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체제에 관한 협상을 갖는다”는 것이 미국과 북한(조선)은 관계정상화를 위한 조치를 취해나간다는 것과 함께 들어가 있다.
2007년 2.13 공동성명과 한-미 한반도 평화에 관한 공동선언 노무현대통령과 조지 부시대통령의 경주선언문(11.17)은 “북한 핵문제 해결과정이 한반도에서 공고한 평화체제를 수립하는데 중요한 기초....정전체제로부터 평화체제로 이행하는 것이 한반도에서의 완전한 화해와 평화통일에 기여할 것이라는데 동의하였다...9월 19일 6자회담 공동성명에 따라 평화체제에 관한 협상이 6자회담과는 별도의 장에서 직접 관련 당사자들 간에 개최되어야 하고 6자회담의 진전에 수반될 것이라는데 동의하였으며 평화체제에 관한 협상과 6자회담이 상호 보강하기를 기대하였다”라고 밝혔다.
그에 따라 핵문제는 물론이고 한반도 관련 국제회의와 관련국 정상 간의 논의주제는 ‘핵문제’에서 ‘평화체제’문제로 점점 귀착되고 있다. 그 가장 상징적 사건이 3차례에 걸친 북한의 핵무기실험에 대해 중국이 제재보다는 항상 대화와 평화적 해결에 중심을 두고 있다는 사실이다. 안전보장이사회 결의문의 선박 검색 등 각종 제재사항을 의무로 하기보다는 권고로 만든 것도 중국이다. 중국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의 자매지인 환구시보도 “북한이 핵을 보유한다고 해서 반드시 불안정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고 논평했다.
예를 들면 1994년 미-북 제네바 기본합의에도 불구하고 핵문제의 진전이 없었고 몇 년에 걸친 시행착오와 우여곡절 끝에 중국이 북한 핵문제의 주요 당사자로 나섰고 그것이 북한문제와 관련 6자회담 개최국 지위였다. 중국이 주도한 6자회담의 결과에서도 중국의 의도는 분명 미군의 지위변경과 관련된 평화체제의 구축에 맞춰져 있다. 그렇기에 9.19와 2.13 합의는 일견으론 북한 핵문제 처리를 위한 합의내용이지만 그 배면의 핵심내용은 미국은 북한과 평화체제를 만들어내라는 것이고 미-북간의 평화체제란 곧 미국의 대한반도정책 내지 대한민국과의 특수관계의 종식을 말한다.
중국은 1950년 10월 한국전쟁 중 유엔(UN)결의에 의해 한반도의 민주적 통일국가를 과제를 수행하도록 부여된 유엔 한국관련 기구인 UNCURK(UN Committee on Unification and Rehabilitation of Korea)를 1973년 해체시키는데 주도적 역할을 한 바 있다. 나아가 소련과 함께 1975년 유엔사령부 해체를 시도하고 절반의 성공을 이뤘다. 1975년 제30차 유엔총회에서는 유엔사령부를 해체하고 유엔사령부 산하에 있는 미국을 비롯한 모든 외국 군대를 철수시키라는 총회결의안(3390호 B호)을 관철시켰다. 유엔결의 3390호(XXX) A: "the United Nations Command may be dissolved concurrently with arrangements for maintaining the Armistice Agreement"; B; "Considers that it is necessary to dissolve the 'United Nations Command' and withdraw all the foreign troops stationed in South Korea under the flag of the United Nations".(18 Nov. 1975). 허문영 외, 『한반도 평화체제: 자료와 해제』(서울: 통일연구원, 2007), pp. 76-78.
결과적으로는 유엔사령부 해체가 관철되지는 않았지만 주한 유엔사령부는 정전(停戰)협정관리만 책임지는 것으로 성격 변화가 있었고, 북한의 군사위협에 대한 대응력을 유지하는 기능은 한-미연합사령부(1978)를 만들어 운용하게 된다. 중국은 북한에 대한 절대적 영향력을 발휘하며 한반도에서 유엔 및 미국의 영향력 배제와 한반도 전역에 대한 영향력 확대를 기본전략으로 진전시켜왔고 그 연장선에 유엔총회(제30차) 결의에 의거 유엔사령부 해체와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꿔야 한다는 기본전략이 관철됨에 따라 현재의 한반도질서의 구조적 대립의 기본성격이 되어있다.
