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민준의 골프탐험(4) 누구를 깨겠다고 필드로 가는가?
화사한 꽃들이 만발하고 녹음이 짙어지는 골프시즌이 돌아왔다. 겨울동안 '밭'을 열심히 갈아온 주말 골퍼들을 설레게 하는 골프 시즌을 맞아 국내 최고의 골프칼럼니스트인 방민준 전 한국일보 논설실장의 맛깔스럽고 동양적 선(禪)철학이 담긴 칼럼을 독자들에게 배달한다. 칼럼에 개재된 수묵화나 수채화는 필자가 직접 그린 것들이어서 칼럼의 운치를 더해준다. 주1회 선보이는 <방민준의 골프탐험>을 통해 골프의 진수와 골퍼의 바람직한 마음가짐을 가다듬기 바란다. [편집자주]
▲ 방민준 골프칼럼니스트 |
수년 전 캐나다에 갈 기회가 있어 그곳 골프장에서 캐나다 사람들과 조인해 라운드해본 경험이 있는데 내가 생각하는 골프와 캐나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골프는 판이함을 절감했다. 나는 그때 함께 라운드 하는 캐나다인이 구력 30여년의 50대 교사와 정년을 앞둔 60대의 교수, 1m80cm가 넘는 장신의 30대 청년임에도 불구하고 모두 경쟁자로 생각했다. 페어웨이를 지키려고 기를 쓰고 파 세이브를 하려고 최선을 다했다. 50대의 교사와 60대의 교수는 물론 30대의 장신 청년도 나에게는 타도의 대상일 뿐이었다.
라운드를 끝낸 결과 내 스코어는 세 동반자와 10여타 이상 차이 났지만 그것은 나만의 승리였다. 세 사람 모두 현격한 스코어 차이가 난데 대해 주눅 들거나 놀라지 않았다. 라운드 도중 OB를 내거나 워터 해저드에 볼을 빠뜨리는 등 미스 샷을 하고 나선 클럽을 내동댕이치며 비명을 지르긴 했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라운드를 끝낸 뒤 클럽하우스에서 맥주를 나눌 때 “작은 체구에 골프를 잘 치는 게 신기하다”며 축하의 한마디를 던진 게 그날 라운드와 스코어에 대한 코멘트의 전부였다. 동양에서 온 나에게 패배해서 창피하다는 기색은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었다. 그들은 조깅하듯 골프카트를 끌며 클럽을 제멋대로 휘두르며 실패와 성공이 교차하는 골프 자체를 즐기고 동반자들과 환담을 나누었다.
클럽 제멋대로 휘두르며 실패와 성공 교차하는 골프 자체 즐기는 게 최고
무대를 우리에게로 옮겨 보자. 라운드가 끝난 뒤 뒤풀이 자리에서 스코어카드를 펼쳐놓고 누가 오늘의 승자이고 패자인지 재확인하고 동반자 모두 왜 그런 스코어가 나왔는지, 오늘 자신이 잘 한 것이 무엇인지, 실수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열변을 토하고 서로의 장단점에 대해 난상토론을 벌인다. 핸디캡을 더 달라, 못 주겠다 실랑이를 벌인 뒤 다음 결전의 날짜를 잡고 헤어진다. 모두들 ‘그래 다음 라운드에는 본때를 보여 주겠다’거나 ‘두 번 다시 너희들의 도시락이 되지 않을 거야’라는 다짐을 하며 액셀 페달을 밟는다.
그러나 불행히도 골프에선 ‘벼른 날이 제삿날’이다. 누구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겠다거나 무언가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겠다고 작심하거나 신기록 달성을 다짐하고 필드에 나가면 어김없이 가혹한 절망과 만난다. 내 경우 처음 싱글스코어를 달성할 때나 언더파를 기록한 날은 그야말로 아무 적대감 없이, 아무 다짐이나 결의 없이 나가 부담 없는 라운드를 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작심하고 나가서 좋은 기록을 세운 기억은 결코 없다.
