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우석 미디어펜 논설위원 |
1960~70년대 한국형 발전모델이 한강의 기적을 만들어냈지만 정경유착에 차입경영 등의 부작용으로 경제위기를 만났다면, 차제에 재벌·대기업이 정신만 차리면 된다고 우린 판단했다. 한국형 발전모델을 박정희 시절 시작됐던 비민주 독재정치의 잔재라고 쉽게 생각했고, 기회에 잘 청산할 수 있다면 재벌 구조조정도 우리경제에 보약이 될 것이라고 속단했다.
그럼에도 한국 수출의 13.3%를 차지하던 재계 2위 그룹 대우가 1999년 여름 해체된 것은 충격이었다. 그걸 전후해 30대 대기업 중 16개가 공중분해될 때 "이게 맞는 방향인가?" 싶었지만, 그해 말 DJ는 외환위기 극복 선언을 서둘러 했다. 임기 내에 외환위기를 극복했다는 말을 듣고 싶었던 그가 빌렸던 달러 전체를 조기상환했던 건 2001년 여름이었다.
IMF 구조조정 이후 17년, 한국경제는 왜 바닥을 기고 있나?
그렇다면 해피앤딩일까? IMF를 등에 업은 구조조정이 성공적이었다고 서로가 자축한 이후 오늘날까지 17년, 경제성적표는 당혹스럽다 못해 참혹하다. DJ정부(5.0%), 노무현 정부(4.3%), 이명박 정부(2.8%) 등 역대 정부가 1960~80년대 경제 평균성장률(8%)의 반토막이 났다. 뭐가 문제일까?
투자 부진에, 기업가 정신의 퇴조 탓이라고 진단하거나 저성장은 세계적 추세라고 애써 정당화하는 목소리도 들린다. 분명한 건 개발연대의 역동적인 고성장이 죽은 것은 IMF 이후 생겨난 구조적 현상이란 점이다. 혹시 구조조정의 칼날을 들이댔던 DJ정부의 수술 자체에 문제가 있었던 건 아닐까?
말을 아끼는 스타일의 남덕우 전 총리가 "단순한 외환위기를 IMF가 한국의 경제위기로 몰아갔다"고 단언했던 게 구조조정이 한참이던 무렵이었음을 기억해둘 일이다. 1998년 10월 워싱턴에서 열린 IMF-세계개발은행(IBRD) 연차총회 세미나에서 그는 이런 예견을 했다. "IMF가 과연 정부가 파괴적 조치를 회피할 수 있도록 한국을 도와주었는지, 아니면 오히려 파괴적 조치를 강요하여 일시적이나마 한국경제를 파국으로 몰아넣지 않았는지 이점은 앞으로 학계에서 논쟁거리가 될 것이다."(<경제개발의 길목에서> 314쪽)
"단순한 외환위기를 경제위기로 키웠다" 는 남덕우 발언의 뜻은?
당시 그는 IMF 헌장의 내용을 환기시켰다. 헌장 제1조는 "회원국의 위기 때 자국경제와 국제경제에 악영향을 미칠 파괴적인 조치를 취함이 없어야 한다" 규정하고 있다. 이제 상황이 분명해졌다. 다분히 사회민주주의 이념과 강력한 평등주의 성향을 숨기고 있었던 DJ는 외환위기를 기회라고 판단해 이 헌장에 나오는 '파괴적 조치'도 해치우기로 결심했을 것이다.
서구 금융자본을 대변하는 IMF는 때론 뱀의 충고도 마다하지 않는데, IMF 전권을 위임 받은 DJ는 재벌 해체에 준하는, 자본주의의 근간을 흔드는 정책을 밀어붙였다. 어디 경제만 그랬던가? 지금 민노총과 함께 대한민국을 흔드는 전교조를 합법화한 게 김대중이었다.
제2건국운동을 한답시고 노무현정부로 이어지는 과거사 분란의 불씨를 만들어낸 것도 그였고, '악의 축' 북한에 산소호흡기를 달아준 반통일적 햇볕정책도 결국 같은 맥락이다. 때문에 15년 전 대우그룹 해체 등 재벌 청산을 포함한 DJ의 정치-경제 프로그램의 본질이란 '국가적 자살행위'에 가까운 자기 파괴적인 조치라는 게 필자의 판단이다. 국가공동체에 끼친 장기적이고 구조적 해악으로 보아 국가 반역행위까지로 규정할 수 있다고 본다.
▲ 고성장 시대 한국의 에너지를 간직한 큰 기업인인 김우중 전 대우회장의 명예회복은 눈앞의 이익에 눈먼 대중들의 상식과 균형감각 회복이 동시에 이뤄져야 하는 큰 작업이다. |
집권 5년 DJ의 개혁이란 결국 '국가적 자살행위'라고 봐야한다
정말 안타까운 일은 그 뒤에 벌어졌다. DJ의 집권 이후 사회의 좌편향이 급속하게 진행되고 지식정보의 오염현상이 벌어지는 와중에 경제민주화란 오도된 이념이 마치 국민적 합의인양 확산됐다. 박근혜 대통령도 그걸 내세워 당선되지 않았던가. 경제학자 좌승희 박사는 경제민주화란 괴물 이념을 '앉은뱅이 축구'로 비유했다.