북한 핵무기를 활용하는 중국의 전략도 명약관화하다. 상식적 판단으로만 보더라도 중국은 핵독점국의 지위를 포기하고 보편적 핵보유 공존 정책을 견지하지 않는 한 북한 핵보유를 공개적으로 허용할 수 없는 나라다. 중국이 그렇게 강조하는 중국의 레드라인의 안쪽이자 바로 ’문 앞’인 북한에서 핵무기를 만드는 것에 대한 강제적 제재가 없는 현실이다. 더구나 중국의 대북한 영향력은 지구상 존재하는 국가 중 가장 강력할 뿐만 아니라 여타 다른 나라의 총합보다 큰 것이다.
1350km의 국경을 함께 하고 수도(베이징) 주변에 가장 근접하여 존재하는 나라로서 경우에 따라서는 가장 잠재국 위협국가가 될 수 있다. 그렇다면 북한 핵문제는 중국의 핵폐기 의지가 있으면 해결될 문제다. 그럼에도 중국이 해결에 나서지 않는 것은 첫째는 북한 핵이란 중국의 통제 범위 내에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종주국과 종속국 관계에서 종속국의 핵이기 때문에 관리통제가 가능하다는 차원에 있다. 둘째는 북한 핵과 관련된 중국의 전략이란 북한 핵폐기에 기본목표가 있지 않다는 것이다. 최종적으론 북한이 명실상부한 핵보유국가로 가는 것은 용납하지 않겠지만 그 과정에서 성취해야할 목표가 별도로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한반도에서 미군 철수 내지 영향력 축소이다. 달리 말하면 북한 핵문제와 미국의 한반도 영향력 축소배제는 패키지라는 것을 말한다.
결과적으로 중국의 현재 정책에 수정이 없거나 한-미가 주한미군의 지위변동을 모색하지 않는 한 현재의 동북아 및 한반도 질서의 성격상 북한 핵문제는 당분간 해결될 수 없다. 실제 북한의 핵전략은 다음의 외무성 성명에서 가장 명료하게 나타나고 그것은 북한 핵전략에 대한 중국의 동의된 전략이기도 하고 국제회의에서 반복 강조되는 9.19 합의의 기본내용이고 그것은 지난 3월 8일 중국 외교부가 밝힌 ‘한반도 평화 안정을 위한 중국의 4원칙’과도 동일한 것이다.
<조선반도에서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전환하게 되면 핵문제의 발생 근원으로 되고 있는 미국의 대조선 적대시 정책과 핵위협이 없어지는 것으로 되며 그것은 자연히 비핵화 실현에로 이어지게 될 것이다. 결국 평화체제수립은 조선반도의 비핵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도 반드시 거쳐가야 할 로정으로 된다. 조선반도에서 불안정한 정전상태를 공고한 평화체제로 전환하는 것은 곧 조선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과정으로 된다> 조선 외무성 대변인 담화문, 2005년 7월 22일.
마찬가지로 중국과 북한의 공동 대미전선에서의 평화체제 전략과 ‘최고존엄’적 개인숭배체제의 지지는 동일한 전략의 양면이다. 김정일이 북한의 후계자로 확정되는 과정에서 1983년 중국 방문은 김정일의 위상을 확고부동한 위치로 만들었다. 당시 김정일은 중국 최고지도자 덩샤오핑(鄧小平)과 후야오방(胡耀邦)을 비롯한 핵심 지도층을 모두 만나며 김일성에 이은 세습적 차기 최고지도자임을 확인 받았었다. 김일성을 이어 최고지도자가 된 김정일은 그 후에도 2000년, 2001년, 2004년, 2006년 및 2010년 등 연속해서 중국을 방문하여 중국 최고지도자들과 만났다. 특히 2010년은 김정은에 대한 후계작업의 한창 진행 중인 상황이어서 김정일의 중국방문 때 김정은이 동행했느냐를 두고 언론의 관심이 집중되었지만 결국 확인되지는 못했었다.
