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일이 있었다. 고등학교 중간고사 때다. 수학시험이 종료된 직후, 항상 그랬듯 아이들은 반 1등에게 우르르 달려갔다. 미리 정답을 맞춰보기 위해서였다. 1등이 골랐다는 답과 일치하는 친구들은 환호를, 다른 답을 선택한 친구들은 좌절하는 풍경이 일상적이었다.
그러던 와중에 1등이 수세에 몰리는 상황이 연출됐다. 한 문제에서 만큼은 1등 혼자서만 다른 답을 택한 것이다. 다들 놀랐다. 그리고 이내 우린 1등이 이 문제에서 만큼은 틀렸다고 확신했고,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때가 있다’며 신이 났다. 그런데 결과는? 반 1등만 맞았다.
이게 바로 민주주의(democracy)의 함정이다. 결코 다수의 선택에 '정답'이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다수의 생각이 그나마 정답에 가까울 것이라는 기대가 있을 뿐이다. 이처럼 민주주의는 결코 완벽하지 않다. ‘개인의 자유와 권리 보장‘이라는 정답에 다가가기 위한 하나의 '수단'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한국 사회에는 민주주의에 대해 이상하리만큼 과도한 맹신이 자리 잡게 되었다.
이미 민주주의가 안정적으로 정착 된지 오래임에도 한쪽에선 끊임없이 민주주의를 내놓으라고 외친다. 모든 사회 현상을 민주주의라는 잣대로 평가한다. 대통령 탄핵 인용도 민주주의의 승리고, 세월호 투쟁도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한 길이다. 통합진보당 해산은 한국의 민주주의가 무려 ’사망‘한 사건으로 평가한다. 경제민주화라는 전 세계 어디에도 없는 용어는 국민의 경제적 자유를 위협하고 있다.
정치구호로 악용되는 한국의 민주주의
여타 선진적 근대국가에선 찾아볼 수 없는 기이한 현상이다. 특정 세력에 의해 '민주주의'라는 단어가 정치 구호화 되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라는 단어를 처음 한반도에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김일성, 박헌영 등의 공산주의자들이다. 그들은 '진보적 민주주의'를 내세웠다. 진보적 민주주의는 사회주의혁명을 용이하게 하기위한 과도적 단계를 의미한다.
그러한 좌익세력의 명맥이 NL 주사파로 이어졌고, 오늘날 그들은 좀 더 세련되게 '진보적' 혹은 '인민' 등의 공산주의자로 의심받을 수 있는 단어는 마음 속에 고이 숨기기로 했다. (정당 강령에 용감하게 진보적 민주주의를 내세운 통합진보당이라는 정당도 있었다. 그러다 해산됐다.)
이들은 일반 국민도 듣기 좋은 민주주의를 외치며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왜곡된 인식을 끊임없이 주입하고 있다. 대한민국이 선택한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이념을 부정하고 싶은 세력들이 대중을 선동하기 위해 내세우는 대표적 정치구호가 '민주주의'가 되어버린 것이다.
한국사회에는 민주주의에 대해 이상하리만큼 과도한 맹신이 자리 잡았다. 민주주의가 안정적으로 정착 된지 오래임에도 한쪽에선 끊임없이 민주주의를 내놓으라고 외친다./사진=미디어펜
‘자유’민주주의만이 진짜 민주주의다
근대국가에서 말하는 민주주의는 ‘자유‘민주주의를 의미한다. 대한민국이 선택한 민주주의도 물론 자유민주주의다. 자유와 결합된 민주주의라는 뜻이다. 결합되었다 해서 둘이 동등한 레벨에 서있는 것은 아니다. 자유가 먼저다. 오로지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존재하는 민주주의일 때만 민주주의는 그 가치가 있다.
자유를 파괴하는 민주주의는 '다수의 횡포' 혹은 '민중독재'로 변질되어 버린다. 1인에 의한 독재만큼이나, 어쩌면 그보다 더 무서운 제도가 되어버리는 셈이다. 어리석은 민중의 손에 쥐어진 민주주의가 개인의 자유 위에 군림하려 했던 역사는 놀랍게도 꽤 많다. 멀게는 전체주의자 히틀러를 당선시켜 수많은 생명을 희생시킨 독일의 민주주의가 그랬고, 가깝게는 포퓰리스트 차베스를 선택해 경제 나락으로 떨어진 베네수엘라의 민주주의가 그랬다.
민주주의를 구현하는 방식에는 두 가지가 있다. 국민이 직접 의견을 내는 직접민주주의와 내 의견을 대신해줄 대표자를 선출해 의사결정의 권한을 양도하는 간접민주주의가 그것이다. 전 세계 모든 근대국가에선 당연히 간접민주주의를 채택하고 있다. 먹고살기에도 바쁜 국민들이 사사건건 한자리에 모여 국가 사안마다 논쟁을 벌일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린 5년에 한번 대통령을 선출하고, 4년에 한번 국회의원을 선출함으로서 민의를 대신한다. 유권자라면 모두 평등하게 1인 1표를 행사한다. 그렇게 우린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는 헌법정신을 실현하고 있다. 그래서 선거를 ‘민주주의의 꽃‘이라고 말한다. 선거이외의 방법으론 전 국민의 의사를 공정하게 확인할 길이 없다. 아무리 광장에 100만, 500만 국민이 모여 있다 해도 그것이 곧장 민심이 될 수는 없는 이유다.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전면에 적극적으로 내세우는 세력은 자유민주주의보단 인민민주주의, 진보적 민주주의가 구현되는 대한민국을 꿈꾸고 있다. 수많은 무(無)이념의 정치꾼들은 이러한 반(反)대한민국세력의 세련된 선동에 편승해 정치적 이득을 취하고 있다. 국민을 '민주세력'과 '독재세력'으로 편 가르는데 앞장서기도 한다.
그리고 많은 국민들이 여기에 선동된 채, 올바른 근대적 자유민주주의가 구현되길 원하는 사람을 ‘반(反)민주, 독재 옹호자’로 오인하고 있다. 성숙한 근대의식으로 무장한 국민들만이 이들의 선동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 그것이 진정 대한민국 민주주의를 위하는 길임에 틀림없다. /황정민 자유경제원 연구원
특정세력에 의해 '민주주의'라는 단어는 정치구호로 변질됐다. 민주주의라는 단어를 처음 한반도에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김일성, 박헌영 등 공산주의자들이다./사진=연합뉴스
(이 글은 21일 자유통일문화원과 자유경제원이 공동주최한 ‘민주주의 속에 숨은 종북’ 세미나에서 황정민 자유경제원 연구원이 발표한 토론문 전문이다.)
[황정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