무언가 달라진 모습 보여주려 하거나, 신기록 작성 다짐후 라운딩 땐 샷 엉망돼
미국 PGA투어 진출 3년 만에 취리히클래식에서 생애 첫 우승의 영광을 안은 노승열(23)이나 스윙잉 스커츠 LPGA클래식에서 프로전향 후 미국무대에서 첫 LPGA투어 우승을 차지한 뉴질랜드 교포 리디아 고(17·한국이름 고보경)의 값진 동반우승 또한 같은 맥락에서 보고 싶다.
노승열은 이미 최경주 양용은의 뒤를 이를 한국의 차세대 골프스타로 주목받고 있었고 리디아 고는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이 선정한 ‘올해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에 뽑힐 만큼 세계가 공인하는 천재 골프소녀다. 그렇기에 이 두 젊은이에게 우승은 시간문제로 여겨졌다. 그러나 이렇게 빨리 그리고 감격적으로 승리 퍼레이드를 시작할 줄은 짐작하지 못했다.
▲ 골프는 철저하게 적대감을 배제한 상태의 허허로운 마음으로 임할 때 절로 최상의 결과로 나타난다. 방민준 골프삽화 |
노승열과 리디아 고의 동반우승은 바로 들불처럼 번지고 있는 세월호 침몰 희생자들을 애도하고 끝까지 생환의 희망을 버리지 않는 기원을 담은 검은 리본과 노란 리본의 마력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믿는다.
만약 PGA투어 시드권 확보에 전전긍긍하는 노승열이 무슨 일이 있어도 우승하고야 말겠다는 결의로 게임에 임했다면, 리디아 고가 ‘그냥 천재 골프소녀가 아님을 LPGA투어에서 증명해보이겠다’며 대회에 나섰다면 우승이 가능했을까 자문해본다.
노승열은 대회 중 인터뷰에서 “세월호 침몰로 비탄에 빠진 한국에 좋은 에너지를 주고 싶다”고 말했고 우승 퍼팅을 성공한 후에도 “나의 우승 소식이 한국민에게 좋은 에너지가 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리디아 고 역시 모자에 검은 리본과 노란 리본을 달고 라운드에 집중했다.
노승열이나 리디아 고의 값진 우승은 적대감이나 개인의 욕망이 아닌 한국 그리고 한국인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어야겠다는 나름의 소명의식이 밑바탕이 되었다고 믿는다. 그러지 않고는 노승열이 PGA투어 3승의 키건 브래들리를 비롯한 앤드류 스보보다, 로버트 스트랩의 집요한 추격에도 흔들리지 않고 전성기 때의 타이거 우즈를 연상시키는 샷 퍼포먼스를 보이며 초연한 플레이를 펼칠 수 있었던 까닭을 찾기 어렵다.
노승열 리디아 고 우승, 세월호로 비탄에 잠긴 한국인에 용기 소명의식이 밑바탕
리디아 고 역시 마지막 라운드에서 ‘철의 여인’(척추에 철심을 박은 데서 비롯된 별명) 스테이시 루이스(29), 재미교포 신지은(21·한국명 제니 신)과 숨 막히는 대접전을 벌인 끝에 우승할 수 있었던 것도 노란 리본과 검은 리본의 보이지 않는 힘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하지 않았을까.
일찍이 골프여제 애니카 소렌스탐이 극찬하고 타임이 ‘올해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100인’에 선정할 만큼 공인된 천재 골프소녀이지만 17세의 어린 소녀로서 최종 라운드에서의 압박감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개인의 욕망을 벗어나 대승의 큰 뜻이 가슴을 채웠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굳이 노승열과 리디아 고의 우승을 세월호 비극과 연결해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골프란 결코 적대감이나 개인적 열망으로 성취할 수 없는 것임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골프는 철저하게 적대감을 배제한 상태의 허허로운 마음으로 임할 때 절로 최상의 결과로 나타난다는 것을 전하고 싶다. /방민준 골프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