김정일 사망후 김정은 후계구도에 대한 중국의 지원은 확고했다. 중국은 “대(代)를 이은 우의”를 선언하였고 김정은 후계구도 형성과정에서 공식적으로 “김정은 중심으로 강성대국을 건설”해야 한다고 공언하였다. 조선일보, 2011년 12월 19일자. 로이터와 신화통신을 인용해 보도.
중국은 북한을 중국 영향력의 범위 내에 두는 차원에서 김정은을 지원하는 것이지 그렇지 않다면 김정은 가계를 지원할 이유는 전혀 없다. 주펑(朱鋒) 베이징대 교수는 2010년 10월 5일 ‘중국 관점에서 본 한반도 통일’이란 주제 발표에서 김정일을 이어 김정은이 부상하는 상황에서 “중국의 대북지원 목적은 북한의 붕괴를 피하려는 것”이고 결코 김정은 일가 지키려는 것이 아니라 중국의 국익을 위한 것이라고 한 바도 있다.
중국이 북한의 최고 존엄체제를 중시하는 것은 그 체제가 중국의 국익에 부합하고 북한이 중국 전략을 대리 구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북한이 중국에 절대적 영향력 하에 있다는 것이 구체적 인물의 선임과 권력 유지까지 미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장성택이 2012년 대규모 대표단을 이끌고 중국의 방문하여 시진핑주석 등을 만났지만 2013년 실각 처형당했던 것이나 2010년 이영호 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 겸 참모총장이 평양을 방문했던 궈보슝(郭伯雄) 중국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의 파트너였지만 역시 이영호가 실각을 면치 못했다는 사실 등이 그렇다. 레짐의 유지이지 특정 권력의 유지와는 다른 것이다.
그런 면에서 중국과 북한이 함께 구사하는 핵전략 및 ‘최고 존엄’체제에 의한 ‘평화체제 전략’이란 곧 한반도에서 미국의 군사력 롤 백(Roll-back)과 관련되는 것이자 중국 헤게모니가 1894년 이전질서로 한반도전체로의 확대를 이끌어내는 핵심고리다. 물론 보조전략은 NLL도발이다. 지속적 NLL도발을 통해 한반도가 분쟁지역이며 정전협정체제로는 분쟁이 계속되고 평화를 유지할 수 없다는 차원에서 만드는 전략의 일환일 뿐이다. 핵전략이든 정전협정폐기 전략이든 중국의 영향력 확대라는 전략을 구사하는 과정에서 북한 전체주의독재의 유지는 일관되고 일사불란한 중국의 대한반도 및 대비전략을 구현하기 위한 주요 방안이 되는 것이다.
핵무기 개발과 위협능력의 유지와 전체주의 독재의 유지는 분리될 수 없는 공동 목표인 것이며, 그 과정에서 한반도의 평화와 자유민주적 통일은 진전을 이루지 못하고, 북한의 2천 3백만 ‘인민’은 유린되고 폐쇄와 반문명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상황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장성택 처형에서 보인 ‘백두산 혈통’에 대한 반복된 강조는 김정은이란 개인 최고권력자를 두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지 대체 가능한 대를 이은 ‘최고 존엄’으로 상징되는 전체주의 독재를 구축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가치 및 국제질서 중심의 통일정책
1894년 질서 및 1945-53년 질서의 성격과 그 연장선상에서 현재(2014년) 질서의 구조를 고려한 바탕위에 대한민국이 지향하는 평화와 번영을 동반하는 통일정책이란 다음 몇 가지로 집약되어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가진 힘을 최대한 발휘시키는 방안이고, 중국과 북한이 공동전선을 형성해 구사하는 지배력 확장 전략을 극복하는 방안이기도 하다.
가. 자유․민주․민족 가치의 확립과 확산
1894년 통일국가의 질서를 중심으로 볼 때 한국의 정책방향은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라는 헌법가치가 중심되어야 한다. 그것은 헌법질서이자 통일가치이다. 통일이란 자유민주 가치의 확대다. 자유민주 가치의 정립과 확대 차원의 통일정책이다. ‘남북관계 개선이다’, 혹은 ‘통일이다’라는 가치지향적 개념이 없는 정책보다는 자유와 민주 혹은 번영의 확산이란 가치중심적 대북정책이 불가피하다. 우리 국민부터 통일에 정당성을 확립해야 한다.