"개발연대는 공을 멀리 찰수록 박수를 받았지만, 1980년대 이후 지금까지는 20미터 이상 길게 차면 반칙을 선언하는 이상한 규칙이 도입되어 선수들의 능력발휘를 오히려 방해한다. 우리나라는 개발연대와, (이후) 지난 30년 동안 서로 다른 시장경제를 채택·운영한 셈이다. 두 기간 한국은 경제제도에 있어서 서로 다른 나라다."(<하룻밤에 읽는 이야기 한국경제> 314쪽)
물어보자. 시장이란 무엇인가? 좌 박사에 따르면, 성장하는 사람과 기업에게 인센티브를 주는 것(incentive to growth)이다. 잘 나가는 사람, 성취를 이룬 기업, 흥하는 이웃에게는 박수를 보내줘야 한다. 그래야 나도 함께 성취를 이룰 기회를 얻는 법인데, 평등과 분배를 내세운 경제민주화 이념은 그 반대로 움직인다. "흥하는 이웃을 죽이는 게 정의"라고 했던 칼 마르크스의 망령이 아직도 우리를 지배하는 셈이다.
IMF 이후 17년 왜 제2의 삼성, 제2의 현대가 탄생하지 않을까?
과장이라고? 계급투쟁론이란 말만 사라졌지 실상이 꼭 그렇다. 대기업의 성장을 막도록 모든 명분을 동원해 규제를 하며, 중소기업은 억지로라도 키워줘야 한다고 우린 굳게 믿는다. 그걸 상생이란 말로 포장하는데도 익숙해졌다. 박근혜 정부의 창조경제도 결국은 그런 식인데, 결과는 뻔하다. 보호 받는데 익숙해진 중소기업은 몸집이 커지면 달콤한 보호환경이 사라질까봐 두려워 안주하는 걸 선택한다.
IMF 이후 17년, 제2의 삼성, 제2의 현대가 탄생했거나 조짐을 보인다는 말을 우리는 들어본 바 없는 것도 그 때문이다. 반복하지만 IMF 구조조정은 제조업 기반을 허물었는데, 개발연대 한국형 성장모델까지 망가뜨리고 말았다.
기업가정신의 실종, 투자심리 추락, 반기업정서의 확산은 그 여파이다. 필자의 이 진단에 동의를 하신다면 김우중 회장의 다음 발언을 경청해보자. 그게 괜한 변명일까? 한국경제 패러다임에 대한 확신일까?
"그때가 한국이 선진국으로 올라갈 수 있는 찬스였어요. IMF 사태 처리를 잘했으면 지금쯤 1인당 국민소득 3~4만 불 되어있을 겁니다. 그때 구조조정한다면서 기업 투자를 못하게 했어요. 투자해 놓은 것조차 과잉이라고 폐기하고 헐값에 팔아먹고…."(269쪽) "빚 많으면 부실이라고 하는데, 그것부터 잘못됐어요.…우리가 돈 빌려서 허튼 데 쓴 게 없어요. 공장에 투자한 거지요. 다른 대기업도 비슷할 거예요. 어떻게 투자해놓은 게 잘못이라고 합니까? 금융위기 극복한 것도 설비가 가동했으니 가능했던 겁니다."(233쪽)
김우중은 고성장 시대 한국의 에너지를 간직한 큰 기업인
지난 보름 새 나는 외환위기와 대우그룹 해체 문제에 대해 네 차례 글을 썼다. 한국경제의 성장과 한계에 대한 암시가 회고록 <김우중과의 대화>에 담겨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고, 그걸 더욱 진지하게 받아들이길 기대하기 때문인데, 이제 마무리다.
돌이켜보면 김우중은 '앉은뱅이 축구'를 거부한 죄로 DJ에 찍혔다. 경제가 역동적으로 고성장하던 시대의 패러다임을 더 밀어붙여 국가와 사회에 헌신해야 한다고 고집한 탓이다.
필자의 판단이 맞는다면, 그의 명예회복은 개인 차원의 것만은 아니다. 개발연대의 패러다임에 눈 감은 속류(俗流) 지식인의 집단적 각성이 우선 필요하다. 큰 전략 없이 포퓰리즘에 눈먼 사이비 정치인들의 깨침도 이뤄져야 한다. 그와 동시에 대우와 김우중의 명예회복은 눈앞의 이익에 눈먼 대중들의 상식과 균형감각 회복이 동시에 이뤄져야 하는 큰 작업이다. /조우석 미디어펜 논설위원, 문화평론가