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역사박물관에서는 지난 1일부터 5월 26일까지 북한 평양에서의 3.1운동을 조명하는 ‘서울과 평양의 3.1운동’ 특별 전시를 열고 있다. [사진=미디어펜]
3.1운동 100주년 민간 공동행사를 협의하기 위해 방북했던 박남수 전 천도교 교령(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 상임대표)의 말이다.
북한은 3.1운동에 대한 평가에 ‘매우 인색’하다.
지도부의 ‘어리석은 외세 의존’과 ‘비폭력 무저항주의’로 수많은 희생만 치르고, 실제 ‘독립에는 실패’한 운동이라는 것이다.
더욱이 만세군중이 들었던 태극기는 북한에선 ‘국기’가 아니다.
그러다보니, 박 전 교령은 북한 측 인사들에게 이런 얘기만 듣고 돌아왔다. “근데 우린 무슨 논리로 ‘인민들을 동원’합네까?”
결국 기념사업추진위의 공동행사는 북한의 ‘불참’으로 실패했다.
그런데 우리 정부도 이런 ‘참사’를 되풀이했다. 정부는 3월 1일 광화문에서 열린 100주년 기념행사에 북한 측을 초청했으나, 북한이 ‘올 리’가 없다.
정부는 대체 북한의 3.1운동에 대한 ‘평가절하’를 모르고 일을 추진했는가, 아니면 알면서도 ‘강행’했는가?
어느 쪽이든, ‘어리석고 한심한 일’이다. ‘무식한 것’인지 ‘멍청한 것’인지...
그렇다면 북한이 3.1운동의 최고 지도자라고 ‘왜곡 선전’하고 있는 김형직은 어떤 인물일까.
김형직은 1894년 7월 10일 평안남도 대동에서 태어나 1908년 강반석과 결혼했으며, 1911년에서 13년까지 미국선교회가 운영하는 평양숭실학교에 재학했다. 그는 1913년에는 모교인 순화학교에서, 1916년에는 기독교 계열 명신학교에서 교편생활을 했다.
1917년 3월 강동군에서 항일독립운동 단체인 ‘조선국민회’에 가입했는데, 이는 평양 숭실학교 재학생 및 졸업생 중심으로 결성된 ‘비밀결사단체’로, 기독교계통의 ‘애국계몽운동’에서 벗어나 ‘무력항쟁 노선’으로 전환한 민족운동단체였다.
김형직은 항일활동과 관련, 1917년 일제 경찰에 체포돼 투옥됐고, 같은 해 압록강 건너 맞은편 만주 린장(臨江)에 정착했다. 생계를 위해 한약사로 일을 했는데, 김일성은 당시 아버지가 ‘가짜 졸업증’을 걸어놓은 ‘돌팔이’였다고 회고했다. 그는 1926년 6월 5일 32세에 사망했다.
김형직은 북한 정권 수립 이후 아내와 함께 ‘민족해방운동의 탁월한 지도자’로 추앙받고 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 나온 내용이다. 그가 한때 항일독립운동을 한 것은 사실인 듯하다.
그러나 3.1운동의 지도자였다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박 전 교령은 “당시 그는 운동을 지도하기엔 너무 어린 나이였다”고 말했다. 그리고 1919년 당시 한반도에 있지도 않았다.
박 전 교령의 증언은 이어진다.
“당시 북한에선 남한보다 만세운동이 훨씬 더 치열하고 대규모로 벌어졌습니다. 운동을 주도한 천도교 세력이 당시 조선 전체 인구인 2000만명 중 300만명으로, 가족들까지 합치면 1500만이란 엄청난 숫자였죠. 이 중 3분의 2가 북한에 살았습니다. 기독교도 평북 지역이 당시 중심지였고, 남강 이승훈 선생이 이 지역에서 만세운동을 지도했습니다”
이승훈 선생은 양전백 선생 등 ‘사경회’ 멤버들과 함께 평북 선천에 있는 선천남교회에서 만세운동을 모의하고, ‘목사가 아닌 장로’ 신분이면서도 기독교계를 '총 지휘'했다.
실제 3.1운동의 3대 항쟁지 3곳 중 2곳이 북한에 있음은 이미 이 시리즈에서 밝힌 바 있다.
서울역사박물관에서는 지난 1일부터 5월 26일까지 북한 평양에서 벌어진 3.1운동을 조명하는 ‘서울과 평양의 3.1운동’ 특별 전시를 열고 있다.
박물관은 "평양은 서울과 함께 가장 활발하게 3.1운동이 전개된 곳"이라며 장로교, 감리교, 천도교 인사들이 장대현교회 인근 숭덕학교 운동장, 남산현교회, 설암리교구당에서 독립선언식을 하고 인근 거리에서 '연대 행진'을 했다고 설명했다.
박물관에 따르면, 평양에서의 3.1운동 준비는 기독교, 천도교가 각기 따로 진행했다.
이승훈 선생은 2월 7일 '105인 사건'의 동지인 선우혁을 만나 독립운동에 대해 협의했고, 선천과 평양 및 경성을 오가며 기독교계에 독립운동 참여를 설득했다.
평양 기독교계의 3.1운동 본거지 중 하나였던 남산현교회의 당시 모습 [사진=기독교대한감리회 역사정보자료실 소장. 서울시 제공]
105인 사건은 1911년 일제가 ‘무단통치’의 일환으로 민족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데라우치 마사타케 총독의 ‘암살미수’ 사건을 ‘확대 조작, 105명의 애국지사를 투옥한 사건이다.
이승훈은 2월 15일에는 평양의 기홀병원에 입원, 장로교 장대현교호 길선주 목사와 감리교 남산현교회 신흥식 목사에게서 민족대표 33인에 참여한다는 확답을 받았다. 서울에서와 같이 3월 1일에 독립선언식을 하기로 했고, 장로교계는 26일부터 숭덕학교와 숭현여학교에서 태극기와 전단을 만들었다. 감리교계는 남산현교회를 중심으로 독립선언식을 준비했다.
한편 천도교는 도사 임예환, 나인협이 24일 평양에서 서울로 올라가, 25일 천도교중앙총부에서 민족대표로 참여키로 결정했다. 또 평양대교구장 회의를 소집, 교구 내 주요 인사들이 평양에 모여 독립선언을 준비했다.
전시회에서는 평양지역 천도교 지도자이자 민족대표 33인이었던 나인협 선생의 유품 19점과, 평양에서 활동한 선교사이자 의사인 홀 부부가 갖고 있던 평양 지도 등이 선을 보였다.
또 복제본만 볼 수 있었던 조소앙 선생의 ‘대한독립선언서’ 및 연해주 대한국민의회의 ‘독립 제1선언서’와 ‘제2선언서’의 원본이 최초로 공개되고 있으며, 조선총독부가 작성한 ‘3.1운동 계보도’도 첫 선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