지금까지는 ‘민족대단결(1972)’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1989)’ ‘3단계 3기조(1993)’ ‘연방제 및 연합제 통일과 햇볕정책’(2000), ‘항구적 평화체제’(2004) 등으로 논의되면서 통일체제의 가치와 정당성 문제를 피해왔다. 그것은 통일주도세력의 자기 정당성 기반을 만들지 못하고 당위적 통일만을 생각하게 했고 결과적으로 중국이나 북한의 대남전략이 우리 사회에 작동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평화도 당연한 것이지만 더 당연한 한반도 전체와 북한의 주민들도 자유와 민주체제를 지향하고 누리게 만드는 것이라는 명분과 가치의 정립이야말로 현재 우리에게 요구되는 가장 중심적 통일정책에 되어야 한다.
예를 들면 한국도 남북공동성명(1972)에서 “사상과 이념, 제도의 차이를 초월하여 우선 하나의 민족으로서 민족 대단결을 도모하여야 한다”(제1조 제3항)거나 남북기본합의(1992)에서도 “남과 북은 상대방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체제(제도)를 인정하고 존중하다(1조)” 및 “상대방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체제(제도)를 소개하는 자유를 보장한다”(2조)는 식의 합의를 계속해 왔음을 통렬히 반성해야 한다. 연방연합제를 지향하는 6.15선언이나 그 이전의 합의들도 기본적으로 대한민국 및 인류 보편가치에 입각한 통일정책을 확립하지 않았다. 자유민주의 확산을 중심으로 한 통일정책일 때 한반도 전체가 가야할 가치체계를 확립시키는 것이기도 하고 자유민주를 함께 누려야할 우리 민족 절반에 대한 대한민국의 민족해방적 의미와 가치투쟁의 의미가 온전히 살아날 수 있다. 그것이 문명파괴적 상황과 민족유린적 상황에 있는 한반도 북부 및 우리 민족 2천 3백만에 대한 정당한 통일정책이자 인권정책이고 가치투쟁적 정책이다.
특히, 자유민주적 가치의 정립과 확산의 궁극적 최대 목표는 북한 주민 2300만명이 스스로 자유민주질서를 지향하도록 하는데 있다. 중국의 힘을 넘어서고 국제사회와 문명사회로 북한이 나올 수 있는 힘은 북한주민 스스로 창출할 때 가장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한다. 문명과 개방, 그리고 자유와 민주를 지향하는 시민들의 힘을 누구든 꺾을 수는 없고 그 자체적 힘의 근거로 하지 않고서는 자유민주적 체제로 가기도 어렵고 통일 대한민국을 만드는 것도 쉽지 않다. 물론 민족적 가치도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민족에 대한 유린과 문명 파괴가 진행되고 있는 한반도 북부의 우리 민족에 대한 구원과 해방의 개념을 확립하고 공유하지 않는 통일정책이란 허구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그것이 2014년 우리 시대의 민족주의 투쟁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박근혜정부가 자유민주가치 차원에서 펼친 정책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지난 5일 북한이 대북전단 살포를 문제 삼자 청와대는 표현과 집회 및 결사의 자유는 기본권이어서 정부가 제한할 근거가 없다는 것을 명확히 하며 답신한 예도 있다. 이는 작년 개성공단 철수처럼 북한에 끌려 다니지 않으며 정부가 해야 할 방향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한 조치이기도 하다.
통일이나 자주, 화해협력, 공동체, 관개개선 등과 같은 가치지향성이 없는 표현을 넘어서야 한다. 자유민주 가치의 확산에 의해서만 민족해방과 민족번영 그리고 민족통일의 길이 열린다는 것을 명확히 하며 일관성을 유지해야 한다. 물론 자유민주의 확산이란 북한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라 북한의 전체주의체제의 유지와 그 전체주의에 대한 지배적 힘을 활용한 대남 및 대미전략을 유지하는 중국과 러시아에도 적용되는 정책이다. 동북아 전체가 자유민주체제가 성숙하는 방향으로 가는 과정에서 북한의 변화와 한반도통일의 길이 창출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북한체제의 변화란 결국 중국체제의 변화와 연동되는 것이고 자유민주적 가치란 중국과 러시아 등 북한의 후견적 역할을 담당하는 주변국의 정책변화와 동일한 체제성숙에 지향점이기도 하다.
