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민준의 골프탐험(11) 상상력이 빠진 골프, 상상할 수 없다
국내 최고의 골프칼럼니스트인 방민준 전 한국일보 논설실장의 맛깔스럽고 동양적 선(禪)철학이 담긴 칼럼을 독자들에게 배달합니다. 칼럼에 개재된 수묵화나 수채화는 필자가 직접 그린 것들이어서 칼럼의 운치를 더해줍니다. 주1회 선보이는 <방민준의 골프탐험>을 통해 골프의 진수와 바람직한 마음가짐, 선의 경지를 터득하기 바랍니다. [편집자주] |
▲ 방민준 골프칼럼니스트 |
티잉 그라운드에서부터 홀에 이르는 길을 찾는 과정은 인생과 너무도 흡사하다. 티잉 그라운드에 서서 힘에 부치는 무리한 욕심을 부리거나 자만에 빠지면 홀이 숨기고 있는 덫에 걸려 참혹한 고통을 맛봐야 하고 치밀한 계획이 없이 대강대강 덤벼도 만족한 결과를 얻을 수 없다. 지레 겁먹고 수동적인 자세로 게임에 임하는 것 역시 제 실력 발휘를 방해한다. 코스의 전체 모습을 제대로 읽고 코스에 순응하면서 자신의 실력을 발휘할 수 있는 현명한 전략을 세워 흔들림 없이 밀고나가는 골퍼만이 홀을 떠날 때 미소를 지을 수 있다.
골프를 하다보면 ‘골프는 추상화와 다름없다’는 느낌을 종종 갖게 된다. 골프코스 설계가들은 전체적인 레이아웃에서 자연을 받아들여 호쾌함과 상쾌함 등을 즐기도록 배려하지만 코스 곳곳에 함부로 대할 수 없는 미로를 숨겨두고 골퍼의 인내심과 상상력을 테스트한다.
▲ 골프는 추상화와 같다. 외형상 편해보이고 쉬워보이지만, 장애물과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만용을 부리면 낭패를 당할 수 있다. /방민준 삽화 |
피카소나 달리 미로 등의 추상화를 대하는 순간 도대체 장난으로 그린 것인가 싶을 정도로 무엇을 표현하려고 했는지 감을 잡을 수 없었지만 여러 번 그림을 대하고 그림 속에 숨은 비밀들을 하나하나 캐나가다 보면 그림이 생명을 얻고 무엇을 표현하려고 했는가 깨닫게 되는 것과 흡사하다. 골프코스, 특히 그린은 처음에는 그 속에 숨겨놓은 함정이나 비밀통로 등을 간파하지 못한 체 대충 대하지만 숨은 길을 찾아내는 훈련을 하다보면 반도체칩의 회로처럼 길이 드러난다.
이때 가장 필요한 것이 풍부한 상상력이다. 골프장에서 상상력은 무궁무진할수록 좋다. 티잉 그라운드에서 미리 자신의 볼이 날아가는 모습을 그려본 뒤 스윙을 하고 두 번째 샷, 어프로치 샷도 상황에 맞는 샷을 상상해본 뒤 게임을 풀어 가면 골프의 묘미가 확연히 달라진다. 아무 생각 없이 샷을 날리는 것과 충분한 상상력을 거친 뒤 날리는 샷은 질이 다르다. 허공에 대고 활을 쏘는 것과 표적을 정해 활을 쏘는 것이 다르듯이.
자신의 실력과 골프코스를 냉정히 분석한 뒤 상상력을 총동원해 실현 가능한 전략을 세운 뒤 시나리오대로 실천해나가는 재미는 여간 쏠쏠하지 않다. 계획대로 되면 그 짜릿함은 어디에도 비할 바가 없고 계획에서 어긋나더라도 새로운 계획을 세워 위기를 헤쳐 나가는 재미가 예사롭지 않다.
애버리지 골퍼들은 총 타수의 50% 이상을 그린에서의 퍼트로 소비한다. 그만큼 퍼트가 중요하다는 얘기다. 일정한 수준에 이르면 짧은 샷을 잘 처리해야 스트로크를 줄일 수 있는데 드라이버 샷보다는 어프로치 샷, 어프로치 샷보다는 퍼트가 좋을수록 좋은 스코어를 낼 수 있다. 특히 프로선수들에겐 퍼팅이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골퍼들이 최후의 관문인 그린에서 대강대강 끝내는 경향이 많다. 가장 중요한 곳에서 가장 건성으로 처리해버리는 것이다.
골프의 축도가 그린인 이상 골프의 묘미 또한 그린에 축약돼 있다. 겉으로 봐선 잘 손질한 비단결 같은 잔디밭이지만 그곳에는 협곡이 있고 산마루가 있다. 숨 가쁜 오르막길도 있고 멈추기 힘든 내리막길도 있다. 험난해 보이지만 잘 살펴보면 홀로 인도하는 오솔길도 숨어 있다.
그러나 보통 골퍼들로서는 보기 좋은 그린에 숨은 이런 지형을 읽어내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겉으로 본 것과 실제로 볼이 굴러가는 길은 전혀 다르다. 독단과 오판, 혼란, 착각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남들이 찾아내지 못한 숨은 길을 찾아내 볼을 홀 안으로 떨어뜨리는 묘미는 골프의 극치다. ‘땡그랑’하는 소리는 한 순간에 분노와 갈등으로 어지러웠던 머리를 명징 하게 해준다.
이런 묘미를 맛보려면 우선 부지런하고 세심해야 한다. 멀리서부터 그린의 모습을 주의 깊게 살피고 남보다 먼저 그린에 도착해서 정밀한 현장 답사작업을 펴야 한다. 볼과 홀을 중심으로 360도를 돌며 면밀히 살펴봐야 한다. 남이 퍼트하는 것을 유심히 살펴 도움을 얻고 그래도 미심쩍으면 캐디에게 조언을 구한다. 단 남에게 피해를 주거나 경기를 지연시켜서는 안 되다. 세심하게 결정하되 한번 결정하고 나면 과감하게 스트로크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고른 호흡을 유지하고 산만한 주변의 환경에도 흔들리지 않고 몰입하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이런 모든 과정은 물론 풍부한 상상력 위에 이뤄져야 한다.
보통 골퍼들이 까다롭게 여기는 그린 주변에서 홀에 붙이는 어프로치샷 역시 퍼팅 이상의 상상력을 요한다. 높이 띄울 것인가, 굴릴 것인가, 잠깐 띄웠다 굴러가게 할 것인가, 세게 칠 것인가, 약하게 칠 것인가 등 복잡다단한 스트로크는 상상력의 도움 없인 선택할 수 없다. 손에 볼을 잡고 여러 가지 스트로크 동작을 머릿속으로 해보면 볼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간파할 수 있다. 그 중에서 가장 적당하다고 판단되는 스트로크 동작을 선택, 확신을 갖고 연하면 그만이다.
골프코스는 반도체 칩과 같이 그 속에 비밀의 회로를 숨겨두고 있다. 이 비밀회로를 찾아내기만 하면 골프코스는 참 재미있고 행복한 곳이다. 상상력이 가미된 골프는 숨은 길을 찾아내 목적지에 도달하는 익스트림 스포츠의 쾌감을 안겨준다. 상상력만 있다면 ‘숲으로 가는 오솔길은 얼마든지 있다.’(영국 속담) 그리고 불가능하게만 보이는 ‘멀리 그리고 정확하게(Far and Sure)’라는 골퍼의 꿈도 가까워진다. /방민준 골프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