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세종대왕 때는 '세계 최고 수준의 선진국'이었으나, 결국 멸망하고 말았다. [사진=연합뉴스]
[미디어펜=윤광원 기자] 조선왕조는 초기에는 '세계 최고 선진국' 수준의 과학기술과 문화를 보유한 나라였다.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를 발명하고 고려청자와 팔만대장경을 만들어내면서, 지구촌 전체에 '코리아'(지금도 한국의 영문표기)를 널리 알렸던, '고려의 유산'을 고스란히 물려 받은 데다, 태종과 세종 및 세조대까지는 성리학의 이념보다 실용과 경제.국방에 더 힘썼기 때문이다.
세종 말 1430년 완성된 '대신기전'은 세계 최초의 장거리 미사일이다. 또 세종 때 전순의가 쓴 '산가요록'에 나오는 '동절양채'는 세계 최초의 온실이었고, 태종 때 처음 만들어졌다는 거북선은 세계 최초의 철갑선이다.
세종대왕이 직접 창제하신 한글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런데 그 선진국 조선은 대체 어디로 가고, 일제에게 나라를 통째로 잡아먹히고 말았는가.
조선이 급속하게 쇠망의 길로 접어든 것은 19세기 들어서다. 정조의 개혁이 실패하고 세도정치가 득세하면서, 일본과 달리 쇄국의 문을 더 강하게 걸어잠그고, 집권층의 부패와 탐욕은 극에 달했다.
하지만 19세기에 갑자기 조선이 망했다기 보다는, 그 기저에 있는 '오래도록 쌓여 온 적폐'에 눈을 돌려야 한다.
김승욱 중앙대 교수는 그 원인을 3가지로 든다. 첫째는 '독점 지향적'인 조선 정부, 둘째 재산권 보호에 무관심했던 점, 셋째는 유교문화의 영향으로 상공업을 천시했다는 것이다.
조선시대 왕의 권력은 '신성불가침'이었다. 왕과 조정은 '국가 그 자체'였다. 모든 국토도 왕이 주인이고, 백성들은 '소작농'일 뿐이었다.
심지어 근대 서양문물이 물밀듯 쏟아져 들어오던 대한제국 시기에도, 이 근본 인식은 그대로였다.
대한제국 헌법 제2조에는 "대한제국의 정치는 '전제정치'이다"라고 돼 있다. 또 토지소유자는 '시주', 즉 '임시 주인'일 뿐이다. 진짜 주인은 바로 황제였다.
동학혁명군과 독립협회가 민본주의를 외쳤지만, 실제로는 그 반대로 움직였다.
개인 소유의 사전도 근대적 토지소유권과는 거리가 멀었다. 조선시대 땅에 대한 권리는 '왕의 소유권, 양반지주의 수조권, 농민의 소작권'으로 중충적 구조였다. 게다가 장자의 수조권 상속 과정에서 '가문의 눈치'도 봐야 했다.
농업이 기본인 사회였으나, 토지소유자의 '배타적 권리'가 없다보니 농업경영의 생산성과 효율성이 좋을 리 없다.
조선시대 왕실은 농업뿐만 아니라 상공업에도 개입했다.
상업의 경우, 중요한 기간 물품은 육의전 상인들에게 '독점판매권'을 주어, 엄격히 통제했다. 심지어 그들에게 사법권까지 줬는데, 바로 '금난전권'이다. 조세 수입의 편의만 추구한 탓이다.
공업도 국영공장 위주였다. 대표적인 게 '최고 전략물자'인 도자기를 만드는 '관요'다.
신체의 자유와 재산권을 보장받지 못한 것은 평민 뿐 아니라 양반지배층도 마찬가지였다. 최고 권력과 부위영화를 누리다가도, 한 번 '왕의 미움'을 사면 그것으로 모든 게 끝장 났다. 자신만의 군대를 보유하고, 왕도 함부로 빼앗을 수 없는 신분을 갖고 있던 서양의 귀족들과는 딴판이었다.
조선시대에 당쟁이 그렇게 심했던 것도 무리를 지어 '파당'을 형성, 끼리끼리 자신들을 보호하고자 했던 성격이 강하다. 특히 '왕권을 완전히 배제했던 세도정치'는 그 결정판이다.
칼 마르크스는 이런 아시아적 생산양식을 '총체적 노예제'라고 불렀다. 오직 왕만이 노예가 아닌 것.
이런 체제에서 자율적이고 창의적인 경제활동이 싹틀 리 만무하다.
하지만 이런 경우에도 왕이 백성들의 재산권을 철저히 보호해 준다면, 달라질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다. 조선 후기로 갈수록 권력자들의 수탈이 심해졌다. 바로 '탐관오리'때문이다.
구한말 영국의 '데일리메일'지 조선 특파원이던 매킨지는 조선 사람들에게 '왜 굶으면서도 땅을 놀리고 경작하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누가 좋으라고 농사짓느냐'는 답이 돌아왔다. 정약용은 '목민심서'에서 "양반 관료들은 '백성을 밭으로' 갈아 먹는다"고 했다.
조선은 당시 세계 최대의 '노예제 사회'로 평가된다.
고려는 노예를 금지했으나, 조선은 '노비를 합법화'했다. 한국의 노예제도는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특징'이 있다는데, 그것은 대부분이 '동족'이었다는 사실이다. 세계 대부분의 국가는 전쟁포로나 외국에서 무력으로 잡아다 노예로 부렸지만, 조선은 외국을 침공한 적이 없어 그렇지 못했다.
그래서 '노비의 자녀는 무조건 다시 노비'가 되도록 신분을 고정시켰다. 매매도 인정됐다.
노비 뿐 아니라 광대, 백정, 기생, 무당, 상여꾼, 공장 등 천민은 전 국민의 70%에 달했다. 이런 사회에서 창의성과 생산성을 기대할 수는 없다.
조선의 유교문화도 '낙후의 주범 중 하나'였다.
관료와 선비들은 '상공업을 천시'하고, 장사로 생긴 이윤을 옳지 못한 것이라고 믿었다. 그 결과 상업으로 돈을 벌면, 그 돈으로 너도나도 양반 신분을 샀다.
노비에서 출발, 홍삼무역으로 거부가 된 '의주 만상' 임상옥은 흉년이 들었을 때 규휼미를 풀고, '홍경래의 난'이 일어나자 관군에게 군량미를 제공, 귀성부사에 제수돼 '지배층 반열'에 올랐다. '상도'니 '부의 사회환원'이라는 말을 듣기도 하지만, 사실 '정경유착'에 가깝다. 그의 후손들은 지주가 됐다.
이처럼 상인을 천시한 조선에서 상업으로 자본을 축적하면, 지대를 추구하는 '토지자본으로 후퇴'했다. 상공업과 자본주의적 발전은 기대하기 어려웠다.
그런 조선이 '일본처럼' 서양의 실체와 발전상을 파악하는 것도 애써 외면했다. '망국의 길'이었다.
[미디어펜=윤광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