나. 중국의 한반도정책에 대한 재인식과 및 변용 지향
중국은 세계전략으론 G2를 지향하며 기정사실화하지만 그 전략이 한반도와 북한 문제와 관련해서는 확고한 헤게모니 확보와 확대임이 명확하다. 그 힘을 뒷받침하는 것은 경제력과 군사력이고 특히 지난 20여년간 년평균 14% 전후로 상승되어왔던 중국의 국방예산이다. 2001년 70억 달러 규모였던 국방예산은 2014년 1,318달러로 기하급수적 확대를 계속하고 있다.
1894년부터는 일본이란 남동풍의 해일에 휩쓸리는 상황이었다면 2014년 한반도에는 북서풍의 해일에 휘말리는 상황을 앞에 두고 있다. 그 북서풍을 느끼지 못하기에 일본의 군국주의 부활에 대한 보도와 걱정은 많아도 중국에 대한 우려와 대비는 절대적으로 부족하고, 일본과의 군사정보보호협정을 반대하는 것은 물론 북한에 급변사태가 되면 ‘우리(한국)가 접수한다’는 식의 안이한 인식이 확산되어 있다. 그렇기에 통일에 작용하는 중국 변수를 고려한다면 대북정책도 ‘통일’보다는 자유민주의 확대라는 차원의 보편가치 개념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그것은 첫째 누구도 북한 주민의 민주적 의사를 통제할 수 없다는 민족자결에 대한 확신 때문이다. 독일의 통일도 동독 주민의 민주투표에 의해 구성된 의회가 서독과 통일하겠다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것을 억압할 수 있는 힘은 커다란 비용과 절대적 국익의 손상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 사태에서 크림자치공화국 의회가 러시아 군사력에 의한 질서 유지를 결의한 것도 유럽이나 미국의 국제개입을 어렵게 만드는 무시할 수 없는 요인이다.
지금 유럽에서 러시아와 관련된 우크라이나 문제에서 보듯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통제력 상실위기에 있게 되자 바로 크림반도에 군사력을 배치하고 러시아국기를 내걸고 주민투표를 거쳐 합병을 만들어내는 상황도 마찬가지다.
둘째, 한국을 또 다른 측면에서는 중국을 대상으로도 통일정책을 펼치는 것이다. 통일정책도 기본축도 중국의 국익과 중국의 한반도에 대한 인식의 변화에 맞춰져야 한다. 박근혜대통령이 중공군 묘 이장을 제기한 것도 그런 돌파구를 여는 것이라는 점에 의미가 크다. 중국에 대한 적대감이나 혹은 중국에 대한 무력감을 가질 이유도 전혀 없다. 그것은 극복할 대상일 뿐이고 방향과 가치의 입장에서도 절대적으로 유리하기에 낙관적으로 보아야 한다.
중국도 특히 중국 인민들이 보편가치와 사장경제로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DMB와 인터넷과 SNS 혹은 드라마와 해외경제활동과 해외여행과 같은 방식에 따라 가치관과 인식은 벽없이 확산되고 있다. 특히 개방사회가 필연적으로 맞이하는 외국에 대한 투자, 외국 기업과의 거래 및 해외활동과 연수, 유학 등으로 만들어지는 세계관과 가치관의 변화를 중시해야 한다. 기본가치에 대한 인식이 대외인식을 바꾸고 있다. 예를 들면 6.25전쟁에 대한 중국인들의 이해를 바꾸는 것도 공산당이 할 수 있는 영역을 넘어서고 있다. 중국 국민들이 점차 6.25를 잘못된 전쟁에의 참전이었다고 인식하게 되거나 오히려 스탈린(Stalin)의 전략에 말려든 전쟁이라고 보기 시작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인터넷 포털 텅쉰(騰迅)이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전체 응답자의 33%인 4만682명이 “참전하지 말았어야 한다”고 답했는데, 공산당의 선전대로 여론이 형성되는 중국의 현실을 고려하면 이 수치는 높은 수치가 아닐 수 없다. 김정일의 2010년 마지막 방중때는 중국 네티즌들은 김정일이 “중국 정부의 친구일지는 몰라도 북한 인민의 적”이라는 격한 비판들도 많았다. 중앙일보, 4월 6일자.
