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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달러의 역사①]'금본위제'의 시대= '대영제국' 패권의 시대

2018-11-06 11:06 | 윤광원 취재본부장 | gwyoun1713@naver.com
미국의 사상 최고 히트 상품은 세계의 '기축통화'인 달러화다. 또 그 달러의 '발권력'은 세계 최강대국 미국이 지닌 '가장 막강한 힘'이다. 미국의 힘은 화폐 인쇄비용과 100달러 간 차이에서 나온다. 미국이 패권 경쟁에서 여러 차례 상대를 물리친 데는 달러가 핵심 역할을 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미국이 촉발했을 때 사람들은 달러의 위상 하락을 예상했으나, 결과는 '정반대'였다. 100년을 이어져 내려온 달러의 지배, 과연 끝날 수 있을까? [편집자주]

[미디어펜=윤광원 기자] 금은 아주 특별한 금속이다.

아득한 옛날부터 금은 인류의 '무한 사랑'을 받았다. 금을 향한 사랑은 그 '변하지 않는' 성질에서 나온다. 자연에서 어떤 다른 물질과도 거의 반응하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금을 교환의 수단, 즉 '화폐'로 애용했다.

금화의 역사는 선사시대부터 시작됐지만, 국제적 거래의 표준이 된 '금본위제'의 역사는 비교적 짧다.

금본위제가 국제 통화업무의 기반으로 자리를 굳힌 것은 1880년 이후다. 그리고 미국이 달러화를 평가절하한 1933년을 전후로 '종료'돼, 50여 년간 존속했다.

금본위제의 '아버지'는 아이작 뉴턴이라고 노동길 신한금융투자 연구원은 본다. 떨어진 사과를 보고 '만유인력'을 발견한 바로 그 뉴턴이다.

당시 뉴턴은 영국 조폐청의 총감독이었다.

당시 세계 대부분 국가는 금화와 은화를 함께 사용하는 '복본위제'를 시행 중이었다. 조폐청의 주요 업무는 금과 은의 교환가치 유지였다.

뉴턴은 '실수'로 은 대비 금 가격을 너무 낮게 설정, 시장에서 은화가 사라져버렸다. 영국에서 '저평가'된 은을 금으로 교환, 외국에 내다 파는 '차익거래'가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영국은 결국 금을 '유일한 화폐'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시작은 '이상'했지만, "금본위제는 인류가 발명한 위대한 통화시스템"이라고 곽현수 신한금투 연구원은 평가했다.

금본위제의 시대는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 패권의 시대와 일치한다.

영국은 '산업혁명'을 거쳐 19세기 중반 이후 '초강대국'으로 성장했다.

다른 나라들도 초강대국 영국과 교역하고 자본을 빌리기 위해 금본위제를 택해야 했다. 금 대비 은 가격이 미국의 대형 은광 발견으로 1870년 이후 '급락'한 것도 금본위제 확산에 기여했다.

금본위제는 각국의 통화가치를 금 무게 기준으로 고정시켜 놓은 시스템이다. 영국 파운드화 조차 예외가 아니었다.

각국은 보유 금의 총량에 맞춰 통화 공급량을 결정했고, 이는 정부가 '물가 수준'을 결정하는 데 도움이 됐다.

금본위제 도입으로 세계가 누린 '효과'는 컸다. 우선 세계 교역량이 증가했다.

금본위제 하에서는 '환율 변동'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투기세력은 시장에서 사라지고, 실수요자만 남았다.

1900년 당시 미국 달러화는 금 1온스당 20달러, 영국은 금 1온스당 4파운드였다. 결국 1파운드는 4달러의 가치가 있다.

금본위제 하에서 국가 간 환율은 '고정'이었다. 교역이 아무리 늘어도 지금과 달리 통화의 상대 가치는 '불변'이었다.

수출업자는 금으로 수출대금을 받아 조폐청에 가져가 자국 화폐로 바꾸고, 수입업자는 대금으로 금을 지급한다. 무역수지 흑자는 금이 그 나라로 들어오는 것이고, 적자는 유출된 것이다.

적자 시에는 금 보유량이 줄기 때문에 물가도 하락한다. 물가가 하락하면 수입품 소비도 줄게 마련이다. 이렇게 금본위제 하에서 '무역 불균형'은 '자동적'으로 사라진다.

금본위제 하에서 세계 무역은 '이론과 현실'이 별로 다르지 않았다. 무역이 활성화된 이유다.

각국은 무역 적자에 따른 금 유출 시 금리를 올리면 됐다. 세계는 금본위제를 통해 환율을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었고, 금본위제 수호를 위해 서로 '협력'했다. 



[미디어펜=윤광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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