물론 중국의 대한반도정책 변화는 대한민국이 중국에게 모델적 사회체제를 유지할 때에 그 힘을 발휘하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대한민국의 번영체제가 유지될 때만 가능한 것이다. 한국이 가진 군사력과 군사적 방식으로도 북한 문제에 관여할 수 있다는 의지와 능력을 구비하는 것은 기본적 담보사항이지만 더 궁극적으로 경제력과 번영사회의 유지와 문화적 힘의 견지다. 중국에 한국 드라마인 ‘사랑이 뭐길래’, ‘대장금’ 및 ‘별에서 온 그대’와 같은 문화적 가치가 만들어내는 힘을 고려해야 한다.
중국의 선망대상이 되지 않는 대한민국이란 중국이란 거대 힘에 휩쓸려 들어가게 만들며 한국이란 변수가 한반도 전체에 미칠 영향력을 급격하게 축소하게 만든다. 북한은 중국과 광범위한 국경을 함께하는 나라이자 러시아와도 국경의 마주하는 나라다. 러시아를 포함한 중국의 동의와 협력을 만드는 것은 바로 대한민국이 중국이 지향할 모델적 국가의 위상과 수준을 견지하는 것이고 그것이 중국 개입과 영향력을 차단하고 한반도질서 속에서 통일을 만드는 힘이 되는 것이다. 나아가 근본적으론 통일을 선택할 민주적 결정의 주체인 북한주민도 굳이 한국과의 통일을 선택할 근거가 작아지게 만드는 원인이 된다.
다. 국제질서 및 관련국 협력을 통한 접근
유엔(UN)중심적 혹은 국제사회중심적 접근은 통일정책의 근간이 되어야 한다. 급변사태를 기다리거나 흡수통일이란 정책과 개념은 바람직스럽지 않은 것이다. 특히 급변사태에 따른 흡수통일이란 것은 주어진 상황에 대한 대비일 뿐이지 통일정책이 될 수 없다. 물론 흡수통일이란 북한의 시민에게도 적절하지 않고 중국이나 러시아와 같은 주변국에게도 적절한 개념이 될 수 없다. 급변사태도 감 떨어지길 기다리는 개념이고, 흡수통일도 북한 시민은 통일할 합의가 형성되어 있다는 것을 전제하는 것이다. 상황을 만들고 만들어진 상황을 통일로 연결하겠다는 의지와 정책의 작동이 구체화되지 않고 있다.
실제 독일 통일도 소련체제의 붕괴라는 질서의 변동과 그 질서변화 속에서 동독시민이 자유선거로 서독과 통일을 결의하고 그것은 서독이 받아들인 것이란 점에서 합의통일이지 흡수통일이란 적절한 개념도 아니다. 결과적으로 그런 결과로 귀결된다면 그것을 받아들이면 되는 것이지만 급변내지 붕괴와 그에 따른 흡수라는 것을 정책목표로 설정하며 지향할 것도 당분간은 그렇게 될 가능성도 없다.
한반도 질서는 제2차 세계대전 종전체제이면서도 6.25전쟁으로 다시 만들어지고 규정된 질서다. 한반도의 통일이란 제2차대전 및 한국전쟁 질서의 근본적 변화이면서도, 한반도 국민 7천만 전체의 합의된 결정이고, 또한 6.25 종전질서의 당사자 간의 협력의 산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한반도의 자유민주적 통일은 미국과의 연대와 미국의 힘을 바탕으로 하지 않고는 달성될 수 없는 것은 물론이다.
중국과 함께 북한과 국경을 마주한 러시아나 세계 3위의 경제대국이자 자유민주적 질서를 함께 할 일본의 지원과 협력은 말할 것도 없다. 특히 고려해야 할 것은 통일의 대상이 되는 북한은 중국과 거의 대부분의 국경을 함께 하고 1953년 정전체제의 직접적 당사자라는 사실이다. 정전체제의 당사자이자 무역액 90%는 물론 정치군사적 지원과 전략물자 지원 등에서 북한에 대한 중국의 역할 및 중국의 경제력과 군사력의 확대는 1953년 종전이후 질서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가장 커다란 변수라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그런 측면에서 우리가 지향할 것은 유엔(UN)과 다자중심적 접근이다. 대한민국은 1948년 5월 10일 제헌의회 구성에서부터 12월 12월 유엔 승인에 이르기까지 유엔에 의해 만들어진 나라다. 6.25전쟁과 1953년 정전질서도 유엔군 참전과 유엔 사령관에 의한 정전체제가 유지되고 있다는 측면에서도 유엔중심적 대북접근이 유지되어야 한다. 비록 1972년부터 중국이 유엔에 복귀하고 유엔 주도국 일원으로 참여하며 러시아와 함께 한-미-일 견제라는 차원에서 북한문제를 보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국제기구인 유엔중심적 접근은 포기될 수 없는 것이다.
비록 중국이 주도국이 되었지만 6자회담을 통한 북한문제의 해결이란 수단도 포기될 수 없는 것이다. 한반도와 국경을 함께 하는 러시아에 대한 정책도 필수적임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런 차원에서 만약 북한이 급변사태로 가는 경우에도 한국은 유엔 평화유지군의 일원으로 유엔군 모자를 쓰고 참여하고 주도적 역할을 할 뿐이지 급변사태의 안정과 관리가 곧 통일을 의미한다고 전제해서도 안 된다. 나아가 체제전환 과정 혹은 통일과정에서의 북한지역의 개발도 미-일-중 등 국제사회가 다함께 참여하면서 한국이 주도하는 것이지 한국이 독점적으로 맡아 진행하는 것도 아니다.
결론적으로 항구적 평화체제의 정착과 통일 국가 달성의 기반 구축이라는 박근혜정부의 당면 목표를 구체화시키기 위해선 ‘어떻게’의 문제에 집중해야 한다. 당면 과제를 찾아내고 그 방향에 맞춰 일관된 대북 및 통일정책을 펼치는 것이 바로 박근혜정부의 과제다. 그것은 남북관계 개선이니, 통일이니, 혹은 민족공동체 건설이니 하는 식의 가치중립적 표현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명확히 자유민주체제의 확산이란 구체적 가치지향적 비전으로 담아내 확산시키고 내면화시켜내야 한다.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는 헌법가치이자 통일가치인 것은 물론이고, 통일이란 곧 자유민주적 가치가 한반도 북부로 확대되고 함께 공유하는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특히 한반도 분단과 1950년 10월 북진통일의 좌절은 모두 국제질서의 산물임을 인식해야 한다. 북한에 대한 헤게모니의 구축과 정전협정체제의 주요 당사국은 여전히 중국이기도 하다. 따라서 자유민주 가치의 확대라는 차원에서 통일문제를 볼 때 북한 시민들의 통일지향을 만들어내며 중국을 대상으로 한 우리의 통일정책 방향도 명확해진다. 더구나 그것은 우리 힘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북한 시민의 형성과 주도적 역할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한국의 자유민주 확산과 중국의 개혁개방의 확산이 북한으로 함께 지향하여 북한에서 만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중국의 개방개혁적 자유시장질서가 북한으로까지 확대되는 것이 중국 국익과 동아시아 번영공동체를 만드는데도 필수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현재의 북한이 그대로 유지되는 것은 중국 안보의 불안뿐만 아니라 중국 국익과 국제리더십에도 반한다는 것이 이해되도록 해야 한다.
나아가 러시아와 일본을 비롯한 주변 강대국들도 동아시아의 뇌관이자 공동번영의 장애가 된 북한문제의 해결과 대한민국 주도적 통일이야말로 그들 모두에게 공존번영을 창출시킬 수 있는 핵심 공동과제임을 인식하고 함께 나서게 만드는 통일정책이어야 한다. 그것이 대한민국 주도적 자유민주적 통일국가의 방향이고 우리가 지향해야할 대북 및 통일정책의 근간이다. / 김광동 나라정책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